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71)
레필리아 레소드-226화(371/398)
레필리아 레소드 226화
광검(1)
“말이 그렇단 이야기느니라. 오늘이 첫 대면이니 답을 달라는 것은 무리겠지. 그대에게 하나 알려주고 싶었느니라.”
그녀는 리에르의 눈빛에서 분노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적혈의 악마라 할지라도 환영받을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뿌연 연기가 붉은 입술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것을 보며 리에르는 굳어 있던 안색을 서서히 풀었다. 그러고는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황성에 도착해서 드려도 되겠군요.”
“그 이전에 말해도 되느니라.”
리에르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끝난 것을 어찌 알았는지 호위 기사들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취할 듯 가득히 느껴지는 향수 냄새.
리에르가 마차에서 나오자 라헬의 험상궂은 얼굴과 마주쳤다.
“폐하께선 필요한 인재라면 천민이든, 죄인이든 가리지 않는단 것을 잊지 마라.”
“그런 것 같군.”
리에르는 라헬에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당당하게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떠냐, 라헬?”
“거절할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라헬은 주인의 물음에 즉답하였다. 창가 쪽을 열며 베로니카가 담배 연기와 함께 말했다.
“어차피 내게 오게 될 거야.”
“어떻게 단언하십니까?”
라헬의 답문에 베로니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쯧쯧쯧, 혀를 차 보인다.
“과인이 원하는 거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소유하고 싶었던 것은 남자든, 직위든, 가리지 않고 가졌다.
아무리 리에르가 강해도 아직은 멋모르는 20대에 불과하다.
“갖지 못하면 부숴 버리는 방법도 있고 말이야.”
소유하지 못하는 물건은 아예 없었던 존재로 만든다. 그렇게 하면 처음부터 그 물건은 없던 것이다.
라헬은 베로니카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무덤덤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베로니카가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에르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일행에게 향했다.
여제가 묵을 건물 작업도 끝나가는지 분주한 소리도 서서히 멎어 간다.
달빛은 밤이 깊어지고 있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인기가 많습니다, Master.
“그러네.”
아르카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에도 리에르는 고개를 끄떡끄덕하면서 무성의하게 답변했다.
베로니카의 숨 막히는 향수 냄새, 그것과 역겹게 뒤엉키는 담배 연기.
리에르의 입술이 비틀리며 비아냥거려졌다.
‘잠시 애들이랑 따로 움직여야겠어.’
촌장은 리에르가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짐짓 놀란 얼굴을 하면서 반기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리에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지, 얇은 외투를 걸친 에레사가 서 있었다.
짧은 단발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어깨까지 내려왔다. 리에르는 그녀를 향해 맑게 웃어 보였다.
‘저 녀석들을 전부 죽이려면.’
힘들게 얻은 평화. 그것을 위협한다면 리에르로선 무서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사를 향해 부드럽게 웃음 짓는 흑요석의 눈동자. 그 이면으로 감춰져 있던 적혈의 악마가 꿈틀거린다.
“왜 나와 있었어?”
“늦는 것 같길래.”
낮에는 따뜻한 온기를 품는 대지지만, 밤이 되면 누구보다 차가웠다. 칼 같은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매정하네? 내가 끌려갔었는데 그냥 푹 쉬고 있던 거야?”
보통 같으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걱정되어 나와 본 사람은 에레사뿐이었다. 리에르는 자연스럽게 불만을 토로했다.
“혼자 군대랑도 싸우는 사람인데 뭘 걱정하겠어.”
“도와주진 못할망정 걱정은 해줄 수 있잖아.”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걱정해 줬어.”
에레사는 그렇게 말하며 촌장 쪽을 바라보았다. 촌장은 아까의 전투 덕분에 부서진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금방 돌아왔구먼. 내가 다 치우기 전에 안 돌아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네.”
“제 일행이…… 안 도와주던가요?”
딱!
리에르의 머리 위로 담뱃대가 가격해 왔다. 리에르는 맞은 자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뭐야, 왜 때려요!”
“부순 놈이 치워야지, 일부러 네놈 올 때까지 기다렸다.”
촌장은 조금 전에 장미 기사들을 상대로 굽실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리에르를 상대로 잔뜩 기가 살아 있었다.
한 대 얻어맞은 리에르는 화가 치밀어서 촌장에게 항의했다.
“아니, 나만 부쉈나 뭐! 왜 저기 패거리에겐 암말 안 해요?”
“노인네가 무슨 힘이 있어서 기사들에게 따지겠어.”
촌장의 가치관이 이상했다.
기사들에게는 꼼짝 못 하고 머리를 조아리던 촌장이었다.
하지만 장미 기사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든 장본인에게는 머리를 박아댈 정도로 극단적이다.
뭔가 먹이 사슬이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 기사 나리에게는 꼼짝도 못 하면서, 저한테는 왜 이래요?”
“기사에게 밉보이면 마을 사람들이 죽어 나가지만, 네놈에게 밉보이면 나만 죽으면 되잖냐. 누가 너처럼 자신 주변도 안 돌보고 혼자 설치는 망나니인 줄 알아?”
“…….”
촌장의 말에 리에르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리에르의 팔뚝에 달라붙어 있는 아르카도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촌장의 말에 응수하고 나섰다.
-늙은 수컷의 말이 맞습니다. Master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시끄러워, 고처르이제.”
