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70)
레필리아 레소드-371화(370/398)
레필리아 레소드 371화
마왕의 최후(3)
에레사 에레나드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자면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배신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어린아이의 생기를 섭취했다.
정말 훌륭한 악마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생을 이어가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온 이 바보 같은 삶이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억지로 고통을 밀어냈다. 그가 일어났다는 것을 용케 알고서 시종이 식사와 포도주를 가져다주었다.
리에르는 식사하는 흉내만 냈다. 언데드 상태인 자신은 식사도, 잠도 필요 없었다.
잠자는 척을 하며 몸을 누이는 것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식사를 하는 것도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한 버릇에 불과했다.
현재 애쉬문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세력권은 대다수 지배력이 해제되었다.
현재 교단의 광신도로 이루어진 5천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마왕의 친위대인 3백 명의 흑기사들이 있었다. 결사대로는 충분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람세스 성의 바깥으로는 압도적인 적군이 모여들고 있었다.
5천 대 15만.
수치상으로는 승리가 거의 불가능한 전력이었다. 다만 수성이라는 것 하나만이 이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큰 의미가 없었다.
람세스 성은 수성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성벽은 낮았고, 식량은 부족했다.
준비할 수 있는 모든 전쟁 물자를 끌어모았지만, 성안에 남은 화살이나 무구는 부족하기만 했다.
“항복해야 하오!”
“천년의 믿음을 저버린단 것은 말도 안 되오!”
“염병, 죽고 나서 신을 찾아봐야 무슨 소용인가!”
연대장급의 지휘관들은 이미 가망 없는 전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한창 설전을 펼치다가 리에르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부터 복도가 회의장이 되었는가?”
리에르는 조소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회의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오, 각하.”
“왜?”
리에르의 질문에 가터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쥐덫에 걸린 신세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상황이오. 1번밖에 없는데 2번을 뽑으라는 소리를 듣고 있소.”
“1번을 두 번 뽑으면 될 일을.”
리에르의 태연자약한 말에 가터는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소리쳤다.
“그딴 소리가 아니지 않소! 각하는 현 상황이 보이지 않소이까?”
가터는 성 너머의 대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질서정연한 연합의 군대가 언제든지 성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공성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투항하는 인물에게는 죄를 물지 않겠다는 선전 문구와 외침을 반복하고 있었다.
덕분에 교단의 사기는 최악의 상황을 달리고 있었다. 실제로 굳은 신앙이 있던 광신도들을 제외하고는 절찬리에 탈영 중이었다.
물론 탈영을 막기 위해 배치된 장군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마저도 같이 탈영을 하고 있었다.
5,300명이던 정예병은 하루 만에 4,000명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미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아, 현 상황이 잘 보이고말고.”
리에르는 성벽 너머의 대군을 보며 조소했다.
“감히 상관의 앞에서 반역을 의논하는 벌레들의 얼굴이.”
“뭣?”
리에르의 날카로운 말에 지휘관들은 순간 당혹스러워했다.
“저희는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빌어먹을 애X끼. 운 좋게 얻은 힘 따위를 믿고서 안하무인으로 설쳐대는 버러지 X끼!”
가터는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그는 알 수 있었다. 리에르 아르빈트가 살의를 비춘 이상 멈출 리가 없었다.
푸쉭!
순식간에 머리 세 개가 허공에서 팽이처럼 돌아가며 피를 튀겼다. 그 광경을 본 이들은 헛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든 반역을 꿈꾸는 이들은 즉시 처형하라.”
“네, 명대로 하겠습니다.”
어느새 리에르의 뒤쪽에는 충성스러운 부관인 빈센트가 뒤따르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친위대인 흑기사들이 전부 뒤따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죽음을, 마지막 전투를 각오하고 있었다.
삶이 아닌 명예를 위하여.
“곧 적이 공성을 걸어올 것입니다.”
“수성은 선지자에게 맡긴다. 우리는 가장 잘하는 것을 해야 하겠지.”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리에르는 적을 감시하는 감시탑 망루 쪽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아르미안이 대기하고 있었다.
리에르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어디로 향할지를 미리 알고 있었던 그녀였다.
이제 패배밖에 남지 않은 전쟁. 초췌해질 만도 하지만 아르미안은 진녹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흰 제복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녀는 리에르를 보자 온화하게 웃으면서 맞아들였다.
“리엘.”
“전투준비는?”
아르미안의 다정한 부름에도 리에르는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리에르는 보고를 받으면서도 아르미안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제 곧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계획의 끝이 무엇을 말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리에르는 자신을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신도병들은 목숨을 다할 거야.”
“그걸로 됐다.”
리에르는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돌아섰다. 아르미안은 빠른 걸음으로 리에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대화 좀 하면 안 될까?”
“전투를 앞두고 있다.”
