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57)
레필리아 레소드-358화(357/398)
레필리아 레소드 358화
아리아 합중국(5)
“적은 흑기사 500명, 보병 1만으로 이루어진 결사대입니다.”
보좌관의 보고를 받는 장년의 남성은 높은 산맥 아래에서 적의 포진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메뚜기같이 모여 있는 적의 막사. 그곳에는 교단의 필사적인 저항이 있을 예정이었다.
“비록 우리가 숫자는 압도적이지만 방심할 수 없어요.”
붉은색 일색의 여성은 장년의 남성, 강철의 대공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그녀, 제국의 마지막 장군이라 불리던 프레이야는 드디어 복수의 날이 다가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선봉을 맡아주시겠소?”
강철의 대공 이실렌이 중후하게 입을 열어 보였다.
“기다렸던 바이지요.”
프레이야는 매혹적인 입가를 열며 미소를 머금었다. 대륙 오제라는 이름을 달은 인물이 직접 선봉에 서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칠흑의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였다. 최강의 사내이자, 최악의 살육자인 그를 상대하는 데에 체면 따위는 필요 없었다.
“선봉대장은 불꽃의 여제, 프레이야 비 미드니가 직접 적을 도륙해 주시오. 그리고 피스 메이커는 레버넌트 부대들을 이끌고 유격대로 활약해 주게. 그 이후의 일은 모두 경의 판단에 맡기겠네.”
이실렌의 명을 받아 피스는 군례를 바쳤다. 눈빛에는 생기가 없고, 얼굴 절반은 붕대로 감겨 있었으나 오늘만은 생기가 넘치는 듯 보였다.
“7군단과 8군단은 산맥을 봉쇄해 주시오.”
“개미 새끼 한 마리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9군단과 10군단은 산맥을 우회하여 적의 퇴로를 막아주시오.”
“적의 꼬리를 몽땅 잘라놓겠습니다!”
이들은 모두 승리를 예상하였다.
칠흑의 마왕이 아무리 강력해도 인간인 이상은 5만 대군을 상대로 혼자 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 괴물을 겪었던 이실렌만은 생각이 달랐다.
“11군단부터 15군단은 전부 예비대로서 뒤에 대기해 주시오.”
“저희는 출진할 기회를 잃겠군요.”
11군단장들은 웃으면서 군례를 바쳤다. 하지만 이실렌은 고개를 저으면서 입을 열어 보였다.
“아군의 위기가 찾아올 때, 그대들의 모든 힘을 쏟아붓게 될 것이오.”
이실렌의 말에 군단장들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혹자는 예전에는 강철의 위명을 갖고 있던 이실렌이 노망이 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1군단부터 6군단은 적이 상식을 벗어난 존재란 것을 생각해야 하오. 놈의 친위대인 흑기사들을 상대할 때는 단독으로 상대하지 마시오.”
이실렌 대공은 지휘관들을 보며 말했다.
“지휘관급들은 자신의 무력에 자신 있더라도 직접 검을 뽑지 마시오. 지휘관들이 당하면 체계가 무너지게 되니.”
“네!”
젊은 군단장들은 이실렌 대공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들은 여러 가지 전설적인 승리는 한때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비록 세력은 달랐지만, 그들은 강철의 부대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서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바로 어긋났다.
“뭐가 강철이냐. 그냥 천 쪼가리 아냐?”
군단장들이 들리지 않게 시시덕거렸다. 강철이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말을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해야 했다.
곧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지휘관을 처벌하는 것은 좋은 수가 아니었다.
“내 명예를 대가로 소중한 인재들을 살릴 수 있다면 후세에 겁쟁이라 욕먹어도 상관없소. 각 군단은 마왕이 나타난 쪽으로 정예를 모두 모아서 그자를 격퇴해야 하오. 눈앞에 있는 교단의 중보병은 무시해도 좋소. 오로지 칠흑의 군마만 주의하시오.”
군단장들은 대다수 제국의 소속이었고, 그들의 역량을 다소 무시하는 것 같은 지시사항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달라진 것은 그날 밤의 야습이었다.
칠흑의 마왕은 달랑 100기의 흑기사만 이끌고 야습을 걸어왔다. 삽시간에 어둠에 녹아들어 습격한 적들을 상대로 경계병들은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막사는 불이 붙었고, 제대로 갑옷도 챙겨입지 못한 병사들이 말굽에 짓밟히고, 창칼에 목이 달아났다.
군영에 비상 나팔이 울렸다. 불을 끄고, 적습을 막고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마왕의 흑기사들은 유유히 살육을 저지르고서 본진으로 되돌아갔다.
불길한 시작이었다.
부흥군이 방심 따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총지휘관인 이실렌은 과도할 정도로 마왕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야습에 의해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흑기사들에게 살육당한 사람만 해도 수백이었고, 방화로 인한 물적 피해 역시 타격이 컸다.
비겁하게 야습을 해온 마왕에게 분노를 품는 귀족들은 많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칼날 아래 비겁한 교단의 암살자들을 응징하겠노라 노발대발했다.
그 기세를 타고 아침 일찍, 부흥군의 부대가 복수하기 위해 진격을 시작했다.
“시작이야.”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 아르미안은 진군해 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통솔을 부탁하지.”
“걱정 마. 기본적인 통솔법은 알고 있으니까.”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기본적인 통솔만으로 승리할 리 없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이 굳이 승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방어를 철저히 하면서 아군의 피해만 최소화하면 되었다.
모든 승리의 열쇠는 오로지 칠흑의 마왕이 가진 무력에 달려 있었으므로.
“굳이 잔소리할 필요는 없겠지.”
리에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장들을 바라보았다.
