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79)
레필리아 레소드-379화(379/398)
레필리아 레소드 379화
절망 속으로(2)
잠시 분위기가 소강 되었다. 리즈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시 열려고 하자 아로운이 선수를 쳐서 말했다.
“거기에 내 애제자 죽인 진범 놈이 있다며. 그럼 아저씨가 가야 한다.”
아로운은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활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유이는 특별한 아이였다. 활을 배우고 싶어서 몇 날 며칠을 찾아오던 여자아이.
-아저씨는 팔굽혀펴기도 못 하는 막대기들은 상대 안 한다.
-우씨, 겨우 로이스타 아저씨보다 칼 못쓴다는 이유로 치사하게 멀리서 막대기나 쏘는 기술 가지고!
어린 소녀의 말에 아로운의 이마에 혈관이 삐져나왔다.
아로운과 로이스타는 젊을 적부터 서로 라이벌이었다. 아무리 아로운이 활이 검보다 낫다고 역설해도 제대로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어디에서나 검이 최우선이었다. 그 때문에 아로운은 로이스타에게 항상 한 수 접어야 하는 억울함을 갖고 있었다.
-멍청한 소리! 활이야말로 무력과 진보된 기술의 조합이다! 아저씨의 솜씨를 몰라보고 세간에서 지껄이는 소리다!
아로운은 그대로 씩씩거리며 활시위를 연신 당겨 보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고, 나무로 우거진 곳에서 살을 곡선으로 쏘아내는 신기까지 보여주었다.
어린 소녀는 그것을 볼 때마다 백발백중하는 것을 보며 환호했다. 그쯤 되자 아로운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였다.
자기도 모르게 소녀의 앞에서 활 솜씨를 자랑하고 있자니, 어설픈 활을 들고 와서 일부러 툭툭거리는 꼴이 신경이 쓰이게 되었다.
구김살 없는 소녀였다. 맑고 청순한 백합꽃과 같은 아이를 엉망으로 찢어발긴 놈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페이서스에는 그놈도 있다. 말이라도 좀 듣게 하려면 내가 직접 가야 할 거다.”
유트는 아로운이 유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격했다. 다시금 죽은 동생과 친구를 떠올렸다.
리즈는 아까 삐쳤던 것도 잊고서 입을 열어 물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나요?”
“궁금하냐?”
“그냥 말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기분 맞춰드리고 있을 뿐인걸요.”
“사내자식이 그러니까 털도 안 나는 거다.”
빅스터가 리즈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아, 넵. 흠흠.”
빅스터는 여자 뺨치게 미인인 리즈를 보니 온갖 망측한 생각이 일어나서 얼굴을 붉혔다.
“로이스타 아르빈트, 그 신검 놈이 있으니 연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로이스타 아저씨가요?”
예상 밖의 일이었다. 유트는 로이스타 아르빈트가 파에트 아르빈트의 사후 단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렌의 수도에 남아 있을 거로 생각했다.
“지금은 페이서스에서 아내랑 같이 농사나 짓고 있다더군. 그놈에게 어울리지도 않게 부정이란 것이 있었나 보지.”
그 페이서스에 로이스타가 있다는 말에 유트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곰같이 우람한 체격을 가진 그를 생각하니 농사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 * *
“단장님.”
“단장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농부다.”
마치 불곰을 연상시키는 덩치였다. 턱 밑으로 가시처럼 자란 수염은 위압감이 충분했다.
“아니, 씨를 그런 식으로 뿌리시면 다 죽어요.”
마치 멧돼지나 오크를 연상시키는 남성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마을 자경단이 입는 가죽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원래 난 죽이는 것이 특기다.”
“아니, 농사는 죽이면 안 된다고요.”
“하지만 이제 살리는 것만 해보려 한다.”
로이스타는 목에 감은 수건으로 이마를 훑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멧돼지같이 생긴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겨우 농사 10분 하시고서 땀을 훑으실 필요가…….”
“……!”
로이스타의 매서운 반달 눈이 청년을 향했다. 그 살기에 놀라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러니까 이런 일 하지 마시고……. 저희 자경단을 교육해 주시는 편이…….”
애쓰는 것에 비해 농사를 더럽게 못했다. 기초적인 터파기도 뭣도 안 되는 양반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씨를 뿌려야 하는 계절도, 온도도 몰랐다. 아니, 처음엔 씨앗의 존재도 몰라서 그냥 무식하게 나무를 통째로 뽑아다가 박아놓는 것을 농사라고 착각했다.
청년은 매일같이 로이스타 아르빈트를 찾아와서 하소연하고 있었다.
감히 대륙 최강의 기사에게 일대일 수업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런 존재가 하찮은 자경단을 상대로 뭔가 알려줄 리도 만무했다.
그런데도 청년은 꼭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이미 망해서 지도에 없어졌던 도시에서 새롭게 창설된 자경단은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쿠레드 오늘도 왔구나.”
멧돼지를 닮은 청년, 쿠레드는 화사한 옷차림을 하고 온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을 보고 인사를 올렸다.
로이스타의 부인인 라일라였다.
‘그런데 농사지으러 오신 분이 그런 옷을…….’
쿠레드는 애써 그 말을 집어삼켰다. 아르빈트 부인은 농사를 짓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옷을 입고 있었다. 긴 치맛단에 호화로운 옷감으로 수 놓인 차림이었다.
