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27)
레필리아 레소드-328화(327/398)
레필리아 레소드 328화
검은 동화 이야기(7)
레필리아 레소드 페이즈.
나선이 모든 것을 무로 재워냈다.
반으로 잘려 나간 녹색 괴물은 재가 되기 시작했다. 그것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그는 주마등을 겪고 있었다.
일생을 살면서 보고 들었던 그 모든 것들이 수초에 스쳐 지나갔다.
라파엘은 태초에 라파엘에게 태어났던 때를 추억했다.
영원불멸의 시간은 그의 곁에서 있을 거라고만 상상해 왔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들어맞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 하. 자네……. 꼴이 말이…… 아니구만.”
라파엘은 잘려 나간 몸뚱어리 덕분에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분명한 의지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후우, 하아. 네놈……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리에르는 눈을 어지럽히는 혈흔들을 닦아내며 내뱉었다.
그의 등 뒤로 맺혀졌던 칠흑의 깃털들은 전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울컥.
리에르는 몸이 휘청하는 것을 느꼈다.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끈적한 혈흔들이 입에서 쏟아져 내렸다.
리에르는 입가를 억지로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비집고 나왔다.
코에서도, 귀에서도,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리에르는 다른 팔을 들어 피를 훑어내려 했다. 하지만 손목 위의 허전함만 느껴졌다.
리에르는 거의 걸레 조각처럼 몸 곳곳이 도려지고, 잘려 나갔다. 피범벅이 되었지만,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착……각…… 하지 마.”
라파엘은 조각난 몸으로 편하게 누워서 입가를 비죽비죽했다.
“그분……은 더는……. 자네를 귀하게…… 여기진 않아…….”
“그런 건……. 필요 없어.”
리에르는 핏물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가브리엘은 어디에 있나?”
리에르의 말에 라파엘의 눈동자가 천천히 흐려졌다.
억지로 정신을 부여잡은 불사였던 괴물. 입가에서 조소가 베어져 나왔다.
“미카……. 그 머저리도……. 죽었…… 나?”
“너희 중에 가장 먼저 고깃덩어리로 돌아갔지.”
리에르의 말에 라파엘이 큭, 하는 짧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분에게……. 대항해도 무엇 하나…….”
“그딴 말은 필요 없어.”
리에르는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오자 아르카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서히 죽음으로 재가 되어가는 라파엘을 내려다보았다.
“가브리엘 놈이 어디에 있는지나 말해.”
“하하……. 자네의 앞에……. 고통만이 가득하기를…….”
라파엘의 저주가 떨어졌다. 리에르는 눈을 찌푸리며 검을 그어 내렸다.
칠흑과 순백의 나선으로 할퀴어진 라파엘은 급속도로 재가 되어 허공에 퍼져 나갔다.
“엘.”
“네, 말씀하세요.”
엘은 어느새 리에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마법은 리에르의 몸을 하나하나 회복시키고 있었다.
잘려 나간 손목은 조각 조각났던 살점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 뒤덮인 검은 딱지들은 전부 새살로 돋아났다.
“가브리엘 놈의 행방을 아나?”
“글쎄요, 그가 이번엔 어떤 전생을 했을지는 알 수 없지요. 무엇보다 수호신장 세 명은 교단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가브리엘의 행방은 묘연하니까요. 어차피 교단 내의 수호천사이니 아르미안이 곧 조사를 끝낼 거예요.”
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되도록 오늘 안으로 모든 수호신장을 잠재우고 계획을 본격화할 생각이었다.
하나의 수호신장이라도 남는다면 어떤 식으로 변수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당신이 이겼습니다. 당신의 모든 무구가 모이고, 황금의 샘에 닿는다면 모든 영광을 손에 얻게 되겠군요.”
리에르는 모든 무구가 모이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강력함을 선보였다. 그것은 엘의 예상을 웃도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황금의 샘에서 영광을 되찾는다면 꼭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리에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주를 받은 몸으로 기력을 쏟아내니 급 피곤함이 찾아왔다.
차라리 그대로 눈을 감고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옆구리를 중심으로 퍼지는 죽음의 기운은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는 고통이다.
엘은 리에르에게 치료를 계속하면서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자,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마리화나로 만들어진 궐련이었다.