“본인은 지금껏 무패 했고, 앞으로도 무패 할 것이다.”
광오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 이상의 무력으로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맞이했다.
“두려운 자는 빠져도 좋다. 목숨을 걱정하는 이는 역사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도전을 두려워하는 이는 승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흑기사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대륙 유일의 마왕, 그가 직접 인선한 인재들로만 이루어진 정예들이었다. 흑기사들은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애쉬문을 위하여!”
“마왕의 영예를 세우리!”
출신에 구애받지 않은 인재들.
그들은 마왕에 대한 호기심, 혹은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 해서 들어온 적도 있었고, 생계유지를 위해 입단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리에르의 충실한 종복이었다.
그들이 가진 리에르에 대한 충성심은 신앙이라 해도 좋았다. 각자의 이유는 다르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리에르와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다시 한번 놀라게 할 것이다.”
리에르는 그렇게 말하며 헬름을 썼다. 칠흑으로 도배된 듯한 갑주를 걸친 흑기사들이 마왕의 뒤를 따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교단에 접근하는 모든 세력에게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온다, 마왕이 온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번 죽을 것이다.
리에르는 손을 높이 들었다. 그의 손안에서 칠흑의 큐브들이 생성되었다. 마멸되는 칠흑의 큐브들 속에서 빛과 함께 긴 흑도가 번뜩였다.
“장창을 들어라!”
서걱!
횡으로 한 번 그어진 흑도는 눈앞의 모든 것을 잘라냈다. 기병들을 찌르기 위해 뻗어진 장창은 날이 잘려 나가 나무 몽둥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것을 쥐고 있던 병사들의 손은 손목과 이별하며 핏물을 흩뿌렸다.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단 한 합으로 삽시간에 핏물이 가득한 것을 보고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2열, 3열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기에 피할 곳은 없었다.
거대한 흑마는 공포에 지배된 병사들을 짓밟았다. 말에게 짓밟힌 병사들의 내장이 풍선처럼 터지며 핏물을 흩뿌렸다.
핏물에 적셔진 얼굴을 닦지 못하고서 공포에 물든다. 내장에 얻어맞은 병사가 휘청거렸다.
“놈을 막아라!”
부흥군에도 기병이 있었다. 그들은 랜스를 말아 쥐고서 흑기사들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리에르 아르빈트를 선두로 한 흑기사들은 마치 사과 껍질을 도려내듯이 매끈하게 앞줄만을 베면서 선회했다.
“마왕의 목을 베면 평생 창녀 화대는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화대 정도가 아니었다. 작위를 하사받고, 영토를 하사받을 것이다. 아울러 인류를 구원한 우리의 친구 같은 우스꽝스러운 칭호도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욕심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회한 흑기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적의 기병들을 맞아들였다. 적의 허리를 끊으려던 것이 오히려 자신들의 허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돌바닥에 긁힌 살점처럼 핏물과 함께 베여 나가는 기사들이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마왕은 기사들의 대장 격인 인물을 포착하고 달려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개X끼!”
욕지기를 내뱉으며 기사 대장은 자신의 목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아주 길고, 아주 오랫동안 부유한 것 같은 머리통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며 간헐적으로 핏물을 뽑아냈다.
하지만 이윽고 누군가의 말굽이 머리통을 수박처럼 으깨놓았다.
솜씨 좋은 요리사 앞의 과일처럼 순식간에 썰려 나가는 기병들을 보면서 프레이야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친히 자신이 자랑하는 염화대를 이끌고서 출정했다.
프레이야뿐만이 아니었다. 총지휘관인 이실렌은 피스를 필두로 한 레버넌트 부대를 투입하여 흑기사들을 공격도록 하였다.
“후퇴한다.”
리에르는 짧고 간단명료하게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흑기사들은 호흡을 정리하며 남은 기병들을 썰어댔다.
삽시간에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빠진 흑기사들을 더 뒤쫓지 못하고 프레이야는 인상을 찌푸렸다.
“보병 앞으로!”
그나마 장창진이 완벽하게 무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기병대는 순식간에 박살이 난 상태였다.
아마 숙련도나 실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던 걸로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실렌의 지휘 아래 장창 보병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그 사이 흑기사들은 재빨리 본진에 돌아와서 말을 바꿔 타기 시작했다.
“큰 성과입니다.”
흑기사 부대장인 빈센트는 호흡도 가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리에르는 수건으로 적의 핏물이 묻은 얼굴을 대충 닦아내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하다. 하지만 더 큰 성과가 필요해.”
“그거 아십니까, 각하.”
빈센트는 잔에 포도액을 부어 리에르에게 건넸다.
“저는 각하가 검술대회에 출전했을 때를 기억합니다.”
“……?”
리에르는 갑작스러운 빈센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각하가 페이서스에서 우승했던 때를 말하는 겁니다.”
“그랬군.”
굉장히 오래전의 기억이었다. 아니, 자신이 아니던 때의 일이라고 생각됐다.
처음으로 검에 전율하고, 자신의 힘으로 승자가 되었던 때의 전율을 기억했다.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고 날 듯이 기뻐했던 때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랑했던 에레사와 서로 마음을 확인했었다. 자신의 짝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했다.
“작은 승리에 기뻐하던 소년이, 무패를 자랑하는 칠흑의 마왕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요.”
“의미 없는 감상이다.”
리에르는 포도액으로 입안을 헹군 뒤에 재출전 준비를 했다. 빈센트는 그를 보좌하면서 교체된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그럴 때가 있었다. 그뿐이었다.
지금의 리에르는 모든 것을 내던졌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줌도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어떤 것을 하고 싶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수라가 되어 핏빛 융단을 걷는다.
아니, 달린다. 그 결말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