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61)
레필리아 레소드-362화(361/398)
레필리아 레소드 362화
아리아 합중국(9)
“각하, 다음으로는 어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번에도 한 왕국의 군단이 전멸한다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벌레들이 뭉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큼직한 먹이를 쳐야 하겠지.”
칠흑의 마왕. 그 곁을 지키는 충신 빈센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인의 의도를 추리하려는 행동이었다.
“페리안입니까?”
“아니다.”
“그들이 현존하는 세력 중 가장 강합니다.”
빈센트의 말에 리에르는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리에르도 페리안을 가장 먼저 공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트라는 존재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그렇다면, 아렌입니까?”
아렌 왕국 역시 신검이 물러섰다곤 하나, 최강의 기사 왕국이었다. 그들은 전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페리안은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아울러 아렌 왕국도 승전하고 있지만, 발이 붙들려 있다. 현재 승리하고 진격해 오는 것은 둘이다.”
리에르는 그리 말하면서 조소해 보였다.
“루나레이크와 로빈타다.”
그 두 나라는 다른 연합국보다 앞서서 교단의 영역을 침범하였다.
리에르는 빈센트에게 지시를 내렸다.
“현 시간부로 루나레이크를 치기 위해 이동한다!”
“참된 왕의 이름으로.”
빈센트는 목 언저리를 검지로 짚으며 군례를 올려 보였다. 루나레이크에는 장미의 기사 프란츠가 있었고, 네 번째 포스인 아일 하사드가 존재했다.
예전에 리에르는 구 교단의 군단과 전투했던 적이 있었다. 거의 기진맥진 상태에서 싸웠지만, 아일 하사드의 끈질김 때문에 발목이 잡혔던 적이 있었다.
아일 하사드는 충분히 위험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리에르는 가장 먼저 그를 잠재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일 하사드 역시 리에르가 자신을 먼저 노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 * *
“이제 따로 행동해야 할 때가 되었다.”
“어째서인가요?”
아일은 프란츠에게 본대와 따로 행동하겠노라 말했다.
총지휘관인 소로한은 난색을 보이면서 설득을 위해 입을 열었다.
“앞으로의 전투에도 자네가 없다면 우린 매우 어려울 걸세.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는가?”
“…….”
총지휘관인 소로한의 온화한 말에 아일은 입을 꾹 닫아 보였다.
결국, 프란츠는 아일의 의중을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방해된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건…….”
아일은 눈가를 찌푸렸다. 프란츠는 품 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내더니 깊게 숨을 들이쉬어 보였다.
향긋한 마음은 러브 파워를 더욱 샘솟게 만든다는 의미 모를 말을 늘어놓던 인물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그는 장미를 놓지 않았다.
“그가 오는군요, 저희 쪽으로.”
“그래.”
프란츠의 말에 아일은 솔직하게 긍정했다. 칠흑의 마왕이 살기의 날개를 펼치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도 매 순간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일은 아렌의 수도에서 초죽음 상태가 되었다가, 겨우겨우 재생했다. 그동안 그의 힘은 성장하지 못했지만, 리에르의 힘은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놈과 전투가 시작되면 너희들을 지킬 수가 없다. 아니, 괴물들 간의 싸움이니 오히려 주변에 있으면 모두가 피해를 보겠지.”
“불과 얼마 전에는 일대일로는 승산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프란츠의 말에 아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괜히 사실대로 말했다는 후회가 찾아 들었다.
아니, 거짓을 말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금발의 장미는 모든 것을 알아챌 것이다. 인간인 주제에 비상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아니, 없는 것은 아니지. 다만 놈과 싸우게 되면 난 필시 광폭화하게 될 터.”
모든 힘을 끌어내면 아일의 몸은 변화한다. 일단 그 상태가 되면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이성의 조각조차 남기지 않은, 오직 전투만을 위한 형태.
즉,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정말로 승산이 있는 건가요?”
“억울할 정도의 확률이지만, 있긴 있다.”
어차피 아일은 목숨이 아깝지 않았다. 그 목숨을 리에르에 맞서 싸우다가 끝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아니, 그를 쓰러뜨려야지만 아일이 살아갈 목적이 생겼다.
아르미안을 갖고 싶었다. 평생을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정함도 주지 않은 악랄한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매정하면 매정할수록 그것을 억지로라도 갖고 싶었다. 그래야만 모든 한이 풀릴 것만 같았다.
“분명히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이 옳은 방향이겠군요. 하루빨리 연합의 세력이 하나로 뭉쳐서 적과 싸워야 하니까요.”
리에르 아르빈트의 힘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 생각을 한 것은 루나레이크뿐이 아니었다.
연합군은 비밀리에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는 루나레이크와 로빈타가 먼저 뭉치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다.
“당신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 기사도가 많습니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난 기사 따위는 될 생각이 없다.”
장미의 기사 프란츠가 반짝거리며 말을 하자 아일은 불편하다는 듯이 툭 쏘았다.
“우리의 작은 여왕, 카를레야 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숙명의 적과 싸울 때도 그녀를 떠올리며 싸워야 합니다.”
“난 어린 여자엔 흥미 없어.”
아일은 정말로 짜증이 난 듯이 투덜거렸다. 프란츠는 하하, 맑게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카를레야 엘 베르텐드. 현재 루나레이크의 여왕이자 겨우 11살의 나이를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지독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아일을 우연히 주웠다. 그리고 그를 치료하였다.
