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50)
레필리아 레소드-351화(350/398)
레필리아 레소드 351화
아주 잠시간의 평화(4)
그녀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마력이 필요했다.
보통은 포스 사용자와 한 몸이 됨으로써 마력을 흡수했었다.
하지만 마왕이 된 리에르는 아르미안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른 방법으로 마력을 흡수하는 아르미안은 마력 소실이 심한 상태였다.
“슬슬 때가 되었군.”
리에르는 차갑게 조소했다.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아르미안의 얼굴이 비쳤다.
“그런데 어떡하지? 지금은 내 몸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다.”
“난 그런 말이 아니라…….”
아르미안의 눈동자가 서글프게 바뀌었다. 그런 모습을 봐도 단 한 톨의 동정도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교단에 남자들도 남아도니까 먹어치워. 그날이 올 때까지는 잘 버텨봐.”
“…….”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하지 못했다.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와 생긴 균열은 더 벌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넌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
아르미안이 촉촉한 눈가로 물었다. 리에르는 그녀의 말에 잔을 비우며 자리에 일어섰다.
아르미안은 다급하게 리에르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눈빛만큼이나 온기가 없이 차가웠다.
한때 장난꾸러기이자, 다정했던 소년의 온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온기가 너무나 소중해 보여서 독차지하고 싶었던 그녀의 욕망이 소년을 비틀었다.
아니, 애초에 시작은 리에르였다. 아리아 오트리아로서 살아갔고, 자신을 이용하고 죽여 버린 남자.
애정과 증오.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아르미안의 눈동자.
리에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실소를 머금었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르미안은 반항하지도 못했다.
아니, 그녀는 거부할 의사가 없었다.
리에르의 입술이 아르미안의 입술을 덮었다. 마치 시체와 시체가 입을 맞추듯이 무미건조하고 온기를 품지 않은 행위였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그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왔다. 오랜만의 손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삶이 충족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리에르의 입술이 아르미안의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타액을 품은 혀로 천천히 입안을 애무했다.
아르미안은 저절로 눈가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황홀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찢었다. 비릿한 핏물이 그녀의 입술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아르미안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눈썹을 찡그렸다.
리에르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훑어내렸다. 붉은 피로 적셔진 입술은 마치 립스틱을 바른 듯이 보였다.
“될 수 있다면 다리를 자주 벌렸으면 좋겠군. 그래야 많은 마력을 축적 시킬 수 있을 것 아닌가? 많은 남자에게 섭취한 마력을 나한테도 좀 빌려줬으면 좋겠어.”
“리에르 아르빈트, 넌…….”
아르미안이 이를 사리물었다. 입술이 찢긴 통증보다도, 차갑고 무미건조한 말을 듣는 것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어차피 최종 전쟁이 벌어지면 좋든 싫든 테헤라자드는 내게 모든 정신을 쏟겠지.”
지금처럼 대륙이 전국시대를 이루어 전쟁을 계속한다면 평화는 바랄 수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무언가가 전부 힘으로 제패하지 않는 이상은, 전쟁은 끝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세력이 합쳐져서 거대한 연합을 이룬다. 그리고 또 다른 연합이 만들어진다.
두 개로 나뉜 연합이 생사를 걸고 싸우면 전쟁의 형태가 매우 단순해질 것이었다.
단기적으로는 큰 희생이 발생하겠지만, 오히려 짧은 기간 내에 지옥 같은 시대를 끝마치는 것이 좋았다.
“그때 엘을 구하면 될 거다. 어차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이번 전쟁을 끝으로 대륙은 평화를 찾는다.”
3차 대륙 전쟁. 곧 벌어질 거대한 전쟁의 막을 올리면 인류가 농락당하는 불합리함을 깨뜨릴 수 있었다.
“너는 이미 한계야.”
아르미안이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리에르는 한계 상태였다.
“네 작은 분노도 감당하지 못했잖아. 네가 말하던 대의나, 네가 말하던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참아야 했어. 하지만 넌 결국 수호신장과 대적했지. 그 결과 수호신장들을 전부 제거한 것은 좋았지만, 덕분에 네 생명력만 급속도로 저하 되었잖니? 그뿐만이 아니야.”
아르미안은 하지 않으려던 말을 꺼냈다.
“수호신장을 대처할 새로운 포스들이 나타났지. 그 포스들에 의해서 네 작은 아기 새는 마음껏 유린당하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좀 더 정중하게 했으면 좋겠군.”
리에르는 어느새 아르카를 소환해서 아르미안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시커먼 검광의 날이 번뜩여도 아르미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차라리 옳은 선택을 해.”
“네 목을 날리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거야?”
리에르는 조소했다. 하지만 입만 웃고 눈은 웃지 않았다. 살기로 그득한 눈동자는 살인귀와 다를 바 없었다.
이미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정신은 피폐한 상태였다.
“이제 미뤄왔던 결단을 내려야 해.”
“아직은 널 죽이지 않겠다. 고마운 결단이라 생각된다면 이제 꺼져도 좋아.”
리에르의 독설에 아르미안은 코웃음을 쳤다.
“에레사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 결단을 내려.”
리에르의 눈가가 좁혀졌다. 안 그래도 짜증이 물밀 듯이 치솟고 있었다.