-Master의 행동 원리는 단명하는 소설 주인공, 적을 양산하는 소설 주인공 콘셉트입니다. 몸은 성인, 정신은 중2라는 말이 그래서 있습니다.
“뭔 소린진 모르겠지만, 기분 나쁘니까 중얼거리지 좀 마.”
촌장은 늙은 수컷이라는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리에르가 아르카와 대화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리에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깨져 나간 파편들, 그리고 주변 자재들이 어수선하게 널브러져 있다.
리에르는 뚱한 표정으로 에레사를 쏘아보았다.
리에르의 강렬한 시선을 받고 에레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눈웃음을 쳤다.
“일 잘하네.”
“그거 말고.”
“잘생겼다!”
“그건 고맙지만, 그거 말고.”
리에르의 애타는 듯한 눈빛을 보고 에레사는 짐짓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양손을 불끈 쥐고서 말했다.
“힘내!”
“하아.”
어느새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유이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볼멘소리를 냈다.
“바보 원숭이.”
어릴 적에는 남들보다 못한 재능 때문에 본의 아니게 구박을 당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성인이 되어 강해졌다. 그래도 처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레온! 좀 도와줘!”
평소에는 리에르에게 잔소리를 끊임없이 해대던 갈색 머리의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았다. 마치 잠들기라도 한 듯했다.
-아르카가 Master를 돕겠습니다.
‘그래도 이놈밖에 없군.’
평소엔 시켜도 하지 않을 녀석이 스스로 도와주겠단다.
리에르는 아르카를 기특하게 생각했다.
아르카는 꾸물꾸물 리에르의 팔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손목까지 내려온 아르카는 리에르의 손안에서 변형을 시작했다.
곧 아르카이제는 빛나는 칠흑의 커다란 집게 형태가 되었다. 멍해 있는 리에르에게 아르카의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물건을 치울 수 있습니다.
리에르는 아르카의 허리 부분을 반대로 접어버리고는 땅바닥에 갖다 버렸다.
어느 정도 주변을 정리하자 촌장도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길게 폈다.
루나레이크 기사들도 여왕이 쉴 공간을 완성했다. 놈들은 이 마을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착취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풀죽밖에 못 먹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물건을 강제로 약탈이라도 하듯이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다시 한번 붙어?’
자신에게 당했을 때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겁에 질린 표정을 했던 놈들이다.
하지만 무기를 지니지 않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마치 악마 같은 표정을 짓는다.
자신과 연관이 있는 마을은 아니었다. 그저 오지랖에 불과하다.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속에서 울컥함이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촌장이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만류했다.
“아서라, 네 녀석이 어설프게 건드린 덕에 놈들도 자존심이 상해서 더 심하게 구는 거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어디 가서 입을 함부로 놀릴까 무서운 게야.”
아무리 상대가 말도 안 되는 강자라고는 하나, 일방적으로 당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명예는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깨진 프라이드는 회복할 수 없다.
기사들은 결국 주변의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즉, 일종의 화풀이였다.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만, 할 수 있는 내에서만 행해야 한다. 네 녀석처럼 아무 생각 없이 힘을 쓰니까 이런 일도 생기는 거다. 어차피 네놈과 상관없는 마을이니 그냥 흘러가듯 지나가면 되는 게야.”
어느새 담뱃대를 꺼내 문 촌장이 부싯돌을 튕겼다.
후우, 구름 같은 하얀 연기가 나이든 촌장의 마른 입술에서 뿜어져 나온다.
세월의 흐름에 때가 벗겨진 담뱃대 위로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연기.
촌장에게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부부 이외에는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오늘따라 그는 리에르를 보면서 옛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리에르의 어리숙함이 마치 손주처럼 느껴지기라도 했을까, 촌장은 진심 어린 충고를 하였다. 너무 강한 나무는 휘지 못하고 부러지게 마련이다.
빼앗기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 그리고 빼앗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
리에르는 입안에 비릿함이 느껴지는 듯하였다.
“쳇, 오늘 첨 봐놓고 잔소린.”
리에르가 구시렁대자 촌장이 껄껄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놈 어리숙한 것이 꼭 손주 놈을 닮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굽어진 허리의 노인. 눈가에 깊게 팬 주름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는 사연이 많아 보였다.
집에 아들과 손주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실례였다.
리에르는 입술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이나 자라, 괜히 또 쌈박질하지 말고.”
“손님에게 너무 이래라저러라 하시네.”
리에르의 투덜거림에 촌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마에 주름이 지어졌다.
리에르의 시야에는 에레사가 빙긋 웃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그렇게 기분 좋게 중얼거리며 에레사는 무릎을 모아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예전 생각?”
“어른들은 항상 널 보면 이것저것 잔소리가 꽤 많았잖니.”
“그때는 어리숙했으니까.”
“카에르의 교수들과 교관들도 항상 리엘이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했고, 과일 가게 아세튼 아줌마도 이것저것 잔소리가 많으셨었지.”
“내가 참아준 거지.”
“아, 맞다. 안심해도 좋아. 지금도 넌 어리숙해.”
달갑지 않은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외모도, 힘도, 이전과는 모든 게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분들은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관심이 있고 좋아하니까 이것저것 신경 써주셨던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잔소리가 좋아한다는 표현이 되는 거냐? 무슨 사디스트 같은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쳐 보이는 리에르를 보고 에레사는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잘도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 어렸을 적에 그렇게 괴롭혀 놓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