어찌 보면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뭐, 꼬맹이가 나중에 어떤 미인이 될지 정도는 관심이 있지.”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프란츠의 말에 아일은 귀까지 시뻘게지면서 성질을 부렸다.
총대장인 소로한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아일과 프란츠 사이를 가로막으며 싸움을 말렸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생각지도 못한 밝은 풍경에 억지로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아일은 더 속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래 봬도 전설적인 포스였다. 아직 1대, 2대, 3대들에 비해서 활약이 부족할지는 몰라도 엄연한 포식자였다.
“나 또한 그대를 기다릴 걸세.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
소로한. 오십 줄을 넘긴 중년의 남성은 카를레야 여왕을 수행하는 늙은 기사에 불과했다.
전대 여왕이 죽은 루나레이크는 급격하게 무너졌고, 칠흑의 마왕에 의해서 지배를 당했었다.
그때 운명적으로 아일 하사드를 만나고, 프란츠를 만났다. 이 두 사람의 힘으로 순식간에 어지러웠던 나라를 정리하고 여왕의 세력들이 만들어졌다.
“흥, 난 포식자다. 인간을 학살하는 마왕인데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 아닌가?”
“설령 그렇다 해도, 자네는 영원히 루나레이크의 친구일세.”
소로한의 말에 아일은 낯뜨거운지 허,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딴전을 피워 보였다.
“무엇보다 우리 여왕님이 좋아하는 남자가 쉽게 죽으면 안 되겠지.”
“뭐?”
아일은 귀 끝까지 붉어져서 소리를 질렀다. 소로한은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은 아일을 보며 허허, 점잖게 웃어 보였다.
그를 골리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았다면 진작에 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놈들이랑 합류나 잘하라고.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아일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의 행렬에서 이탈했다.
“승전보를 기다리지.”
“그대의 승전보 역시.”
아일의 말을 프란츠가 받으며 서로의 짧은 인사를 마무리했다.
프란츠와 소로한은 아일이 자신들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아일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을 이렇게 격의 없이 대하는 사람들을 처음 만나보았다.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프란츠. 자신을 신뢰해 주는 소로한.
그리고 자신 같은 인물에게도 애정을 보여주는 꼬마 여왕.
아일은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입 언저리를 만졌다.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는 정말이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래, 웃음이 이런 거군.”
아일은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지금과 같은 기분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일은 자신의 날개를 드러냈다.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진 마력의 날개는 크면 클수록 강한 힘을 발휘했다.
아일은 리에르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혼자서 걸어갔다. 주변은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이군.”
아일은 주변의 적막함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시궁창을 헤매고 다니던 괴물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 누군가가 있을 리 만무했다.
먹고 먹히는 관계. 그런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왔던 아일에겐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이 생소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대화가 오가는 것도 기뻤다.
‘지키고 싶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르미안에게 맹목적인 사랑과 충성을 바치면서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힘없는 이들을 지키며 행복을 나누는 일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사한 것인지를 몰랐다.
아일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대륙 최악의 재앙인 칠흑의 마왕, 전 적혈의 악마를 상대로 필사의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걸었다. 눈을 감았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마력을 갈무리하고, 살기를 다시 갈고 닦았다.
‘난 여기에 있다. 와라, 리에르 아르빈트.’
아일은 자신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저 폭주로 인해 각성했던 시절엔 오로지 피만을 원했다. 하지만 그런 생활에서 잠시 떨어지니 머릿속이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아일은 천천히 눈가를 열어 보였다. 그 앞에는 칠흑의 마왕이 빛의 날개를 펼친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기운을 느끼고 마주했다.
“리에르 아르빈트.”
“아일 하사드.”
두 남자는 가만히 마주 선 채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동안 잊었지만 역시 네놈 낯을 보니 죽이고 싶다.”
“마음이 맞는군. 그래. 나도 네 목을 잘라서 나뭇가지에 달고 싶어졌다.”
아일의 등 뒤로 갈색의 깃털이 날개처럼 형성되며 위용을 보였다. 리에르의 등 뒤에도 칠흑의 날개 네 장이 빛을 발하며 펼쳐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죽이고 싶지만, 아르미안이 부탁하더군. 너와는 적이 될 필요가 없으니 아군으로 끌어들이자고.”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아일은 아르미안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의 청초한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의 향기로운 손길에 어루만져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어린 여왕과 수하들이었다. 그러자 요동치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졌다.
“그래, 그것도 좋은 선택이지. 하지만……!”
그의 마음엔 이미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여도.
“언제까지 아르미안 엉덩이만 쫓아다닐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일의 말에 리에르는 차갑게 조소했다.
“네놈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말이구나.”
리에르는 맑게 웃으면서 천천히 땅바닥에 있던 장대 두 개를 들어 보였다.
막대의 끝에는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아일은 그것을 보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방금 입수한 새 컬렉션이다.”
프란츠의 고귀한 금발 머리카락은 붉게 물들어서 축 늘어져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뜯긴 목 언저리에서 척추뼈를 타고서 흘러내렸다.
항상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던 소로한의 짧은 담갈색 머리카락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장대에 매달은 두 개의 목을 보여주며 리에르는 빙긋 웃어 보였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이미 일을 저질러 놨어. 괜찮겠지?”
“이 개자식!”
아일은 이성을 잃고서 리에르에게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짧게 웃으면서 장대 두 개를 바닥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칠흑의 장도를 휘두르면서 검광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