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39)
레필리아 레소드-340화(339/398)
레필리아 레소드 340화
어둠 속으로(2)
엘의 말에 유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짧은 시간이었기에 세세하게 훑어볼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간 느낌이었고, 전부 기억나지도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기에 단편적으로만 기억나요.”
“그렇군요.”
엘은 유이의 대답을 듣고서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유이는 엘의 이중성에 대해서 주의를 표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눈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상대의 표정도 볼 수 없기에 소리 정보로만 판단해야 했다.
“좋습니다.”
엘은 홍차 잔을 들어 입 안을 적셨다. 은은한 향내로 마시고, 따뜻한 액으로도 마신다.
엘의 부드러운 눈동자 안으로 잔을 매만지는 유이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눈이 안 보이니 앞으로의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른 것을 여쭤보죠.”
엘은 다시 목을 축인 뒤에 홍차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당신이 본 테헤라자드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던가요?”
“네?”
유이는 엘의 말이 알아듣기 힘들어서 반문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지금 당신의 눈은 저주받았어요. 즉 얼마든지 시신경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이죠. 그 저주는 오로지 단 한 명만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당신은 테헤라자드와 어떤 모습으로든 만났을 겁니다.”
유이는 엘의 말을 들으니 검은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에르의 생각을 읽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정보들. 그리고 생각을 읽는 자를 상대로 대화와 질문을 시도할 수 있는 존재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검은 소녀를 보았어요.”
“그 소녀는 무슨 말을 하던가요?”
엘의 말에 유이는 검은 소녀가 표독스럽게 외치던 것이 떠올랐다.
그 소녀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잔인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눈에 대해서 언급하며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암시했다.
“유이 양?”
앨은 갑자기 유이가 떠는 것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에게 자신의 것에 손을 댄…….”
유이는 시커먼 홍채를 부풀리는 검은 소녀가 지금이라도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대가를 주겠다고…….”
겉보기엔 작은 소녀에 불과했으나, 그것은 살아 있는 맹수와도 같았다.
“자신의 것이라…….”
엘은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던 엘은 천천히 눈가를 열며 유이를 바라보았다.
“혹시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았나요?”
엘의 말에 유이는 다시 입을 닫았다.
검은 소녀의 옆에 있던 남자는 인자해 보이지만 어딘가 생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리에르와 기분 나쁠 정도로 똑 닮아 있었다.
“혹시 그 남자에게 익숙한 느낌은 없었나요?”
유이는 엘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대체 왜 묻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대답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육감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단편적으로만 기억이 나요.”
“그렇군요.”
엘은 그럴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환자에게 말을 많이 걸은 것 같군요. 일단은 푹 쉬어야 몸도 호전될 겁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휴식부터 하세요.”
“바보 원숭이, 아니, 지금 전투 상황은…….”
유이는 조심스럽게 현재 전투 상황에 관해 물었다.
그녀의 질문이 노골적으로 리에르의 소식을 궁금해하기에 엘은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리에르는 아직 전투 대기 중이에요. 아마 곧 그것이 등장하는 대로 전투를 시작하겠죠.”
엘이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지금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아도 소꿉친구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에레사도 리에르와 소꿉친구였고, 그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치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에 제대로 답할 수 없기에 불행인 것도 존재했다.
“리에르가 참 부럽군요. 이런 미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니.”
엘의 말 한마디에 유이는 대번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그녀의 입술이 조그맣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며 뭔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 입을 꼭 다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조금 쉬어두세요. 전투가 마무리되면 알려 드릴 테니.”
엘은 유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릴 적 교단에 의해 양친을 잃고 오빠와 단둘이 살아온 소녀.
지금은 오빠가 아버지의 영광을 되찾았지만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사랑하게 된 남자가 칠흑의 마왕이라는 사실은 비극만을 예고했다.
“고의로 숨기는 것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엘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유이는 제대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엘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엘이 아니었다.
“검은 소녀.”
엘은 그녀의 존재가 누구인지 유추하고 있었다.
테헤라자드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와 리에르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리해야 했다.
리에르는 포스가 되기 이전에는 그저 평범하고,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없이 많은 전생을 경험했고,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일단 생각을 정리하기에 앞서서.”
엘은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어냈다. 그 자신의 로브 색과도 같은 순백의 지팡이가 황금빛을 흩뿌리면서 생성되었다.
“교단 입장에서 슬슬 움직일 시기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엘은 깊이 눌러썼던 후드를 벗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굉장히 역겨운 마나의 냄새가 진동했다.
테헤라자드가 자주 하는 수작이었다.
괴롭히려는 상대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빼앗는다.
리에르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는 에레사 레이나드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교단의 보호 아래 있었다.
아니, 리에르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어차피 테헤라자드가 마음먹는다면 인간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소중한 이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은 즐거운 유흥의 하나였다.
