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46)
레필리아 레소드-347화(346/398)
레필리아 레소드 347화
어둠 속으로(9)
어차피 계획대로만 진행되고, 계획대로만 완료된다면 모든 잘못된 것들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정상이 모든 이가 이해 가능한 정상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리에르는 이제는 나무토막처럼 차가워진 유이의 머리통을 침대에 올려두었다.
더는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어차피 유이는 다시 되살리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리에르는 끊임없이 밀려들든 슬픔이 멎어지는 것을 느꼈다.
볼을 적시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궐련을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유이가 아니었다.
유이가 저렇게 차가운 고깃덩어리일 리가 없었다.
리에르는 아르카의 소환을 해제하면서 천천히 막사를 벗어났다.
지금 당장 급선무는 계획에 필요한 엘 파실드의 행방을 쫓는 일이었다.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예전 일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설원에서 유트 남매를 재회해서 ‘함께’라는 이름의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상한 마을, 그리고 그 마을에게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던 광전사가 떠올랐다.
신념 하나에 목을 달고서, 아르카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던 광전사는 이미 시체였다.
리에르는 광전사의 운명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었다.
불현듯 그 광전사가 떠올랐다.
유이가 죽었는데, 그 사랑스러운 아이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는데도 금방 냉정해지고 있는 자신이 괴물과도 같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아르카의 빈정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때의 광전사처럼 자신도 죽어 있을지도 몰랐다. 의지는 갖고 있지만, 투지는 없었다. 육체는 있지만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멈출 거라면 시작도 안 했어.”
리에르는 웃기 시작했다. 더는 흉내 내는 눈물도 맺혀지지 않았다.
한낮에 벌어진 비극. 폭룡 네버 에이지를 잠재운 역사적인 승리의 날에 연합군은 기뻐했다.
하지만 곧 전해진 페브리안 공주의 죽음에 페리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침묵하게 되었다.
유이 페브리안의 잔혹한 사체를 보고 페리안뿐이 아닌, 다른 연합군 사령부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페리안의 꽃, 대륙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설원의 공주는 팔, 다리를 전부 찢겨 있었다.
찢긴 팔, 다리는 서로 위치가 바뀐 채로 꿰매져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충격적인 능욕이었다.
아름다운 페리안의 공주를 기억하는 이는 누구나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특히 페리안, 특히 유이 페브리안에게 궁술을 사사했던 아로운 킴은 당장에라도 범인을 찢어 죽일 것처럼 노발대발하고 있었다.
“마왕의 짓입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유이 페브리안의 사체를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마왕이 공주와 만났습니다!”
“마왕이 공주를 납치하는 것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오!”
한 둘이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군영에서, 그것도 유이처럼 뛰어난 미인은 타인의 시선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마왕의 막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받은 이도 한 둘이 아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유이의 몸이 안 좋을 때, 리에르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안아서 달리던 장면은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단지 지금 더 중요한 전쟁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공론화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정말이냐, 리에르 아르빈트?”
롤웬이라는 이름을 가진 페리안의 기사가 리에르에게 질문했다.
리에르는 팔짱을 낀 상태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미 확신을 하고서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하는가?”
“그렇군. 변명조차 없다는 것인가.”
롤웬이라는 기사는 애써 분노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이미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이 충혈되어 있었다.
“지금 아저씨가 물어볼 것이 있는데.”
한참이나 넋 놓고 유이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아로운이 입을 열었다.
대륙 오제 중 한 명이다. 그것도 무력 면에서는 로이스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 영웅이었다. 그가 목숨을 걸자면 따라 죽을 병사들이 수만은 될 터였다.
“내 애제자가 여기 누워 있는 이유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로운은 유이의 시체에서 벗어나자 입가에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유이는 담배 냄새를 아주 싫어했다.
자신이 아쉬워서 애걸복걸해서 궁술을 배우는 주제에, 스승인 아로운이 담배만 물었다 하면 유이는 짜증을 부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활을 들어 스승이 문 담배를 화살로 저격해서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실력이 늘었죠? 스승 아저씨.’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레 말하는 유이.
그런 소녀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던 아로운이었다.
그는 그렇기에 시체가 된 유이의 앞에서도 담배를 태우지 않았다. 불을 붙이지 않은 빈 담배만 물고서 아로운은 고개를 까딱였다.
“응,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아. 리에르군? 아저씨가 물어볼게. 알고 있어? 잘못 말하면 다친다고. 다치면 안 되잖아, 응?”
아로운의 말에 리에르는 차가운 눈동자를 열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에르도 몰랐다. 하지만 대략적인 유추는 하고 있었다.
이런 일에 테헤라자드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터였다.
리에르 자신에 의해서 폐기된 수호신장에 실망해서 새로운 대체품을 만들었을 터였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반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브리엘과 엘도 당할 정도로 막강한 존재라면 자신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존재에 대해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에르는 차갑게 조소했다.
그가 웃자 주변의 모두는 경직되었다.
지금은 웃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쐐에엑!
창공을 찢는듯한 파공음이 울렸다. 삽시간에 날아드는 무언가를 보고서 리에르는 반사적으로 손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주인의 손에서 칠흑의 큐브들이 한없이 생성되며 긴 흑도로 형태를 바꾸었다.
리에르는 흑도를 대각선으로 그어 내렸다. 강력한 마력이 실린 화살이 검은 섬광과 함께 베어졌다.
멋진 살기였다.
“아저씨 말에 대답 안 하는 애들은 매 맞는다는 거 엄마한테 못 배운 거냐?”
“때릴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리에르는 차갑게 냉소를 지으며 흑도를 고쳐 잡았다.