아르미안의 도발적인 말이 끊어지기 직전의 이성을 자극했다.
“어차피 그 아이는 네 애한테 잡아먹히게 되겠지.”
“네 알 바는 아니지.”
“그래, 알 바는 아니야. 하지만 그게 우리의 동아줄이라면 붙잡아야겠지.”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이를 사리물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던 사실이었다.
에레사는 현재 포스를 가진 아이를 품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모친을 생각하는지 자신의 성장을 정지시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대로 가다간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그쪽도 한계야. 에레사가 아이를 낳으면 인간인 이상 죽게 되겠지. 그렇다고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없어.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아이는 마력을 공급받지 못해서 죽게 되겠지. 아니지, 어쩌면 둘 다 죽게 될지도 몰라.”
“그래, 하지만 네가 그 사실을 깨우쳐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리에르의 분노와 조롱 섞인 말에 아르미안도 눈가를 좁혔다.
자신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 그저 육체관계라는 것은 사랑을 확인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반신인 상태였고, 관계란 생명력을 흡수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마력을 가진 이를 먹어야 했다.
“에레사의 안에 있는 포스를 흡수해.”
“뭐?”
아르미안의 말에 리에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불쾌한 농담인가 싶었지만, 아르미안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 포스를 흡수하면 넌 예전만은 못해도 많은 회복을 할 수 있어. 덩달아서 나도…….”
아르미안은 마력이 충만해진 리에르의 몸에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스스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나 치욕적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리에르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리에르가 듣기에도 아르미안의 말은 타당성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에레사와 아이, 둘 다 살릴 수 있는 길 따위는 없었다.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었고, 이쪽의 입장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죽어주는 것이 편했다.
일반인인 에레사가 죽으면 슬픔만을 얻지만, 아이가 죽으면 슬픔과 동시에 마력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그저 하이에나가 고기를 먹기 위해 군침을 흘리는 상황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리에르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된다 해도…….’
리에르의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은 컸다. 오차를 좁히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예상 밖의 일들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엘이 붙잡혀간 일과 새로운 포스들이 등장한 일이었다.
‘에레사는 살아갈 수 있어.’
테헤라자드가 아무리 미쳐서 세상을 없앤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살아 있기만 한다면 에레사는 계속 존재할 수도 있었다.
살아만 있다면 아픈 기억들을 잊을 수도 있었다. 아픈 기억을 잊는다면 누군가와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와 만난다면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다시 사랑한다면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비록 그 손을 잡는 것이 자신이 아닐지더라도.
“하.”
리에르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희극과도 같았다. 쓰레기 중의 쓰레기. 그 어떤 달콤한 말을 한다 하여도, 그런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의 말처럼 에레사를 구하고, 힘도 회복할 수 있었다.
* * *
짹짹.
아침을 여는 새의 지저귐과 함께 이제 막 비치는 맑은 햇볕. 그야말로 평화로운 아침의 정취였다.
금발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성은 천천히 눈가를 열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커튼을 열어젖히는, 있을 리 없는 누군가의 인영을 보고 눈가를 찌푸려 보였다.
이제 막 일어나서 제대로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났어?”
기분 좋은 저음의 목소리. 너무나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하지만 의외의 등장이었기에 금발 여성은 잠시간의 당혹감을 느꼈다.
“리엘?”
“응.”
칠흑의 남성은 자신의 연인이 부르는 음성을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검지를 들어 입가를 툭툭 쳐보였다.
금발의 여성, 에레사는 리에르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입 언저리를 문질렀다. 거기엔 머리카락이 입가에 들어가 있었다.
에레사는 확 얼굴이 붉어지며 머리카락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찾아온 리에르 덕분에 지금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지 떠올렸다.
자다 일어나서 머리카락은 헝클어졌고, 잠옷 상태였다.
아무리 오랜 소꿉친구라 해도, 연인이라 해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은 있는 법이었다.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야?”
에레사는 황급히 흰 이불보를 들어 얼굴을 반쯤 가리며 물었다.
리에르는 탁자에 있던 물컵에 물을 따르면서 에레사에게 건넸다.
“같이 데이트 좀 하자고.”
“데이트……?”
에레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레사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리에르를 죽음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큰 실수를 깨달았다.
그렇게 다시 힘들게 만났지만,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리에르는 곧바로 전쟁을 나가게 되었고, 에레사는 혼자 교단에 남겨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가 아닌 아르미안과 함께였다.
아르미안과는 이미 구면이었다. 에레사가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였을 때, 리에르를 살리기 위해 움직였던 여성이었다.
에레사의 입장에선 굉장히 거북한 상대였다.
하지만 아르미안도 에레사를 굉장히 불편하게 바라봤고, 굉장히 불편하게 대했다.
에레사는 굳이 아르미안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가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관계인지는 묻지 못했지만, 그녀는 리에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파트너였다. 그녀는 모든 내정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교단을 운용하는 리더였다.
그에 비하면 에레사는 그저 객에 불과한 처지였다. 불편했지만 에레사는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리에르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에레사는 이제 세상에서 혼자였다. 그녀가 알던 모든 이들은 죽었고, 오갈 곳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리에르의 곁이었다.
“시간…… 괜찮아?”
에레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리에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