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77)
레필리아 레소드-377화(377/398)
레필리아 레소드 377화
마왕의 최후(9)
“뒤를…….”
리에르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유트의 잘생긴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유이가 죽었을 때도 저런 얼굴을 했을지 궁금했다.
“부탁……. 미…… 안.”
리에르는 말이란 것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지금까지 겪었던 죽음 직전의 순간은 비교도 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천근을 드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유트의 눈물이 떨어진 것인가 생각되었다. 하지만 유트의 눈물은 자신의 코끝과 이마를 때리고 있었다.
‘아아.’
리에르는 자신도 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친구와의 마지막 이별이 슬픈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있었다.
유이가 보였다. 흰 드레스를 입은 사랑스러운 은발의 소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던 청순한 얼굴이었다. 그곳엔 심술궂은 말투도, 놀림도 없었다.
그 옆에는 에레사가 있었다. 금발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성. 그녀는 언제나 다정하고, 온화했다.
항상 곁에 있어주고 믿어준 여성이 바라보는 따뜻함. 그것은 너무나 포근하고, 너무나 행복했다.
죽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행복했다.
볼 수 없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이제 유트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마왕을 쓰러뜨리고, 연합의 중심인물이 된 젊은 패왕. 그를 위해서 아르카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르카에게 모든 포스의 힘을 실었다. 그리고 아리아의 무구들을 주인 변경이 가능하도록 세팅하였다. 그 모든 작업을 마치고서 리에르는 힘을 물려주고 떠났다.
“이 멍청한 놈아.”
유트는 주저앉아서 헛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리에르는 살아 있음을 흉내 내지 않았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에 맴돈다. 풀밭에 달라붙어 있던 파리가 리에르의 안구를 걸어 다닌다.
“유트, 당신이 모든 열쇠를 지니게 되었어요. 이제 황금의 샘을 찾아야 합니다. 라스트 피스를 맞춘 당신이라면 황금의 샘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 없었다. 언제 적들이 추격해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테헤라자드는 지금 인지도가 떨어지고, 점유율이 추락했다. 덕분에 그녀는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즉, 그녀가 운용할 수 있는 힘의 대부분은 천사와 백색의 포스들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했을 터였다.
지금이 기회였다. 황금의 샘에 영웅이 도착한다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할 수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엘.”
리즈는 엘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유트의 심정이 어떨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보채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엘도 리즈가 말하는 의미를 알았기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요.”
유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잖아요.”
유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해야 한다면 서두르겠습니다.”
유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이미 굳은 신념이 박혀 들어갔다. 아직 뺨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이 말라붙기도 전이었다.
“리에르의 힘이 저를 지키는 한, 놈들에게 복수하겠습니다.”
이딴 쓸쓸한 죽음은 인정하지 않는다. 친구의 불행한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복수라는 이름의 꽃을 바치는 것뿐이었다.
“결정했다면 황금의 샘이 어딘지 말해주세요. 그곳으로 인도하겠습니다.”
엘이 온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쯤 되면 리즈의 안목을 인정해야만 했다.
유트는 영웅이었다. 아직 젊기에 치기 어린 부분은 있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유트는 천천히 눈을 여미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 이미지를 떠올렸다.
“페이서스……!”
유트는 다소 당혹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오로지 페이서스뿐이었다.
“정말로 그곳에 뭔가가 있나 보군요.”
엘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방금 그곳으로 텔레포트 하려고 했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계가 처져 있군요.”
“군대가 필요하겠군요.”
리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테헤라자드는 어디에 황금의 샘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을 터였다.
모든 것을 알기에 지금까지 점유율이 떨어지든, 전쟁을 대승하든 구경만 하고 있었을 터였다.
어차피 도전하는 자가 황금의 샘에 닿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상대가 누구든 질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유트의 등 뒤로 칠흑의 날개가 펄럭였다. 등 뒤에서 리에르의 힘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은 혼자가 아니었다. 가장 믿는 친구에게 등을 맡기고 있었다.
“결정되었다면 일단 빅스터와 합류하죠.”
리즈의 말에 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적어도 친구를 묻어줄 시간만은.”
“도와드리죠.”
유트의 말을 엘이 받았다.
엘은 그대로 손을 들어 마력을 흩뿌렸다. 바닥의 흙들이 알아서 파헤쳐졌다. 관이 폴리곤 형태로 나타나더니 실체화되어 소환되었다.
리에르의 잘린 몸들은 전부 재생되기 시작했다. 비록 진짜 몸은 아니지만, 최소한 온전한 모습으로 묻힐 수 있도록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유트는 새삼스러운 엘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황금의 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위 정도는 맞춰드려야겠지요.’
엘은 그렇게 조소해 보였다. 리에르와의 약속은 지킬 것이다. 서로가 원한이 있더라도 맹세에 대한 책임은 다할 생각이었다.