“고통을 잊게 해줄 겁니다.”
리에르는 그가 건네준 궐련을 받았다.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고통이 은은하게 사라진다. 지독한 마약성이 전신의 통증을 감싼다.
몽롱하다.
“마리화나의 꽃말을 아나요?”
그딴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거짓입니다.”
지금은 쉬고 싶었다.
“당신의 인생 모든 것이 거짓된 환상에 불과하지요.”
형의 복수를 갚았다.
“우리의 계약을 잊지 마세요.”
어리석은 행동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때까진 부디 망가지지 마세요. 모든 비극을 안고 가세요.”
소중한 것들을 떠올린다.
쓰러지는 것은 사치다.
* * *
말라붙은 시체 더미들.
끝나지 않는 긴 전쟁의 속에서 죽음은 한없이 탄생했다.
아군에게는 최소한의 예를 다해 검이라도 묘비 대신으로 세웠다. 하지만 적에게는 가차가 없었다.
몬스터 시체 안에 파묻혀 있는 인간의 살점은 천천히 재생을 꿈꾸었다.
그것은 탐욕을 품었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영광을 꿈꾸었다.
세포 단위로 갈라진 그것은 성검에 베여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뚱어리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생존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시 열망을 품고자 했다.
꿈틀거린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지였다.
아무도 알 수 없을 그것에 대해 누군가가 찾아왔다.
저벅, 저벅. 금발 머리의 청년은 거대한 양손 검을 등에 걸쳐 메고서 괴물들의 묘지에 찾아왔다.
그것은 청년을 보고 꿈틀거렸다.
청년은 그것을 보고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아, 미카엘. 결국은 그 꼴인 거냐.”
청년은 미카엘이라 불렸던 세포 조각들을 보며 위로의 말을 품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웃음을 머금었다.
“걱정하지 마. 지금은 공주님의 호위만 하고 있지만, 곧 원한을 갚아줄 테니 말이야. 그래도 같이 태어난 형제에 대해서 슬픔을 표할 감정은 남아 있다고.”
청년이 걸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짚었다.
오도독, 오도독.
남아 있는 한 줌의 핵과 살들을 전부 집어삼키면서 청년은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해냈다.
“역시 그때 죽이지 않기를 잘했어.”
금발의 청년. 지금은 페리안의 근위 기사로 들어가고, 제멋대로인 공주의 호위이기도 한 남성은 세로줄 눈을 번뜩이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 * *
페리안의 3만 군대는 남진을 시작했다. 그중 2만의 대군과 1만의 정예는 병력을 반으로 나누었다.
1만의 정예는 대륙 오제중 하나인 아로운 킴이 맡아 동 연합의 집결지로 지원을 가고 있었다.
2만의 대군은 마찬가지로 대륙 오제인 빅스터 나이브만이 맡고 있었다.
그는 대륙 오강 중 유일하게 교단의 편인 용병왕의 나라 루카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급 근위 기사인 텟사와 프세를 데리고 신규 근위 기사들을 이끈 빅스터는 마음껏 전쟁의 그림을 펼쳐놓았다.
루카스 왕국은 앞에 합종군에서 패했지만, 그들의 진정한 힘은 아직 시작도 한 것이 아니었다.
루카스는 감히 자신들을 상대로 병력을 나눈 페리안에게 분노했다.
페리안의 행위는 같은 강국임에도 루카스를 몇 수 아래로 보는 것이나 다른 바 없었다.
이에 분노한 용병왕 니드는 자신의 정예 경기병들을 전면에 내세워서 출정시켰다.
선봉을 맡은 것은 루카스의 태자인 니자였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인 니드에게 제왕학을 교육받은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니드에게는 총 서른 명의 아들, 딸이 존재했다.
왕위 계승자가 서른 명이나 되는 루카스에서 차기 왕으로서 인정받는다 함은 어지간한 재능만으론 어려운 일이었다.
태자인 니자는 총 3만의 대군을 이끌고서 빅스터와 전면전을 펼쳤다.
니자는 상대가 천하의 대륙 오제라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대륙 오제.
전란의 시대에서 무수히 태어나고 지는 영웅 중, 가장 빛나는 대영웅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루카스로선 매우 불편한 말이었다.
