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45)
레필리아 레소드-346화(345/398)
레필리아 레소드 346화
어둠 속으로(8)
짧은 머리카락의 남성은 황금빛 롱소드를 들어 레이루나에게 계속 찔러 넣었다.
사내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레이루나의 몸이 들썩거리면서 핏물을 뽑아냈다.
마치 스포이드와도 같았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레이루나는 축 늘어졌다. 그의 힘없는 시야 안으로 세 명의 포스가 유이 페브리안에게 다가가는 것을 느꼈다.
유이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녀에게는 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니, 해야 할 것이 많았다.
“오랜만이군그래, 유이 페브리안.”
유이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가 자신을 부르자 흠칫했다. 갑자기 유이는 자신을 부른 남성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당신 누구야…….”
“큽…….”
남성은 유이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서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그는 베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억지로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 그때 그 꼬마가 이렇게 자릴지는 예상 못 했는데 말이야.”
“뭐?”
유이는 상대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유트 녀석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궁금하군, 그래.”
유이는 자신의 오빠 이름이 나오자 불안함이 고조되었다.
“무엇보다 리에르 놈의 절규가 듣고 싶구나.”
남성은 그렇게 말하며 비열하게 웃어 보였다.
유이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낯익게 들려졌다.
야비한 목소리와 가식적인 온화함을 품은 듯한 말투. 그 말투는 분명 기억의 일면 속에 담겨 있었다.
‘티미 아크우드!’
유이는 그 목소리와 교차하는 인물을 떠올렸다.
* * *
리에르는 불길함이 가슴을 두들기자 참지 못하고 칠흑의 깃털을 피워 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아르카의 도신을 풀지 않고서 마력을 운용한다.
순식간에 빛의 날개를 타고서 막사에 도착해서 보인 것은 죽음의 냄새들이었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이는 기분이 들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이 찾아들었다.
“유이…….”
리에르는 유이의 치료를 위해 엘에게 맡겨놓았었다. 엘이라면 웬만한 인물로는 생채기 하나 입힐 수 없었다.
하지만 막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전부 죽어 있었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리에르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엘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유이는 테헤라자드에게 노려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조건들이 하나하나 부합되기 시작했다.
걸어갔다.
막사 앞에 다다랐다.
리에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의 걱정을 전부 헛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움직여야만 했다.
바보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을 비난하고, 비아냥하기 위해서는 안을 확인해야만 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막사는 이미 폐허와도 같았다.
끝도 없이, 물밀 듯이 밀려드는 불안함을 달랠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눈으로 현실을 목도하고, 무사한 모습을 확인해야만 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지독한 피 냄새가 흘러넘쳤다.
주인을 잃어버린 손목과 발목이 피에 절인 고기처럼 사방을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고기는 이미 내장을 꽃처럼 피워내고 드리누웠다. 막사는 찢어지고, 가재는 부서졌다.
리에르는 천천히 한 발, 한 발 걸어나갔다.
곧 그의 시야 안으로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였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양손 검을 주무기로 하고 스스로 빙제라 칭하던 호쾌한 남성이었다.
“……늦……었군.”
“…….”
레이루나는 흐릿한 눈동자를 들어 리에르를 올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누운 상태였다.
“어떻게 된 거냐? 유이는?”
“쿨럭…….”
레이루나는 몸을 가눌 힘조차 없는지 벽에 등을 기대어 있었다. 그의 복부는 짐승에게 물어뜯긴 듯이 찢겨 있었다.
오른팔은 마치 걸레처럼 비틀려서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리에르는 레이루나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포스를 발휘하지 않고는 손쉽게 제압할 수 없던 상대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엉망으로 당했다는 것은 믿기 힘들었다.
아니, 유이의 호위기사인 그가 이런 식으로 죽어간다는 것은 불길함을 가중했다.
“난…….”
레이루나는 흐릿한 눈동자가 감기자 억지로 힘을 주었다. 덕분에 입가에서 연신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리에르가 사색이 된 얼굴을 보니 레이루나는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내 진명(陳名)은…… 가브리……엘이다.”
레이루나의 말에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크……. 그런…… 괜……찮은……. 여자를…… 여태……. 흐읍, 처……녀로 썩혀두었더군…….”
레이루나는 피와 말을 같이 토해냈다.
그는 리에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이 입가에 웃음을 걸어 넣었다.
푹!
“크흡!”
레이루나는 자신의 어깨에 깊이 베어 들어온 칼날 때문에 고통을 내뱉었다. 이미 전신에 힘이 사라지고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도 고통이 느껴진다는 것은 신선하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유이 어딨어.”
이미 리에르의 눈동자는 포식자로 바뀌어 있었다. 레이루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단 하나의 온기도 품지 않았다.
“넌……. 강하다.”
리에르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유사신 이상의 힘을 갖고 있었다.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만……하다.”
레이루나는 이제 입술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네놈의…… 오만이…… 만들어낸 일이…… 내 등 뒤에 있다…….”
레이루나는 왠지 웃음이 베어져 나왔다.
리에르는 레이루나의 어깨에 박아넣었던 아르카를 뽑아들고서 안쪽으로 걸어나갔다.
