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48)
레필리아 레소드-349화(348/398)
레필리아 레소드 349화
아주 잠시간의 평화(2)
소년은 암살자로서 교육받았다. 지긋지긋하게 읽고 받은 교육들은 이미 머릿속에 각인처럼 남아 있었다.
타겟을 암살하기 위해서, 적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적의 사정을 잘 알아야만 했다.
“서로의 이권을 위해 시작된 전쟁. 서민의 고름을 짜내기 위해 시작된 전쟁은 장기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 하리엘 리 크샨타는 더 큰 이득을 원했다. 그는 종이로 만들어진 계약을 무시한 채로 욕심을 부렸다. 이 전쟁은 크샨타의 3만 대군이 기습함으로써 로빈타는 큰 위기를 맞았다. 그들의 약탈은 지독했고, 살육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강철의 대공 이실렌.”
강철의 대공은 처음부터 왕의 계획에 반대했다. 하지만 왕은 이실렌을 처분할 수 없었다.
그를 처분하기에는 그의 인망과 명예가 드높았다. 그가 없었다면 로빈타도 없었고, 시골 청년 마이어 론 로빈타도 왕이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왕은 강철을 사랑했다. 단 하나의 친구였기 때문에.
소년은 강철의 대공이 가진 위대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사람을 우선시하는 그의 강직함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나락에 빠뜨리고, 패퇴시킨 것도 자신이었다.
“국민의 지옥 불덩이에서 손을 들어 강철의 영웅을 찾았다. 이에 결국 강철의 대공은 1만의 대군을 일으켜 국경을 지키러 나갔다. 중무장한 강철의 기병대는 순백으로 칠한 갑주가 핏빛으로 물들기를 거절치 않았다. 평원에서 벌어진 기병 전투. 약 이십여 회나 벌어진 기병 랜스 차지(Lance Charge)로 인해 크샨타는 크게 사기를 잃고 후퇴했다. 강철이 이를 뒤쫓으니 크샨타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의외로 막힘없이 말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중년 선생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로의 배를 불리기 위해 종이로만 이루어졌던 전쟁이 있은 지 2년 뒤. 2차 종이 전쟁이 발발한다. 여기에 강철의 대공 이실렌 폰 페를네아브는 무적의 중기병을 이끌고서 크샨타의 수도 함벨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에 백여 년간 벌어졌던 로빈타와 크샨타의 전쟁은 종막을 맞이했다.”
로빈타와 크샨타는 아렌의 인근 왕국이었다.
아레스트 영지는 왕국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여타 왕국보다 강력한 군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었다.
“좀 더 자도록.”
중년 선생은 그렇게 말하더니 수업을 이어갔다. 아이들의 놀란 얼굴도 곧 칠판을 향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제법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어린 시절 형과 아버지처럼 강한 검사가 되고 싶어서 숱하게 휘둘렀던 검이었다.
하지만 전혀 늘지 않는 실력을 보고 몇 번이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살아왔었다.
‘난 검술을 하는 것이 아니야.’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검술을 연마한다.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진지하게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많이 휘둘렀다. 누구보다 노력했다.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봉인되었던 힘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아까 잘난 척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지.”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소년은 거의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와서 도전적인 한마디를 내뱉고 자리를 떴다.
보통 아이들보다 위로, 옆으로 비대한 덩치는 마치 오크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쿠레드였던가.”
소년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검술 대회에서 만나서 처음으로 승리의 기쁨을 알려주었던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는 누가 약자인지 명확한 존재였다.
어린 소년들에게 근력이 있어 봤자였다. 여자나 남자나 크게 다른 바 없는 근력이다. 하지만 쿠레드는 성인 남성 못지않은 덩치와 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연히 아무리 검술로 기교를 부려도, 막강한 무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말 그대로 폭군이나 다른 바 없는 존재였다.
덕분에 소년도 짝사랑하던 상대 앞에서 쿠레드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소년은 예전을 떠올리면서 불쾌해하지 않았다. 언제나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기억이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이 오히려 새롭고 행복했던 기억이 찾아들었다.
“오늘은 도망가지 말라고.”
쿠레드의 패거리는 일부러 소년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비아냥거렸다.
반의 아이들이 전부 가검을 들고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책상에 걸려 있는 가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위기를 보았을 때는 검술 훈련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카에르나, 카이샤는 어디까지나 실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곳이다 보니 문보단 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체력 단련시간은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가검을 짚어보았다. 낡은 손잡이의 촉감이 익숙했다. 마치 손에 맞춰서 만들어진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나.”
소년은 빙긋 웃어 보였다. 하루에도 수없이 휘둘렀던 검이니 손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가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당시에는 유트와 한 반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은발의 귀공자. 자신과는 너무나 다르게 빛나는 존재였던 친구. 서로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은 카에르에서 가십거리로 사용되기도 했다.
유트 페브리안.
고귀한 북 늑대의 왕족. 그런 사실도 전혀 말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배신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실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앓게 한 것이 미안했다.
유트는 항상 빛이었다.
자신은 어두운 공간 속에 갇혀 있어도, 항상 사랑하는 친우는 빛이 되어 지표 점이 되어주었다.
