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52)
레필리아 레소드-353화(352/398)
레필리아 레소드 353화
아주 잠시간의 평화(6)
상인은 리에르의 개 같은 말을 듣고 당장에라도 얼굴에 침을 뱉을 기세가 되었다.
하지만 리에르가 곧 금화 열 닢을 테이블에 놓자 태도가 바뀌었다.
“네, 나으리. 오늘은 오직 두 분만을 위해 장사하겠습니다요!”
상인은 그 말과 동시에 신명이 나서 시츠 슬라임 꼬치를 구워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으며 핀잔을 주었다.
“이제 돈 좀 있다 이거야?”
“있으면 써야지.”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에레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콧방귀를 껴 보였다.
“이런 품위 있는 행동은 네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장미의 기사 프란츠가 하던 행위인데 말이지.”
“그 느끼한 놈이 이런 것도 해?”
리에르는 자기 딴에는 낭만적인 짓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레사가 좋아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인 장미의 기사 프란츠 이야기를 꺼내자 질색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무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추천해 주고 싶은 것이 사람 심정이었다.
에레사도 마찬가지로 리에르가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더욱 권해주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읽어봐.”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
리에르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더니 잔뜩 인상을 쓰고는 입을 열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장미의 기사 프란츠 실존 인물이더라.”
“몰랐어? 그런데 너무 바빠서 프란츠 님은 멀리서 보기도 힘든 분이래.”
에레사는 상상만 해도 좋다는 듯이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개어 보였다. 맑게 일렁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동화 속 세계로 빠진 듯이 보였다.
“그놈 내 적인 거 알아?”
리에르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장미의 기사 프란츠는 리에르의 적대 세력인 동부 연합에 소속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 기사였던 그가 루나레이크의 여왕을 수호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리에르를 적대하게 되었다.
루나레이크는 마왕에게 첫 번째로 점령당한 왕국이니만큼, 그들이 교단에 가진 악의는 보통이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교단과는 반목할 수밖에 없었다.
“프란츠 님은 봐줘!”
“그놈부터 잡을 거야.”
리에르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사인이라도 받아줘!”
“너도 참…….”
리에르는 어이없어했다. 에레사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상점 주인은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았다. 돈 많은 미친놈은 고마운 법이기에.
두 사람은 원 없이 시츠 슬라임을 먹고, 포장까지 하고서야 일어섰다.
“평화롭다.”
에레사는 수도의 경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높은 전망대에서 굽어살피는 주변의 경치는, 이 도시가 한창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페이서스 복구 작업이 시작된다더라.”
“어, 정말?”
에레사는 리에르가 건네주는 차를 받으며 놀라워했다.
두 사람에게 가장 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가장 행복했던 추억들이 즐비하기도 했던 곳이었다.
페이서스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했다.
매년 찾아오는 페이서스 축제. 그 열기를 느끼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항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장사꾼들. 어린아이들이 뛰노는 시장터의 풍경에 두 사람은 향수를 느꼈다.
“그립다. 나중에 같이 가보자.”
“……그래.”
에레사는 리에르의 눈치를 살폈다.
리에르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차 컵을 한 모금 마셔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차마 지우지 못한 씁쓸함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페이서스는 리에르에게 있어서는 부담스러운 장소였다. 그렇다고 회피만 해서는 영원히 죄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약속한 거다?”
“그래.”
에레사가 미소를 그리며 말하자 리에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겸연쩍은 웃음. 그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의 우울함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맑고 상쾌한 바람. 더군다나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나 특별했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 보이던 에레사는 무언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교단의 성직자 둘이 어린 여자아이를 끌고 가고 있었다. 중앙 시장터에는 공지사항을 게시하는 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에 있는 기둥에, 한 중년 여성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밑에는 짚과 나뭇가지들이 가득했다.
에레사는 순간적으로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있었다. 아주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를 중년 여성의 앞에 세웠다. 중년 여성은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딸로 보이는 아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어린아이에게 횃불을 건넸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어미에게 불을 지필 것을 강요했다.
그래야지만 어미와 아이의 죄가 구분된다. 하지만 아이는 질겁을 하고 공포에 눈물을 흘렸다. 신에게 기도했다. 하지만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성직자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두 모녀의 울부짖음이 광장을 메웠다. 어쩔 수 없이 성직자는 아이를 어미 쪽으로 내던졌다.
“리엘,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뭐? 어째서?”
리에르는 에레사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레사의 눈동자는 격앙되었다. 자신이 사랑해 온 남자, 자신의 연인인 남자는 짓궂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황스러움을 품은 눈빛이었다.
화르르!
시뻘건 불꽃이 타올랐다.
“넌 멈출 수 있잖아!”