말을 조심하지 않았다가는 애처가인 로이스타 아르빈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이 도시에선 분노한 로이스타 아르빈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도시 사람들이 모조리 달라붙어도 막아낼 수 없을 터였다.
라일라는 가지고 온 참을 내려놓으며 로이스타를 불렀다.
로이스타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랑에서 나왔다.
‘아니, 이제 농사 시작하신 지 10분 조금 넘으셨는데 벌써 참을…….’
쿠레드는 애써 이번 말도 집어삼켰다.
“쿠레드도 앉으렴.”
“아니, 저는 아직 근무시간이라 괜찮습니다.”
쿠레드는 애써 사양하며 웃어 보였다.
“우리 리엘의 친구인데 같이 먹으면 어떠니.”
“비록 똥침 주던 놈이지만.”
로이스타의 말에 라일라가 옆구리를 콕 찔러 보였다. 쿠레드는 그 말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쿠레드는 예전에 페이서스가 비극을 겪기 전에 리에르와 같은 학급의 친구였다.
하지만 무능력한 주제에 유트와 같은 친구를 얻고, 에레사 같은 여자와 사이좋게 지내는 리에르를 질투했다.
그 탓에 쿠레드는 리에르와 검술 대무 중에 그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마지막엔 가검으로 똥침까지 놓았다.
덕분에 리에르는 한동안 놀림감이 되었다. 그 악연을 계속 이어가서 페이서스 검술대회에서 리에르와 맞붙었다.
하지만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당해 수모를 겪었었다.
이후 벌어진 피의 향연에서 쿠레드는 살아남았다. 그 비극의 중심에 리에르가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그가 아는 리에르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했다.
겨우 자신에게 똥침이나 먹고 울먹거리던 녀석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대륙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는 칠흑의 마왕.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자가 되어 마음껏 대륙을 유린하고 있었다.
쿠레드는 지금 생각하니 오싹했다. 그런 괴물을 상대로 어릴 적 마음껏 때리고 괴롭혔으니 보복이라도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아니에요, 진짜 근무시간이라 이제 가봐야 합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다음엔 같이 식사하자꾸나.”
“오지 마라.”
친절하고 불친절한 답변을 동시에 들으며 쿠레드는 겸연쩍게 인사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페이서스는 7년 전에 피의 향연을 겪고서 복구를 거듭했다. 제법 살 만해지긴 했지만, 아직 예전보다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상가가 다시 들어섰고, 사람들이 다시 들어섰다.
고향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페이서스로 돌아와 새로운 터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픈 상처를 지워내지 못한 이들은 누구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
쿠레드는 그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학생이었다. 학교를 강제 졸업하고 다른 영주의 병사로서 취업을 해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어디에도 기사로 받아줄 곳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쿠레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숫자가 부족한 자경단의 일원이 되어서 일한 지도 벌써 5년이었다.
이제는 제법 고참 격이 된 쿠레드는 나날이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는 페이서스를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아직 마을을 순찰하거나 지킬 인원들이 극히 부족했다.
지금이야 적당히 치안을 지키면 되지만, 다시 한번 예전과 같은 비극이 벌어진다면 막을 사람이 없었다.
쿠레드는 로이스타를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잔뜩 고민하면서 걸어왔다.
“아니, 저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냥 이 도시를 뜨는 게 답이지 싶다.”
쿠레드는 생각에 잠겨 걷다가 부산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틈을 파고들었다.
“이게 다 뭐야……!”
쿠레드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보는 순간 동공이 흔들렸다.
평소와 같은 광장이 아니었다. 광장 가운데에 복원된 분수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의 분수는 뭔가가 확실히 달랐다.
잘 익은 벼 이삭의 색을 닮은 황금빛 물결이 쏟아졌다.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낙하하는 황금빛 물결은 사방으로 튀었다. 튄 곳은 전부 황금색으로 색칠이 되었다.
절대 닦이지도, 마르지도 않았다. 넘쳐흐르는 금색 물길에 사람들은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
그때 누군가가 하늘을 보며 의문 섞인 소리를 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거대한 새가 날고 있었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새였다. 수십여 마리는 됨직한 거대한 것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온다.
쿠레드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7년 전에 보았던 그것을 떠올리자 전신이 떨려왔다.
쿠레드뿐이 아니었다. 그 비극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하강하는 거대한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와이번.’
드래곤과 외견이 닮은 파충류. 드래곤보다는 작고 약하지만, 지성이 있었고 인간의 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상위 포식자였다.
“도, 도망쳐……!”
누군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7년 전에 그 비극을 겪고도 다시 고향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한 번 있던 일이 다시 재발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간과하고 있던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듯이 와이번들이 일제히 애시드 브레스를 뿜어냈다.
쐐기형 독무가 일제히 광장의 사람들에게 쏟아졌다. 비명이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게 울렸다.
쿠레드는 용감하게 칼을 뽑았다. 하지만 제대로 쥐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흔들렸다. 제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7년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7년 전에도 광장에 와이번 세 마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사람들의 비명이 온갖 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곳은 살아 있는 지옥이었고, 와이번들의 식탁이나 다를 바 없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놀라운 것을 보았다.
자신의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검 한 자루를 들고서 와이번과 대적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소년은 용기를 내어 칼을 휘둘렀다. 결국, 소년은 와이번을 도려내고 전투에서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