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49)
레필리아 레소드-350화(349/398)
레필리아 레소드 350화
아주 잠시간의 평화(3)
소년의 말에 쿠레드는 그대로 이성을 잃었다.
쿠레드는 가검을 뽑지 않고서 그대로 양손을 들어 소년을 잡아 던지려 했다.
아직 대련용 방어구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가검으로 때리면 죽을 수도 있었다.
쿠레드는 소년을 늘씬하게 두들겨 패줄 생각으로 덮치고 들었다.
하지만 소년은 가볍게 옆으로 반회전하며 회피했다.
모두는 의외에 상황에 잠시 의아해했다.
쿠레드의 첫 번째 공격에 나자빠져야 할 소년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여유롭게 반걸음으로 공격을 피한 뒤에 손을 까딱거렸다.
“돌진해 봐.”
쿠레드는 오오오, 포효를 지르며 소년을 덮쳤다.
소년은 다시 옆으로 반걸음 회피하며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살짝 다리를 걸어 보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무식하게 힘으로 돌진하던 쿠레드는 목표를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년이 발을 건 것도 모르고 나자빠졌다.
쾅!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쿠레드를 보면서 아이들은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당장에라도 쿠레드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었기에 참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나 이상했다.
매일 쿠레드에게 샌드백 신세였던 소년은 더 이상 맞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마하니 레이디처럼 손을 건네야만 일어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이 새끼!”
쿠레드는 소년의 빈정거림에 벌떡 일어나서 가검을 집어 들었다.
분노로 완전 눈이 뒤집힌 쿠레드를 보고서 아이들은 큰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큰 사고가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아이들은 차라리 선생님이 얼른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아아아!”
쿠레드는 그대로 가검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고 달려들었다.
쿵쾅쿵쾅. 육중한 돌진에 아이들은 겁을 먹었지만, 소년은 여유롭기만 했다.
아니, 너무 느리게 달려오는 것 때문에 슬로우 비디오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소년은 엄청난 강자들과 숱한 전투 경험을 쌓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본능적인 생각은 잠시 거둬들였다.
소년은 바닥에 떨어진 검의 손잡이를 발바닥으로 내려쳤다.
모서리에 힘이 가해지자 검은 제자리에서 튕기듯이 올라왔다. 튕겨진 검은 마치 혼자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검 손잡이를 툭, 쳐 보였다.
가검은 그대로 쿠레드를 향해 날아들었다. 쿠레드는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검을 내려쳤다.
검은 튕겨 나갔다. 소년은 가볍게 발을 들어 검을 걷어찼다.
가검은 다시 쿠레드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쿠레드는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가검은 우연히도 쿠레드의 가검에 적중했다. 충격으로 쿠레드는 뒤로 넘어졌다.
소년은 튕겨 나온 검을 가볍게 말아 잡고서 쿠레드에게 거침없이 걸어갔다.
황당한 쿠레드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년을 올려보았다.
소년은 소리 없이 웃으며 가검의 면으로 쿠레드의 뺨을 갈겼다.
짝!
아이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경직되었다.
볼을 맞아 한쪽 볼이 붉어진 쿠레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짝!
이번엔 왼쪽 볼에서 소리가 났다.
양 볼이 시뻘게진 쿠레드는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입술을 찡그렸다.
“흐어……. 으엉……!”
쿠레드는 덩치에 맞지도 않게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반에서 폭군으로 있던 쿠레드가 울음을 터트리자 전부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검술 수업을 담당하는 교관은 황당한 상황을 보고 어리둥절해지고 있었다.
“다들 정리 안 해? 넌 또 왜 누워서 질질 짜고 있어?”
교관은 수업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보고 짜증을 부렸다. 아이들은 그제야 수업 준비를 위해 바지런히 움직였다.
소년은 가검을 땅에 버리고서 수련실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소년의 클래스도, 다른 클래스 아이들도 분위기가 달라진 친구를 바라보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란 것을 느꼈다.
소년은 뒤에서 교관이 어디 가느냐고 혼쭐내는 말을 무시한 채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여긴 과거에 있던 기억이었다. 즉 지금은 필요 없는 기억에 불과했다.
소년은 다시 걸었다. 수련장 바깥을 나서자 유이 페브리안이 보였다.
남자아이나 다른 바 없는 짧은 커트 머리카락.
여자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꾀죄죄한 모습. 더럽게 사나운 눈초리.
저런 선머슴 같던 아이가 나중에 대륙 제일의 미인으로 손꼽힌다는 사실은 믿을 사람은 없었다.
유이 페브리안.
눈초리 사나운 여자아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년은 쏘아본다.
항상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항상 으르렁거렸다.
이제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여자아이는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 까칠하게 굴었다.
이제 소년은 눈치채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시선은 항상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널 기억해.”
소년은 거침없이 유이에게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품에 안았다.
유이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저항하듯이 붉어진 얼굴로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저항하는 손길이 너무나 약했다. 사실은 싫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바라봐주었다. 하지만 소년은 언제나 그 마음에 보답하지 못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은 죽지 않아.”
유이는 천천히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소년의 품에 안았던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년, 아니, 리에르 아르빈트가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숙소였다.