리에르는 안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전투에 나서기 전에 유이를 눕혔던 곳.
* * *
“가는 거야?”
유이가 묻는다. 리에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유이가 다시 슬픔에 잠겼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가 안타까운 듯이.
“바보 원숭아.”
유이가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유이는 결심한 듯이 말한다.
“나 유이 페브리안은 리에르 아르빈트를 사랑합니다.”
아직은 빛을 찾지 못한 눈동자지만 똑바로 바라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나 소중한 사람을.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야.”
유이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네가 필요한 사람은 많아 리엘.”
유이가 미소를 머금는다.
“특히 나는 그래.”
“나는…….”
리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미 죽었어.”
유이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리에르는 피하지 않았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다. 이미 생명이 식어버린 몸을 덮이려는 듯이. 온기를 나눠주려는 듯이.
짧은 키스를 마친 유이의 입술이 다시 멀어졌다.
“죽지 마.”
유이의 눈동자가 눈물로 일렁거렸다. 부드러운 뺨에 눈물이 적셔지는 것이 보였다.
“죽지 마.”
“이미 난…….”
겨우겨우 억지로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죽지 마!”
“…….”
아름다운 은발의 여성.
빛을 잃은 눈동자로도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봤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괴로웠다. 슬펐다.
“키스 더럽게 못해…….”
유이의 펀치가 복부에 날아들었다.
리에르는 쿨럭거리는 기침을 토해냈다. 아팠다. 여러 가지로.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 * *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유이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파리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었다.
아직 완치되지 못했는지 지그시 감아 내린 눈은 반응이 없었다.
리에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걸어나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유이.”
그녀는 눈을 감고 대답하지 않았다.
“유이야.”
리에르는 그녀가 듣지 못해 대답하지 못한 것 같아 다시 한번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대에 놓인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깨끗하게 잘린 단면으로 끈적거리는 핏물들이 허공에 부유하듯 떨어졌다.
침대 시트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때 유이의 몸이었던 고기 조각은 팔과 다리가 서로 바뀌어 있었다.
리에르는 유이의 머리통을 꼭 끌어안으며 입가를 열어 보였다.
“대답해…….”
한때 그녀를 상징하던 아름다운 은발 머리카락은 빛을 잃어 잿빛으로 물들었다.
“유이 페브리안…….”
온기를 품지 않은 그녀의 갸름한 뺨 위로 리에르의 눈물이 떨어졌다.
“죽지 말라며…….”
리에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꼭 끌어안은 유이의 머리통을 놓지 않았다.
“하하…….”
웃었다.
* * *
처음엔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믿어지지 않았기에.
한참 뒤에야 현실을 알았다.
그제서야 물밀 듯이 슬픔이 밀려들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들과 비할 바 없는 괴로움이 몸 전신을 찢어간다.
유이의 아름다웠던 얼굴은 리에르의 눈물과 콧물로 적셔졌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리에르는 흐느꼈다.
눈물로 인해 주변의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습니다와 같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리에르는 오열했다.
리에르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레이루나는 리에르가 흐느끼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아 내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식의 죽음이 찾아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누구냐.”
레이루나는 천천히 죽음을 기다리다 눈을 떠 보였다. 눈꺼풀이 시계추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희미한 레이루나의 시야 안으로 보이는 것은 유이의 머리통을 안고 있는 리에르였다.
리에르는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소중하던 아이가 기하학적으로 찢겨 죽어 있는데 제정신이라면 이상한 일이었다.
“테헤라…….”
레이루나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목에 난 구멍으로 말이 새어나갔다. 그렇기에 최대한 한 마디 한 마디 집중해서 내뱉으려 했다.
“새로운…….”
말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레이루나는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포…….”
새로운 포스들이 등장했다. 셋이었지만, 셋이 아닐 수도 있었다.
리에르는 그대로 아르카를 내려쳤다.
레이루나의 목에 검은 선호가 그려졌다.
핏물이 허공에 빗살을 그리듯이 퍼져 나갔다.
테헤라자드의 수호신장이었던 레이루나는 영생의 삶 속에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리에르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유이의 머리통도 마찬가지였다.
쿨럭.
리에르는 입가에서 핏물을 토해냈다.
죽음을 세는 각혈이 시작되었다.
정신이 멀어졌다. 그대로 혼미해진 채로 쓰러질 것 같았다.
‘아직은……!’
리에르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떨리는 손이 느리게 안주머니를 뒤졌다.
입가에 궐련을 물었다. 불을 피우자 메케한 연기가 입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항상 유트의 뒤에 숨어 살다시피 하던 소녀. 유일하게 리에르에게 마음을 열은 남매.
온갖 심술 맞는 말을 하고, 서로 투닥거리며 자라온 세월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좋아했다.
겉으론 까칠하게 굴었지만, 속은 누구보다 여렸던 소녀를.
사랑했다.
항상 빛처럼 자신의 곁에서 어둠을 몰아주던 소녀의 존재를.
미안했다.
항상 한결같은 소녀의 연심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리에르는 도신에 묻은 핏방울을 허공에 털어내며 냉랭한 눈동자로 천천히 입가를 틀어 올렸다.
“결국엔 할 수밖에 없어.”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