에레사는 얼굴이 파리해져서 소리쳤다. 하지만 리에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단의 세력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리에르였다. 말 한마디만 해도 이 모든 것을 멈출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화마의 그림자는 두 모녀를 덮쳤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리 한복판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두대형도 아닌 화형을 당하고 있었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순리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성직자들이 기도문을 읊었다. 하지만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고통의 불꽃에서 해방되고 싶은 비명만이 가득했다.
서로를 껴안은 모녀의 인영이 움직임을 멈췄다. 비명도 동시에 멈췄다.
곧 사람들의 기도도 끝이 났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활기찬 거리를 연기해 보였다.
“이게 뭐야…….”
에레사는 오늘 하루 즐거웠던 기억들이 싹 달아나 버렸다.
비참하고 끔찍하게 타죽은 두 모녀의 얼굴이 떠올라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화형식은 내가 결재해 준 거야.”
에레사는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소꿉친구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무덤덤하게 나오는 말은 예전과 달리 두려웠다.
“왜……?”
“왜라니?”
리에르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 보였다. 왜 밤에 자느냐고 물어보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물으면 오히려 즉답이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교리를 어겼잖아. 교리에 어긋난 행동을 했으면,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 죄가 뭔데?”
에레사는 힘없이 물었다.
“몰라.”
“몰라?”
에레사는 리에르가 농담하는 것인지 눈빛을 봤다. 전혀 아니었다.
“그런 일을 하나하나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그래도 무슨 일인지 관심을 표할 수는 있었잖니. 너에게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 고작 그 몇 분이 아까워서 저 사람들이 죽도록 내버려 둔 거야?”
에레사는 분노했다.
“이 일을 조사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 심판 기사들에게 내가 그 권한을 주었고, 그 권한에 대해서는 나도 침범하지 않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에레사는 눈가가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리에르는 달라졌다. 예전의 그 어리숙하고, 바보 같지만, 항상 정이 많고 남을 생각하는 남자는 없었다.
일국의 지도자로서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성장은 원하지 않았다.
“에렌.”
리에르는 손을 들어 올렸다. 에레사는 그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에레사는 지금까지 뭔가 착각했던 것을 느꼈다.
오늘 유달리 달콤하고, 부드러웠던 리에르.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온화함을 나타냈던 것인지 질문하고 싶었다.
그는 무미건조했다. 그리고 굉장히 냉정했다.
유이의 죽음 이후 충격에 빠져 있었어야 할 리에르는 없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식사하고, 평소와 같이 근무했다.
방에 틀어박혔다고 착각한 것은,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었다.
“리엘…….”
에레사는 슬픈 눈동자를 들어 사랑하는 남자를 올려보았다.
자신은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의 리에르는 예전의 리에르가 아니었다. 다시 재회했을 때의 리에르와 지금의 리에르는 또 달랐다.
그동안은 바보 같을 정도로 결여되었던 이성이, 너무 강해진 상태였다.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사실 오늘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어.”
리에르는 미소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너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에레사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왠지 불길했다.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에레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리에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네 안에 있는 아이는.”
불길했다.
“내가 지워줄게.”
에레사는 뒷걸음질했다.
오늘 그렇게도 다정하고 달콤했던 남자가 이제는 포식자로 보였다.
리에르는 에레사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는지 최대한 온화하게 말했다.
“아프지 않을 거야.”
“리엘……. 갑자기 왜 그래……?”
에레사는 달라진 리에르의 모습에 공포를 느꼈다. 리에르는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세상과 같았다.
그런 것을 잃는다면 전부를 잃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넌 좋은 여자니까.”
리에르는 애써 웃어 보였다.
“얼마든지 좋은 사람 만나겠지.”
에레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것에 의미는 없었다.
에레사의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은 에레사를 낚아채듯 양쪽 팔을 붙잡았다.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넌 죽어.”
리에르는 에레사가 결코 아이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때 강력한 마법사였던 라일라도 리에르를 낳고 나서 모든 마력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건강도 악화되었다.
하물며 에레사는 일반인이었다. 아무런 마력도, 아무런 체력도 갖지 못했다.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는 생명은 그 존재만으로도 에레사를 위협하고 있었다.
통증을 참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에레사는 눈에 띄게 수척해지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에레사가 죽는다. 반대로 에레사의 속에만 있다간 아이가 죽는다.
산모와 아이, 둘 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리에르가 취할 행동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야.”
리에르의 손이 에레사의 눈을 가렸다. 에레사는 손길을 피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공포와 눈물이 뒤범벅된 에레사의 눈동자.
“걱정하지 마.”
그 시야 안으로 리에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계속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던 그는 없었다.
“기억은 엘이 지워줄 거야.”
리에르는 오열하고 있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안타까웠다. 에레사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레사의 손끝이 움직였다.
칠흑의 마왕, 애쉬문의 황제. 적혈의 악마. 그 어떤 이름이라도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남자.
소꿉친구 리엘. 그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뻗어지던 손은 이내 허공에 힘없는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렇게, 리에르는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