예상대로 리에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꿈속에서 헤맸다.
아니, 비단 지금뿐만은 아니었다.
리에르는 꿈을 자주 꿨다. 점점 자주 꿨다.
수없이 많은 목숨을 해칠수록, 수없이 늘어지는 죄를 덮어놓을수록 어딘가의 도주로를 향해 도피했다.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머리는 항상 미열이 가득한 듯이 어지러웠다.
눈은 점점 흐릿해졌다. 충만하던 마력은 구멍 뚫린 물풍선처럼 힘을 잃어갔다.
당연한 거처럼,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체유지 System All Green.]아르카의 시스템 메시지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리에르는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물주전자를 들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빗살 세공이 들어간 나무잔에 물이 차올랐다.
리에르는 마른 입을 적시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꿈이 깨고 현실을 깨닫자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흘러내려야 했다. 당장에라도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이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하지만 의외로 감정은 메마른 듯이 건조했다.
분명 슬펐다. 슬펐기에 더더욱 냉정해야만 했다. 절망하며 쓰러지는 것은 실패했을 때 해도 늦지 않았다.
아니, 실패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리에르는 물을 몇 모금 더 적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 걸쳐놓은 제복을 걸치고 일어서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들이 인사를 올렸다.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나?”
“서부 길드 연합장 및 신규 귀화 영지의 대리인들이 찾아와 있습니다.”
“귀찮군.”
리에르는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시녀의 손길에 따라 손을 들어 올렸다.
코스모스 교단은 대륙의 강제 포교로 인해 가장 거대한 종교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힘은 왕국을 선포하는 지경이 되었다.
신성 왕국 코스모스. 그 이름으로 불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났다.
애쉬문.
기존의 낡은 관습을 버리고 새롭고 현실적인 구제를 이룩한다는 이념을 지닌 단체였다.
이 단체를 이끄는 인물은 리에르 아르빈트, 칠흑의 마왕이었다. 그가 직접 엄선한 인재들로 기사단을 이루고, 뛰어난 실력자들을 장군으로 선별했다.
갑작스러운 반란의 불꽃은 거셌다.
기존에 교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장로회는 필사적으로 새로운 세력과 교전했지만, 이미 깊게 곪아 들은 반란의 싹을 제거하지 못했다.
리에르는 내정과 정치를 아르미안에게 모두 총괄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전투에만 나서며 모든 판을 뒤엎었다.
“선지자께서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군.”
교단의 선지자. 아르미안은 모든 위정자의 왕이었다.
리에르는 굳이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정치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성향에 맞지도 않았고, 오로지 진정한 무력으로만 통치하면 그만이었다.
천년 명맥을 이어오던 코스모스 교단도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직 남은 세력들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하나, 감히 마왕의 앞에서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리에르는 입가에 마리화나 궐련을 물었다.
불빛이 잠시 반짝였다. 메케한 연기와 함께 제복 끝이 펄럭인다.
신성 왕국은 이미 리에르의 것이었다.
칠흑의 제복을 걸치고, 가시 면류관을 쓴 리에르를 막아서는 것은 없었다.
마왕을 본 이들은 전부 예를 갖추어 몸을 낮췄다.
“잘잤니?”
리에르가 알현실에 들어서자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다.
진녹색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여성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포도액이 담긴 잔을 들고서 요염한 눈동자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알현실에는 단 둘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르미안은 대담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실크로 이루어진 흰옷은 살갗이 비춰 보였다. 남자라면 누구나 눈을 유혹하는 뇌쇄적인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지극히 업무적인 질문을 던졌다.
“잔당 퇴치는?”
“장로들이 전부 죽었으니, 사실상 구 교단은 끝났어.”
아르미안은 미리 준비해둔 잔에 포도액을 따랐다. 보랏빛 빗살이 마법처럼 허공을 낙하하며 잔을 유영한다.
아르미안은 잔을 건넸다. 리에르는 잔을 받으며 한 모금 들이마셨다.
향기로운 쓴맛이 입 안을 부드럽게 적셔 들었다. 덕분에 복잡하게 엉켜있던 생각들은 어느 정도 없어지고 있었다.
“군대는?”
“아주 딱 좋아.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신진 교단 세력은 압도적인 리에르의 무력 아래 하나가 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신이나 다른 바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죽음을 불사할 성기사들이 오러를 밝혀내고 있었다.
“엘은?”
“몰라.”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코웃음을 치면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다시 한 모금 포도 액을 음미한다. 감미로운 향기가 혀끝에 감돌았다.
하지만 복잡하게 돌아가는 일은 뭔가 하나씩 틀어지고 있었다. 아니, 어차피 모든 것이 딱딱 아귀 맞게 돌아갈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없어도 계획대로 한다.”
“응,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말에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앉았다.
“몸은 어떠니?”
아르미안의 다정한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리에르는 차가운 얼굴로 포도액만 혀끝으로 굴려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그날이 될 때까진 버틸 수 있으니까.”
“난, 그런 말이 아니야.”
아르미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길이 리에르의 무릎을 감싸 안았다.
피부만 닿아도 알 수 있었다. 아르미안은 불안정한 마력 탓에 몸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