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4)
레필리아 레소드-34화(34/398)
레필리아 레소드 34화
슬퍼지려 하기 전에(1)
“괜찮은 거야?”
유이는 유트가 상처를 입은 모습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머리와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유트는 대회에서 처음으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유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유이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큰 상처는 아니니 금방 나을 거야, 걱정하지 마.”
“으응…….”
유이의 둥글둥글한 큰 눈망울이 유트의 말에도 안심이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혈연이라곤 오로지 둘 뿐이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두 사람의 친밀도는 여타 다른 오누이와는 달리 진하고, 깊었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둘 이외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전과 다른 것은 리에르라는 존재가 껴 있다는 것일 뿐이었다.
“리엘이 녀석 잘하고 있는지 보러 가야지. 가자, 걱정하겠다.”
“어휴, 그 원숭이 걱정은 어지간히 하요. 상대는 일격 일참을 사용하잖아. 벌써 땅바닥에 널브러져서 어딘가로 실려 가고 한동안 미안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지도 못할걸?”
유이의 말마따나 리에르의 성격상 상대에게 미안해지면 한동안 앞에 나타나질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나 우연을 가장하여 어색한 웃음과 사과할 타이밍을 볼 것이다.
“그러니까 집구석에 박혀 있지 않게 시합을 지켜보려는 거야.”
유트는 지금의 리에르라면 쉽게 지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기리란 보장 역시 없었다.
리에르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타인과 비교되어 살아왔다.
덕분에 자신도 모르게 남의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었다.
리에르의 입장에선 유트의 어려운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고, 자신 때문에 대회에서 탈락한다면 심하게 자책할 것이 뻔했다.
“어휴,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이는 한숨을 쉬면서 의무실 문을 열었다.
유이는 나가자마자 앞에 있는 물체에 부딪히고서 콧잔등을 감싸 안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앞에 있던 사람을 쏘아보던 유이는 쯧쯧 혀를 차 보였다.
옛날 어른들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고블린도 제 말 하면 온다. 꼭 자기 이야기 하는 줄 알고 오는 귀족은 못 되는 사람.
리에르는 자신의 가슴에 부딪히고 아파하는 유이를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식으로 이 몸에게 안기고 싶었냐?”
리에르의 말에 유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빨리도 지고 오셨네?”
유이의 말에 리에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이는 깜찍한 외모와는 달리 중년 아저씨 같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건들거리기 시작했다.
“누구 덕에 대회 상금도 못 타고 나랑 오빠는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나.”
“뭐, 이 몸이 항상 이기리란 법은 없는 거잖아.”
리에르는 팔짱을 낀 채로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어색한 그의 모습을 보자니 유이는 이제 확신만 남았다.
상금은 잃었지만,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노예 한 명이 생긴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유이는 한쪽 손을 허리에 얹고 손가락질하면서 꾸짖었다.
“원숭이답게 잘못했다고 땅에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누가 야생원숭이 아니랄까 봐, 제대로 사육을 해줘야 인간의 예법을 익혀주려나?”
“아, 내가 컨디션만 좋았어도 이길 수 있었는데……. 그래, 졌으니 뭐든지 다 하마.”
리에르는 웬일로 순순하게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봤자 머리 하나 이상 키가 작은 유이를 내려다보는 격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늘 페이서스 광장 분수대 앞에서 20바퀴 돌고 멍, 하고 짖은 뒤에 나는 로사리오 가의 가축 원숭이입니다. 하고 열 번 외쳐.”
“아아악! 그렇게 창피한 일을 해야 한다니! 다른 것은 시켜줄 수 없는 거야? 너무하잖아, 그래도 친오빠의 친한 친구인데…….”
리에르는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안으며 치욕적인 일은 참아달라는 듯이 절규를 해 보였다.
완벽하게 기가 죽은 리에르를 보면서 유이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허공에 빙빙, 돌려 보였다.
“우리 오빠가 부상까지 당하면서 어렵게 싸운 건데. 원숭이 네가 망쳤잖아?”
“아, 그래도……. 너도 졌잖아?”
“그런 어른이랑 소녀의 시합에 졌다고 표현하던가?”
“아아, 만약에 내가 그런 강적과 싸워서 이겼다면 지금의 상황이 역전이 되었을 텐데. 아아…….”
리에르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운명에 빠진 주인공처럼 비탄에 잠겼다.
유이는 새침한 표정으로 아주 좋은 건수가 생겼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후후, 원숭이 주제에 중요한 시합에서 이겼다면 내가 할 말이 없었겠지.”
유이는 생김은 가녀리고 순수해 보이는 소녀였지만 심술은 퇴물 아저씨와도 같았다.
하지만 리에르의 두 눈빛은 방금과는 다르게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리에르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유이뿐이었다.
유트는 유이에게 그만하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겼냐?”
“응?”
유이는 유트를 올려보다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리에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좌절하던 표정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유이의 안색은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 * *
“영애.”
“엘빈.”
제이미가 힘없이 엘빈을 올려다보았다.
엘빈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상황을 보지 않았어도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있었다.
엘빈은 충격으로 떨리고 있는 제이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당신은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이지요. 당신께선 지는 법도 알아야 성장하는 법도 알게 되는 겁니다.”
엘빈의 말에 제이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지만……. 아저씨와 파에트 님의 검법이 져버렸어……. 나 때문에.”
제이미는 아르빈트 검법으로 패배한 것이 큰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보다 몇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존재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정신적 타격이 컸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 어떤 달콤한 말로도 위로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엘빈은 그녀를 부축하여 자리를 피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하지만 엘빈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경기를 보지 못한 그로서는 그녀가 과연 어떻게 졌는지 궁금해졌다.
