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35)
레필리아 레소드-336화(335/398)
레필리아 레소드 336화
반 코스모스 연합(8)
그가 있었기에 힘든 유년 시절에 웃을 수가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사랑을 알았고, 실연을 배웠다.
‘네가 있었기에 난 용감할 수 있었어.’
괴로운 기억으로 페리안을 떠나고 배타적 삶을 살았던 페브리안 남매.
그들의 트라우마는 누구도 고칠 수 없었다.
아무리 유트가 실력이 좋았어도,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살았다면 지금의 권력을 되찾을 수도 없었을 터였다.
‘내가 구해줄게.’
유이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며 눈물샘을 틀어막았다.
이것만은 에레사 언니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만 가능한 일.
검은 실을 뒤쫓아간다.
그것의 뒤에는 무언가가 존재할 것만 같았다.
검은 실을 넘고, 넘어갈수록 또 다른 리에르들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맑은 웃음소리였다.
유이는 힘겹게 검은 실의 끝에 다다른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대낮처럼 빛나는 밖을 향해 유이는 물러서지 않고 걸어나갔다.
눈부셨다.
광활한 햇볕이 모든 것을 따사롭게 감싸 안았다.
그곳에는 마치 꽃과 나무로 가득했다.
평화로운 듯이 노니는 동물들. 평화롭게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들. 모든 것이 빛으로 감싸아져 있었다.
그 찬란한 언덕에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어다녔다.
소녀는 분명히 사랑받는 존재였다. 눈빛에는 거짓이 없었고, 사심이 없었고, 슬픔이 없었다.
유이는 이름 모를 그녀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소녀는 유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했다.
유이는 잠시 당황하며 손을 들어 말을 걸려 했다.
하지만 검은 소녀는 뒤로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녀가 달려간 곳에는 칠흑의 긴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이 있었다.
“자드, 나의 자드!”
검은 소녀는 칠흑의 남성에게 안겨서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칠흑의 남성은 자신의 품에 파고든 소녀를 들어 안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어……?”
유이는 그 순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리……엘?”
긴 머리카락의 남성은 리에르와 똑 닮은 남성이었다.
머리카락만 더 길고,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 이외엔 빼다 박은 외모였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하와. 길을 잃은 자일 뿐이니.”
자드라고 불린 칠흑의 남성은 온화하게 속삭였다.
그의 품에 안긴 하와라 불린 소녀는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남성은 온화하게 웃으며 유이를 바라보았다.
리에르와 똑같은 얼굴로 부드럽게 웃는 모습을 보이니 유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에게 안겨 있던 하와라는 소녀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흘겼다.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유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자신을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유이는 영체와도 같은 존재니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의 눈동자가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달랐다.
“더러운 년…….”
하와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쏟아졌다.
방금 전만 해도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거짓 연기였다는 것처럼 뒤바뀌었다.
“너 따위가 닿을 곳이 아니야. 검둥이는 오로지 나만의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의 것.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아.”
하와의 입이 길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은 귀 끝까지 닿아 초승달처럼 웃음을 그려냈다.
유이는 뒷걸음질했다.
하와의 몸이 갈라지면서 수많은 검든 실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이는 도망치려 했지만, 촉수들이 더 빨랐다.
그것들은 유이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조여왔다.
유이는 급격하게 느껴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촉수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유이의 목을 졸라댔다.
숨이 막혀왔다.
유이는 공기를 마시지 못해 급격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몸뚱이로 내 것을 유혹해? 천박하구나!”
검은 소녀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희미해지는 유이의 시야 안으로 리에르의 얼굴을 한 남성이 보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온화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그저 인형이나 다른 바 없어 보이는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오호라, 눈깔이구나?”
어느새 하와는 유이의 코앞까지 와서 광기로 그득한 안구를 열어 보였다.
핏기가 꿈틀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유이의 루비 빛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길고 끔찍한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 눈깔이지?”
하와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유이는 답변하지 못했다.
지금은 전신이 조여지고 있어서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더 끔찍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갑자기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깔깔깔!”
찢어지는 듯한 웃음소리만이 이 세상에 울려 퍼졌다.
유이는 물밀 듯이 밀려드는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면서 입가를 열어 보였다.
“넌 누구……!”
유이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몸을 옥죄는 촉수들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부서뜨릴 듯이 꿈틀거렸다.
“곧 보게 될 거야.”
핏빛으로 흐려지는 유이의 시야 속으로 검은 소녀가 폭소했다.
“아니, 이제 눈깔이 없어서 보기 힘들겠지만.”
유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밀어내려고, 회피하려고 해도 발밑에서 올라오는 어둠은 끊임없이 추격해 왔다.
“유이!”