그는 왕이었다. 그는 태양이었다.
은발의 귀공자는 많은 빛의 사자들을 이끌고서 정의를 위한 진군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은 자신이었다.
칠흑과 같은 어둠을 등 뒤로 거느리고서 군을 이끄는 자신은 말 그대로 악이나 다른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한때는 둘도 없던 친구가 이제는 서로 적이 되어 전장에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희극이나 다른 바 없었다.
소년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남지 않은 교실 문을 나서서 복도를 걷는다.
누군가의 가십거리가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조롱하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소년은 그런 괴롭힘 어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딱!
탁!
경쾌한 울림이 들려왔다. 혈기왕성한 아이들은 수업시간이 시작도 안 했는데 먼저 대무를 하는 예도 있었다. 그리고 으레 그 상대는 그 녀석일 터였다.
“야, 원숭이. 오늘도 나 신검의 쿠레드가 한 수 가르침을 주마!”
쿠레드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에 아이들이 웃었다. 입 주변에 두툼하게 자리 잡은 살들이 말할 때마다 분주하게 진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웃는 것이리라.
“웃어?”
쿠레드의 비아냥거리던 입가가 굳어졌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쿠레드는 살기등등하게 소년에게 걸어왔다.
아이들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반에서 가장 강한 쿠레드와 반에서 가장 약한 소년이 맞붙으면 대형사고가 짐작될 수밖에 없었다.
“자자, 사양 말고 들어와.”
쿠레드는 의외로 웃으면서 양팔을 벌려 보였다. 뒤뚱뒤뚱 걸으면서 흔들리는 뱃살은 그만의 어드밴티지였다.
“아, 아직은 보호자가 안 와서 시작을 못 하려나?”
쿠레드는 능청스럽게 뒤로 돌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익살맞은 몸짓에 아이들은 폭소하고 있었다.
“우리 불멸의 리에르는 여자 치마폭에 없으면 불안하다네. 우리 무적의 리에르는 은발 머리 애인이 없으면 용기가 나지 않는다네.”
쿠레드는 운율도 맞지 않으면서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했다.
소년은 딱히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에 자신이 지켜줬던 에레사. 카에르에 다닐 때는 그 관계와 완전히 반대되어버렸다.
모든 이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름다운 소녀는 소년을 극진히 보호하려 했다.
그녀가 연상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미덥지 않은 소꿉친구가 다치지 않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유트도 친구가 불합리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모든 것을 차단하려 했다. 실제 그들이 없었다면 소년은 더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소년은 누구에게나 미움받았다.
소년은 약했다. 약자에게는 여러 가지의 역할을 준다. 패자에게는 패자로서의 룰과 자세가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오히려 고자세를 취했다. 그런 자세가 오히려 포식자들을 자극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아울러 성적 좋고, 강하고, 잘생긴 유트는 학년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그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남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복수 상대는 절친한 친구인 소년이었다.
또한, 학교의 마돈나인 에레사와 항상 같이 다니는 것 또한 질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난 쿠레드가 이긴다는 것에 식권 열 장!”
“농담하지 마. 애초에 내기가 안 된다고?”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내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야만스럽다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누구 하나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쿠레드는 반의 지배자였기에 무섭기도 했지만, 소년이 어찌 되든 그들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30초 안에 쓰러진다는 것에 식권 두 장!”
“어, 그건 내기가 되겠는데?”
“난 10초에 식권 다섯 장!”
갑자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의 내기에 즐거워하며 열이 달아 올라있었다.
쿠레드는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콧김을 몇 번 뿜어 보였다.
그리고는 반 여자아이들에게 보란 듯이 어깨를 들어 보였다.
“이봐, 구경꾼들이 기다리잖아? 오늘은 왜 말이 없고 조용한 거야? 이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한 거야? 지혜로운 거야, 뭐야?”
쿠레드는 연신 볼살을 흔들면서 리에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쿠레드는 잔뜩 기가 살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이미 대련장에는 다른 클래스 애들도 있었다.
쿠레드는 정확히 기억했다. 그 클래스는 유트가 소속된 클래스였다.
그 말인즉슨 곧 소년의 절친한 친구인 유트가 온다는 말이었다.
그가 오면 이런 유흥 따위는 순식간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진짜 강자에게는 꼼짝도 못 한다는 조롱을 당할지도 몰랐다.
“설마 겁먹은 거 아니지?”
쿠레드는 그렇게 물었다.
소년은 걱정해 주는 쿠레드에게 천천히 입을 열어 보였다.
“돌진할 상대를 잘못 골랐어, 멧돼지.”
“…….”
리에르의 말에 아이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른 클래스도 지금 분위기가 삭막해진 것을 알고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쿠레드의 집은 가난했다. 하지만 힘이 좋고 체격이 좋은 쿠레드를 기사로 만들기 위한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다.
없는 살림에도 아들이 성공하기 위해 카에르에 입학시켰다.
그런 쿠레드의 입장에서는 행복이란 모든 행복을 소유한 소년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애초에 입학했을 때부터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이 들어왔다고 모든 이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쓰레기였다.
쿠레드는 그런 쓰레기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 잘못했어, 졌어와 같은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소년은 지독했다.
“아니, 오크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