제이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 유격기사들과 대련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동갑내기 중에 그녀를 이길 만한 사람은 절대로 많지 않았다.
엘빈은 제이미의 검이 잘려 나간 흔적을 보면서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아르빈트 가문이 엄청난 괴물을 꼭꼭 숨겨놓고 있었군.”
* * *
페이서스 대광장에는 물을 다스리는 여신상 페오네가 서 있었다.
마나의 흐름으로 제어되는 분수대는 이곳을 약속의 장소, 그리고 만남의 장소로 만들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에 호숫가 주변에는 노점상도 많았으며 그걸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다.
노점상들은 이제 내일이면 축제도 끝이 나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매물을 떨이 치고 있었다.
예쁘고 화려한 장신구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려는 서민 커플, 달콤한 과자를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려고 일부러 이 길을 지나쳐가는 꼬마.
다양한 사람들이 분수대를 지나고 있었다.
은회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페오네 분수대 앞에서 코끼리 코를 하고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기분 좋게 팔짱을 끼고서 거만하게 웃었다.
이윽고 제자리 돌기를 끝낸 소녀는 어질어질한지 옆걸음질하였다.
하지만 오기를 내어 소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치켜올려 보였다.
이윽고 그녀의 조그만 입술에서 정중하고도 조용하게 울리는 한마디.
“멍.”
소녀는 수많은 구경꾼 때문에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다.
덕분에 소녀의 도도해 보이는 앳된 얼굴은 홍당무처럼 시뻘게져 있었다.
스스로의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당한 표정을 지어 올렸다.
소녀의 재롱을 지켜본 검은 머리칼의 소년, 리에르는 짝짝 소리 내어 손뼉을 치며 킥킥거렸다.
은회색 머리칼의 소년, 유트마저도 입가를 살짝 가리고서 쿡쿡, 하는 웃음을 지어 올렸다.
“자, 됐지?”
불쌍하게도 유이의 큰 눈망울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눈물이 맺혀졌다.
리에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유이에게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어 보였다.
“자, 손.”
“……적당히 하시지?”
“어허, 아르빈트 오라버니의 가축입니다. 이 소리는 대신 빼주었잖아?”
유이는 으으, 하는 신음 소릴 내어 보이더니 어쩔 수 없이 귀를 축 늘어뜨린 채, 손을 내밀어 보였다.
마치 강아지가 앞발을 주인에게 내어주듯 한 광경이다.
리에르는 한껏 기고만장해져서 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고개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두고 보자 지금 이 순간만 우쭐거리고 있어라.”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유이는 속으로 뇌까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나 먼저 갈게, 오빠.”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유이의 뒷모습은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리에르도 리에르지만 자신의 친오빠인 유트는 뭐가 좋다고 웃기만 하는지 불만스러웠다.
유이로서는 유트의 속을 알 리가 없었다.
항상 으르렁거리지만, 스스럼없이 장난을 걸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리에르가 유일한 존재였다.
페이서스 카에르 내에서도 유이는 클래스 친구들과 친한 사람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변에서 다가서도 유이 쪽에서 거부하고 있다.
* * *
“악마의 자식!”
사람들의 이유 없는 돌팔매질. 그것을 당하며 유트는 자신의 조그만 몸으로 유이를 안아 보호했다.
유트 남매는 아픔만이 가득한 고향을 떠나 페이서스에까지 흘러들어 왔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살아야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유트, 그리고 유이.
그 밖에 타인이라는 존재뿐. 서로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둘밖에 없었다.
페이서스에서도 평안하지 못했다.
남들과는 다른 은회색 머리카락, 그리고 적색의 눈빛.
이야기 속에서 들려오던 저주받은 마족과 일치한다. 남매의 이목구비를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비록 거지처럼 허름한 차림이라곤 하나 두 사람 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불길함을 상징하는 은회색 머리카락에 가려져 기피의 대상으로 취급받았다.
항상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남매는 타인에게 무관심했지만, 그 무관심을 받는 타인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 여동생을 지키는 것은 부모가 없는 유트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동네의 짓궂은 녀석들 여럿이서 덤벼들었다.
말이 싸움이지 열댓 명이 유트를 둘러싸고 밟는 것이 전부였다.
일대일로 덤비다 유트에게 늘씬하게 두드려 맞자, 맞은 녀석은 한 명씩 친구들을 불러 모아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젠 열 명이 되어버린 상대에 유트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는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다였다.
“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희 딴 마을에서도 도망 온 거라며?”
아이들은 순수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말한다.
“니들 마족이라면서? 부모도 잡아먹었다며?”
아이들은 순수하기에 어른의 유치한 부분을 잘도 배운다.
이런 말에 하나하나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치고는 묘하게 덩치가 큰 녀석이 유이의 가녀린 팔을 낚아채면서 소리쳤다.
“야, 얘도 기분 나쁜 은색 머리통이다.”
“우엑. 토할 것 같아!”
유이가 붙들리자 유트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자신을 밟고서 못 일어나게 하고 있던 녀석들을 밀치고서 일어서는 순간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유이를 붙잡고 있던 덩치 큰 아이가 나자빠져 있었다.
지저분한 검은 머리칼, 코에 상처가 난 꼬마는 허리를 활처럼 휘면서 웃어젖혔다.
“얼마 전엔 잘도 이 리에르 님에게 덤볐겠다!”
리에르의 발길질에 넘어졌던 덩치 큰 아이는 운 나쁘게 콧잔등이 깨졌는지 코피를 줄줄 흘리며 울어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