유이는 귓전을 때리는 리에르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실적인 감각이 전달되었다.
리에르는 조금 전만 해도 마왕의 눈동자를 열면서 유이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어깨를 흔들면서 당혹감 서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이는 다급한 리에르의 목소리에 무어라 답을 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꿈에서 깬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자신이 시전했던 진리의 힘은 소거된 지 오래였다.
“바보…….”
유이는 힘겹게 입가를 열어 보였다.
“눈을 떠, 유이 페브리안!”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힘겹게 눈을 열어 보였다.
마치 바늘로 안구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전해졌다.
유이는 억지로 눈가에 힘을 주어보았다.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찌를 듯한 통증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너 방금 뭐 한 거야!”
리에르의 닦달에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찢어질 듯한 통증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담함.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유이가 웃을 수 있는 것은 리에르의 목소리가 예전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마왕일지 모르나, 소꿉친구인 유이에게 있어서는 힘세진 바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너…….”
리에르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불길함이 가슴 언저리를 두들기고, 성대 틈으로 기어 올라왔다.
“내 손가락 지금 몇 개 펴고 있는지 보여?”
리에르가 뭔가 눈치챈 듯이 말을 하자 유이는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두 개려나.”
“…….”
리에르는 유이의 멍청한 답변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을 펴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틀리지 않았어도 리에르는 알 수 있었다.
유이의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지금은 빛을 잃고 초점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알 수 있었다.
유이는 식은땀을 흘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리에르는 버럭 화를 내며 유이에게 소리쳤다. 유이는 리에르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오히려 안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만 해도 뭔가 예전과 달라진 듯이 보였던 리에르를 보았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고, 노골적인 빈정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도 보여주었다.
그 리에르는 유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예전과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아주 짧은 그 1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아는 사람은 이미 없어졌을지도 몰랐다.
자신을 침대에 눕히고, 반강제로 옷을 벗기며 남자의 얼굴이 되어가는 그에게서 두려움도 일어났다. 하지만 유이는 진실을 알고, 그를 도울 방법만 안다면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원했을지도 몰랐다. 비록 사랑이 없는 행위라 하여도.
“몰라.”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풉, 웃어버리고 말았다.
리에르는 유이의 성의 없는 답변을 들으며 이를 사려물었다. 눈가에 맺혀진 그녀의 눈물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 하나였다.
유이 페브리안은 지금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지독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리에르는 벗어놓았던 자신의 망토를 짚었다. 그리고는 멍하니 누워 있는 유이의 몸을 감쌌다.
“뭐 하는 거야, 이 바보 원숭아!”
유이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리에르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가볍게 자신을 들어 올리며 공주님 안기를 하자 저절로 상황을 잊고서 얼굴이 붉어졌다.
유이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에르는 그대로 문밖으로 나섰고, 어딘가로 거의 날 듯이 뛰기 시작했다.
리에르의 다급한 모습을 보니 유이는 한편으로 가슴이 시리도록 뭉클한 것이 느껴졌다.
역시나 리에르는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던 바보 원숭이였다.
유이는 바람이 마치 칼날처럼 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펄럭이며 연신 리에르의 턱을 때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에도 힘을 쓰면 죽인다더니…….”
“죽인다곤 안 했어.”
유이의 투덜거림에 리에르의 딱딱한 대답이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 반응을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리에르는 그들에게 어떤 답변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갈 길만 걸어갔다.
유이는 생각해 보니 리에르의 망토에 몸을 둘둘 말려서 공주님 안기로 끌려가고 있단 것을 인지했다.
새삼스럽게 창피해서 유이는 아예 리에르의 가슴에 얼굴을 비집고 들어갔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길 바랐지만, 은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흔한 부류가 아니었다.
내일이면 온갖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달고서 퍼질 것이 분명했다.
유이는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하지만 적어도 리에르의 본심은 깨닫게 된 것 같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치료가 가능한 녀석에게 데려다 줄 테니.”
리에르의 걱정스러운 말에 유이는 왠지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엘 파실드?”
“…….”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아냐?”
“맞아.”
유이는 리에르의 답변에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본 거야?”
누군가가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면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리에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상대가 유이라는 것이 그의 심정을 묘하게 대립하게 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봐서 눈이 아픈 걸지도.”
유이의 농담에 리에르는 웃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 많은 데이터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리에르의 기억 속에서 괴상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 존재는 유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반격해 왔다.
그녀의 함정에 걸린 유이는 그저 속절없이 전신의 자유를 빼앗기고 제압당했었다.
“에렌 언니 임신 축하해.”
유이는 콧가를 찡긋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무미건조한 리에르의 반응.
유이는 자신이 스치듯 본 기억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자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막무가내로 축하하기엔 에레사의 상황이 좋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