대륙 오제에 들어가는 대 영웅의 이름에 루카스 소속은 없었다.
루카스는 전투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왕국이었다. 그러니만큼 훌륭한 영웅들은 얼마든지 차고 넘치는 상태였다.
그러니 루카스의 처지에선 대륙 오제라는 단어가 달가울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스운 단어나 다른 바 없었다.
“오늘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은 행군이 어떤 비극을 보여주는지를 잘 지켜보라!”
태자 니자와 함께 루카스의 다섯 장군이 군단을 이끌었다. 총 7만의 대군이었다.
빅스터는 이전에 루카스의 젊은 천재에게 한 방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모든 일에 만전을 기했다.
전쟁하기 전에 이미 승리하는 그림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신 그 그림의 이상적인 흐름을 짚고, 되짚었다.
사실 루카스의 젊은 천재, 빅스터의 수를 읽었던 왕자는 귀양을 당한 상태였다.
어린 나이에 번뜩이는 지혜를 보였지만, 결국 합종군은 대패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목을 댈 정도로 호언을 했으나, 결과적으론 패하게 되었다.
나스의 곁을 지키던 루카스의 여무사 사샤도 퇴직은 신청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나스가 지게 되는 바람에 참형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스가 없는 군에 더는 있을 생각이 없었기에 그저 하녀의 행색으로 귀양 간 왕자를 보좌하고 있었다.
나스는 다행히도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왕자였기에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다른 왕자들의 관점에서 그가 어느 정도의 실권만 지고 있었다면 깎아내리려 애를 썼을 터였다.
하지만 서른 명이나 되는 왕자와 공주들에게 있어 나스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전은 처음에 팽팽했다. 빅스터의 빈틈없는 지휘와 전술은 호기롭게 진군하던 루카스의 경기병들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시시각각 등장하는 목책과 갑자기 튀어나오는 함정들은 경기병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전쟁은 누가 유리하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다. 하지만 니자는 현재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루카스는 누가 뭐라 해도 왕위권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니자는 그런 곳에서 당당하게 태자가 된 것에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월등한 재능을 모두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천재 지략가라는 빅스터를 힘으로 압도시켜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는지 빅스터는 굳건하기만 했다.
그때 니자 태자의 진영에 있던 책사는 전략안을 수립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치열한 공방을 이어가고, 뒤로는 적의 수송선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루카스 내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지리적 이점은 그들에게만 있었다.
전략안이 수립되고 나서 루카스의 거침없는 진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리 수송선에 대한 첩보를 확인한 루카스의 전술 타격 대가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패여 있던 함정에 빠진 루카스 전술 타격대는 전멸하게 되었다.
타격대 하나를 잃은 것은 큰 손실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태자 니자를 지원하기 위한 루카스의 정예 병력 두 곳이 존재했다.
좌와 우로 2왕자와 3왕자가 각각 1만과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모루와 망치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을 빅스터가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을 막기 위한 전술적 움직임은 반복되었다.
하지만 용병왕의 피를 똑같이 이어받은 두 왕자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들은 소규모 단위의 전투지만 연승을 거두면서 페리안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여기서 태자인 니자는 심리적인 불편함을 느꼈다. 동생들은 계속 승전을 쌓아가지만, 자신은 계속 멈추어 있기만 했다.
결국, 니자는 동생들이 전략적 요충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승부를 보기로 했다.
주변 제장들이 말렸지만, 그의 결심은 굳건했다.
빅스터 나이브만의 전략적 방진은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천재적인 전략안을 지닌 니자의 눈에는 그의 빈틈이 자꾸만 보였다.
얼핏 보면 빅스터의 방진은 다변화하는 특징을 지닌 살아 움직이는 진법이었다.
하지만 항상 법칙은 같았다. 그리고 그 법칙이 범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니자의 시야 안으로는 훤히 보였다.
“나를 믿어라, 총공격을 감행한다! 대륙에 허명이 가득한 오제를 오늘 끌어내리리라!”
결국, 태자의 엄명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단단하지만 유일한 허점, 중앙을 관통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직접 진격했다.
범상치 않은 루카스의 진격을 보고 빅스터는 겨우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려놓았던 밑그림이 서서히 색칠이 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