대륙 오제를 눈앞에 두고서도 만만할 수 있는 것은 천하에 리에르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아로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연합군의 영웅들에게 공격받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응, 그래.”
아로운이 웃었다.
“뭐, 그런 거지.”
리에르는 찬웃음을 유지하며 중얼거렸다.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뿐이란 것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더더욱 오해를 만들었고, 이런 행동 때문에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짜증이 났다.
누군가에게 해소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폭주한 포스로서의 삶이 그럴지도 몰랐다. 통제되지 않는 욕구는 계속해서 핏물을 들이마시도록 만들었다.
아로운의 직속 부대인 파천대는 심상치 않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활을 고쳐 잡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리에르의 직속 부대인 흑기사들은 흑창을 말아쥐고서 돌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전투는 금지하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대륙 최고의 부대가 서로 맞대결을 펼칠 상황이었다.
그때 중간에서 중재하고 나선 것은 로이스타 아르빈트였다.
리에르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였고, 아로운에게는 있어서 평생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존재였다.
“그래, 그래. 오늘은 감동스런 인류의 승리 날이니까.”
아로운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당겼던 시위를 내려놓았다.
리에르 역시 감아쥐었던 칼날을 다시 큐브로 흐트러뜨리며 코웃음을 쳐보였다.
“나 아로운 킴의 이름을 걸고 말한다, 빌어먹을 꼬맹이.”
아로운은 꽁초를 버리고 새로운 연초를 바꿔 물면서 불을 붙였다.
“다음번에 만날 때, 네놈의 심장에 살(虄)을 먹여주마. 이 아저씨가 아주 친절하고 부드럽게.”
“기대하지.”
아로운의 말에 리에르는 고개만 까딱였다.
아로운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눈빛만은 냉혹한 야수의 것이었다.
리에르는 확실히 자신의 앞에 있는 인물이 아버지와 같은 괴물 중에 하나라고 느꼈다.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흉흉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마력처럼 주변에 결계를 치는 듯 느껴졌다.
“흑기사는 전원 회군한다.”
리에르는 더는 연합군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리를 떠났다.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류를 항상 막아서던 괴물을 물리친 날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연합의 사람들은 진정한 마왕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차피 정해진 길이었다.
연합의 각 영웅은 하나같이 리에르를 쓰러뜨릴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누구보다 잘 아는 로이스타는 입을 가만히 다물고 있었다.
이제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는 로이스타의 목을 내놓아도 아들을 지킬 수가 없었다.
로이스타는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왕국을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검을 들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가정은 붕괴가 되고 있었다.
연합전쟁이 끝나고 나서 로이스타는 아렌 왕국의 대원수 자리에서 사임했다.
주변의 만류는 많았지만, 이미 로이스타는 검을 들고 싶어서 하지 않았다.
결국, 로이스타의 오랜 부관이었던 파라네츠가 후임 대장으로서 자리하게 되었다.
아렌의 십일검 기사단은 계속 유지되었다.
비록 칠번과 팔번대는 결번 부대가 되었지만 남은 아홉 부대는 교단에 복수할 기회만 엿보았다.
잠시 대륙의 전쟁은 소강상태를 보였다.
영지와 영지 간에 잦은 국지전은 있었으나, 큰 전쟁은 없는 상태였다.
그 틈을 타서 아렌 왕국의 제이미 여왕과 페리안의 유트 왕은 약혼식을 올렸다.
두 강대국이 혈연으로 손을 잡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시사하는 부분이었다.
오대강국 중 중심인 두 왕국을 시작으로 모든 왕국이 하나의 신념을 위해 뭉치게 되었다.
물론 이에 경계하는 세력과 왕국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크고 강한 신성 왕국 코스모스가 있는 이상, 불만을 제기하는 인물은 없었다.
강자와 강자가 싸워 자멸하면 이득을 보는 것은 중간 조율자들의 몫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유트 왕.”
금발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성이 입을 열었다.
가슴 언저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노출된 붉은 드레스를 걸친 여성은 어딘가 초췌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여왕.”
유트는 이전과 달리 머리카락이 많이 짧아져 있었다.
스포츠 머리카락처럼 짧아진 머리카락은 전체적으로 시원한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약혼을 한 두 왕의 만남에 연회의 하객들은 모든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륙에서 가장 관심받는 커플이었다.
두 사람만으로 능히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다.
“루카스 왕국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냈다고 들었어요.”
“잔존 몬스터 부족을 전부 구축했다고 들었습니다.”
유트와 제이미는 서로에게 말을 건네며 잔을 마주했다.
겉으로 빙긋 미소를 그렸지만, 두 사람 다 마음은 썩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통으로 리에르와 얹힌 사람들이었다.
서로에게 연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음으로써 잃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많았다.
“이제 왕국은 안정되어가네요.”
“맞아요, 우리 연합이 있기 때문이죠.”
유트와 제이미는 자신들이 하는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양 세력의 중심점인 그들이 아주 강력한 유대를 맺는다면 손쉽게 분쟁이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공통의 적이 있고, 그 적이 강력한 존재라면 유대는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네요.”
유트는 포도주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제이미에게 말했다.
그녀는 잔의 포도주를 좌, 우로 흔들며 안에 있는 액체가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빛이 포도액 알갱이를 투과하여 지나간다. 노란색이던 빛은 보랏빛으로 적셔져서 손을 물들인다.
그 색의 변화와 역할은 자신과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거 알아요?”
제이미는 빙긋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어딘가 처연한 슬픔이 담긴 웃음이었다.
“우리는 꽤 닮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