리에르의 냉랭한 말. 아르미안은 손을 들어 리에르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마치 이 온기를 나누려는 듯이, 마치 이대로 보낼 수가 없다는 듯이.
“조금이면 돼. 부탁이야.”
아르미안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는 눈동자로 말했다.
리에르는 자신이 출정하면 성안의 모든 것을 아르미안이 담당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서 신앙만이 교단군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이럴 때 지휘관끼리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이길 것도 질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리에르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아르미안은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먼저 앞장섰다. 병사들이 지키지 않는 조그만 창고였다.
창고의 낡고 퀴퀴한 냄새. 그것을 느낄 때쯤 아르미안이 갑자기 홱 돌아서서 리에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창고의 냄새와는 반대되는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아르미안의 부드러운 입술과 리에르의 입술이 겹쳤다. 촉촉한 혀가 감미롭게 안으로 들어가 달콤함을 느끼려 했다.
하지만 상대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확인하고 싶었지만, 거절의 뜻은 변치 않았다.
결국, 입술을 떨어뜨린 것은 아르미안이었다. 그녀는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어 있는 리에르는 천천히 입을 열어 보였다.
“설마 이게 급한 용무였나?”
“리엘, 이제 그만하자.”
아르미안은 슬픈 표정으로 리에르를 다시 안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헛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꿈에서 하는 것을 추천하지.”
“이대로 가면 넌 망가질 거야.”
“언데드에게 지껄일 말은 아니군.”
리에르는 차갑게 웃었다. 그의 몸은 언제 괴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르미안이 매일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고, 아르카의 생체 유지 시스템이 있기에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나랑 둘이 조용한 곳에서 살아가자.”
“…….”
아르미안의 우수에 젖은 눈동자는 진심으로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테헤라자드에게 사랑이라는 저주를 받고서 모든 것이 왜곡되었다. 지금 가장 소중한 존재인 리에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유이 페브리안도, 에레사 레이나드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리에르를 독점할 수 있었다.
“농담이겠지.”
리에르의 말에는 지극히 냉랭하고 뒤틀린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아르미안은 듣는 순간 눈을 꾹 감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솟아올랐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마음을 전달할 수 없었다.
“나도 너에 대한 원한을 다 잊었어. 그러니…….”
“웃기고 자빠졌네.”
리에르는 조소했다. 자기 혼자 망상하고, 자기 혼자 착각하는 꼴을 보니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증오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내가 너를 증오하듯이 네 감정 역시 오롯이 네 것이다.”
“이제 너에게는 나뿐이야!”
아르미안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절망적이었다.
“그게 네 착각이라는 거다.”
“…….”
아르미안은 이제 깨닫고 있었다. 리에르는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아리아일 때부터 언제나 이용만 당하는 존재였다. 자신은 그 존재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잃어야만 했다.
“하나만 물을게.”
리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리아일 때 날 죽였어?”
아리아는 인류를 위해 헌신한 여신을 베었다. 망설임 없이 목을 베고, 묻지도 않고 버렸다.
아르미안의 육체는 자연과 함께 썩어갔다. 나무와 풀의 비료가 되어 존재가 사라졌었다. 그런 그녀를 반신으로 되살려 준 것은 테헤라자드였다.
“네 악독한 짓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였지.”
리에르는 눈썹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머릿속으로 아리아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이 흘러들어 왔다.
색인된 기억을 하나둘씩 엮으면 모든 결과가 도출되었다.
아르미안은 많은 인간을 살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악랄한 죽음도 선사했다.
아리아의 연인을 죽였고, 그를 사모하는 인물들도 전부 함정으로 내몰아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아르미안은 독점욕이 강했다. 아리아의 사랑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아리아에게 있어 가장 유능한 인물도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 욕심은 누구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선택한 것은 아르미안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그 죽음의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지금도 그녀는 그것이 사랑을 위해 당연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 역시 그렇게 손에 넣었었다.
평화로운 리에르의 일상에는 전투와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위해서는 핏빛으로 얼룩진 나날을 선사해야만 했다.
죽음과 죽음이 만연한 그곳에서야말로 자신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날 수 있었다. 오로지 리에르에게 향유될 수 있었다.
그것을 원했다.
“가겠다.”
리에르는 아르미안을 밀어냈다. 더 이상은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복부를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저주받은 검.
에레사가 리에르의 복부를 찔렀던 그 날.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테헤라자드의 단검이었다.
그 단검은 상처를 치료했던 아르미안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아르미안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이겠다.
이번에 죽으면 아예 의지를 없애는 것이 좋았다. 아쉬웠지만 온전하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고판단 능력을 제거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의 검은 무언가에 막혔다.
리에르의 검은 어느새 자장을 흩뿌리며 단검의 경로를 막아섰다.
“믿는 사람에게는 실수로 당할 수 있지만.”
리에르는 비릿하게 웃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당할 리 없잖아?”
그 말과 동시에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마력에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