‘리엘, 네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마.’
유트는 그렇게 속으로 뇌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대처하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다시 이곳에 찾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지켜지지 못했다.
유트 일행이 마지막 싸움을 위해 텔레포트로 이동하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났다. 누군가가 그들이 있던 곳으로 걸어왔다.
“결국, 그게 너의 선택이었니?”
진녹색의 머리카락을 곱게 틀어 올린 여성이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급조한 무덤치고는 잘 만들어진 터였다.
이것이 아마 엘이 갖춘 최소한의 예우였을지도 몰랐다.
“수고스럽게도.”
아르미안은 그렇게 웃으면서 무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마력의 이채가 번들거렸다.
무덤은 스스로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흙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손을 댄 곳을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 안에 담긴 관도 자동으로 열렸다.
“리엘.”
아르미안이 생긋 웃어 보였다. 그곳에는 아주 깨끗한 시체가 놓여 있었다.
잘려 나간 팔, 다리도. 썰려 나간 살점들도 전부 깨끗하게 재생된 상태였다.
이런 짓을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마력이 많이 들어갔다. 사자에 대한 예우일지 모르나 불필요한 행위였다.
아르미안은 조용히 관에 걸터앉아서 리에르를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많은 일이 있었다.
-누구세요?
검은 머리칼의 소년은 놀란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너무나 기뻤다. 오랜 시간 스스로의 저주를 잘 알았기에 자신을 가뒀다.
고독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 그것을 이겨내려 했다. 하지만 외로움의 시간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게 했다.
-만약 네 기억 속의 단편에 나를 찾는다면 와도 좋아.
저주 같은 기원을 담아 말했다. 소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터였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만든 결계 밖으로 나간다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저…… 머리가 워낙 나빠서……. 7년이 지나서나 기억이 났는데. 너무 화내지 마세요.
생각지도 못했다. 소년은 다시 찾아왔다.
고독함으로 둘러싸였던 껍질이 깨졌다.
운명의 시작이었다. 그가 있으므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을 느꼈다. 사랑의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좋아해.
검술대회에서 소년은 고백했다.
소년이 검을 잡은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아르미안은 앞으로 소년과 함께하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평화로운 삶을 살면 소년에게 검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미친 광기가 정신을 지배했다. 평생을 따라다닌 저주가 다시금 장악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소년을 자신의 색으로 칠했다.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던 하얀 도화지 위에 마음껏 자신의 색을 칠해주었다. 그렇게 소년이 있을 곳이 자신의 곁밖에 없도록 하였다.
얼마간은 행복했다. 하지만 소년은 모든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향해 떠나갔다. 다시 버림받는 순간이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노보다 앞선 것은 소년에 대한 연정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구나, 리엘.”
아르미안은 소년에서 청년이 된 리에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역시 넌 나밖에 없어.”
아르미안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머무른다.
그의 사랑을 받은 여성은 죽었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도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다.
“이젠 나도 좀 쉬어볼까 해.”
아르미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이제 지쳤다. 수없이 반복되는 저주받은 사랑.
그 사랑이 결코 보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광기에 지배되어 버리고 말았다.
후회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소년이 정상적인 각성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것이 그렇게 쉬웠다면 애초에 그녀가 망가질 일 따위도 없었을 터였다.
“이번에야말로 넌 내 거야, 리엘.”
아르미안은 웃으면서 리에르의 입술에 키스했다. 어차피 그의 마력을 받지 못한다면 살아갈 수 없었다.
밖으로 파헤쳐졌던 흙들이 다시 꾸물꾸물 자리를 메꾸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다시금 리에르의 관을 덮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리에르의 관 옆에 진녹색 머리카락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투명하리만큼 빛나는 검신을 가진 검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무덤은 무슨 일이나 있었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풀벌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곳엔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무덤 하나만 덩그러니 존재했다.
칠흑의 마왕, 리에르 아르빈트는 그렇게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자신의 친구에게 모든 힘을 맡기고서.
* * *
“거봐, 검둥아. 네가 틀렸다니까.”
칠흑의 소녀는 하늘에서 길게 꼬리를 늘이며 떨어지는 혜성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생에도 넌 나에게 졌어.”
검은 소녀, 테헤라자드는 이를 드러내며 광기 어린 웃음을 지어냈다. 다시금 거짓말쟁이처럼 혼자 죽고, 혼자 깨달았다.
벌써 여러 차례였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내 생 따위는 없어. 이제 이 세상은 사라질 거니까.”
테헤라자드는 새로 바른 매니큐어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더 이상의 반복은 싫었다. 모든 것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어.”
그저 그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에. 그가 꿈꾸던 세상이기 때문에.
“모두 부셔줄게.”
테헤라자드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혼자 큭큭거렸다. 적어도 혼자 보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혼자는 외로우니 아주 많이 뒤따라가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검둥이가 조금은 고마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광기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