엘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엘도 사랑했던 연인을 빼앗겼고, 소중한 친우들을 전부 빼앗겼다. 덕분에 그의 인성은 도려지고 찢어졌다.
“유이 페브리안이겠지요.”
엘의 눈에서 이채가 서렸다. 주변에 스산한 기운을 흩뿌리는 존재들이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낮에도 밤에도 항상 어둡다. 유이는 자신이 시각을 잃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유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기댈 곳이 없었다.
리에르는 분명 힘든 전투를 하고 있을 테니 응석을 부릴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를 도우려 했지, 부담을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유이는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마치 눈을 어딘가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칠흑의 마왕이라고 불리고, 모든 전란의 중심에 선 리에르를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무리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뭐였지.’
유이는 칠흑으로 칠해진 듯한 검은 소녀를 떠올렸다.
분명히 그 소녀에 의해 자신의 몸에 어떤 저주가 새겨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가 신이라 불리는 존재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녀가 자드라고 부르는 청년은 분명히 리에르였다.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몰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꿈을 꿔도 그 안에 나오는 존재가 누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확정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기억의 영상은 리에르도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이었다. 즉 내면 깊숙이 박힌 옛 기억이란 의미였다.
그렇다면 유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리에르의 존재는 단 하나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신…….”
태초의 신. 모든 만물을 만들어 낸 유일신 테헤라자드.
태초 신화에도 없는 존재. 이미 유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내용이 아니었다.
“눈이 안 보이게 되니 지금은 신에게라도 빌고 싶어진 건가?”
유이는 귓가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다가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집중해 있었다.
“그만두는 것이 좋아. 신이라는 존재는 종교에서만큼 자비롭지만은 않으니까 말이야.”
“뭐야, 지금까지 어디가 있었던 거야?”
유이는 레이루나의 목소리를 듣고서 안심한 듯이 투덜거렸다.
“어디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지 않나? 안 어울리게 도둑고양이처럼 남자 침실을 찾아들지는 예상치도 못했으니까.”
유이는 레이루나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는데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니 불편함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남이사.”
유이는 심통 난 듯이 중얼거렸다.
“남자에게 정신이 팔린 여자만큼이나 한심해 보이는 것은 없지.”
유이의 느낌만이 아니었다.
레이루나의 목소리는 지극히 냉랭하고 지극히 건조했다. 평소의 유들거리고 들뜬 말투와는 명백하게 대조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부터가 신랄한 비난조였다.
“여자는 지고한 꽃 같아야 한다. 벌이 알아서 찾아들어야 하지, 꽃이 벌을 찾아가는 법은 없지. 무엇보다 꽃이 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색기를 뿌린다면 이미 엄연한 갈보라고 말할 수 있지.”
“꽃일 생각도 없고, 비난을 받을 생각도 없거든?”
유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루나가 평소 자신에게 작업용 멘트를 많이 날린 적은 있었다. 그것은 그냥 가볍다고 치부했으나, 지금 그의 분노는 명백한 질투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난 정말 슬프다.”
레이루나는 등에서 양손 검을 뽑아들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수많은 핏물을 머금은 검은 이미 마검에 가까울 정도로 사악한 기를 갖고 있었다.
갑자기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울리자 유이는 바싹 경계심이 솟아올랐다.
“난 차라리 네가 아름다운 꽃으로 남아 향기를 남기길 바랐다. 수없이 긴 세월 동안 나를 기쁘게 만드는 향취에 감사했었다.”
레이루나의 말투는 지극히 슬픈 어조로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은 대단히 슬프고도 기쁜 날이다. 유이 페브리안.”
레이루나가 유이의 앞으로 한 발 걸어왔다.
유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뒤로 움직였다. 하지만 금세 그녀의 등으로 메마른 벽의 촉감이 느껴졌다.
“향기로운 꽃이 꺾여서 슬프다. 역시 인간은 그저 인형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다시 깨우쳤기에 기쁘다.”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이는 레이루나의 말에서 광기를 느꼈다.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로 서슬 퍼런 음률이었다. 슬픈 말투와 광기의 말투가 뒤섞이니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남자가 칼까지 뽑아들고 있다면 유이의 불안감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유이는 자신의 방에서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루나 정도 되는 강자들을 피해서 달아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무슨 소리? 하……!”
레이루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의 이마 언저리를 짚으면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예전과 달라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더는 북방의 검술사를 연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극히 욕망에 충실한 수호신장으로서 먹잇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지금 몹시 슬퍼하고, 몹시 분노하고 있단다. 아가야.”
들끓는 듯이 열광된 목소리였다.
유이는 계속 뒤바뀌는 레이루나의 말투를 들으며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신을 구원해 줄 사람은 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 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어리석음의 대가로 눈이 멀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유이는 겨우 침대 끝을 찾아 바닥에 발을 올렸다. 당장 도망치는 것은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시도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다가 바닥에 있는 물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대로 넘어지려는 찰나, 강한 힘이 유이의 손목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