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84)
레필리아 레소드-384화(384/398)
레필리아 레소드 384화
절망 속으로(7)
테헤라자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한 시간 내에 우승자가 나오지 않으면 전부 폐기처분 결정. 그 정도 힘도, 여력도 없이 패왕이 되겠다는 것은 이미 자격조건 미달이 아닐까? 자, 막무가내로 시작해 줄래?”
테헤라자드는 즐거운 듯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모두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들은 왕국에 창궐한 몬스터들을 토벌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에 갇혀, 서로 죽고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작은 꼬마에게.
당연히 어느 군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확인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테헤라자드는 다소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활짝 웃으면서 소리쳤다.
“X발, 그럼 이렇게 해! 무작위로 왕국 하나씩 전염시켜 줄게!”
그렇게 말하며 테헤라자드는 손을 하늘 위로 뻗어 보였다. 그 행위와 함께 루나레이크에 검은 안개가 감싸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안개에 당황한 기사들이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들이 가는 곳은 온통 안개로 가득했다.
몇 분 후에, 기사들이 무의미한 저항을 멈췄다.
루나레이크의 기사들은 안개에서 벗어나자마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로빈타 왕국을 향해 진격했다.
갑자기 이성을 잃고서 달려드는 루나레이크를 보고 로빈타는 일단 회군을 시도했다. 하지만 갑자기 돌격을 해오는 쪽과 갑자기 회피하려는 쪽은 차이가 있었다.
로빈타는 루나레이크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그것을 보고서 유트는 페리안의 기사들을 이끌고 로빈타를 지원하려 했다.
“아저씨 생각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아로운의 말에 유트가 멈칫했다. 그의 옆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은 루카스 왕국이었다.
당장 공격을 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 빈틈이 생기면 공격해 올 생각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마지막에는 잠시 손을 잡았지만, 애초에 루카스는 적이었죠.”
유트는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루카스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장 거창은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언제든 적을 향해 돌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싸움은 끝이 없어.’
지금은 불필요한 싸움을 할 시간이 없었다. 테헤라자드는 그저 상황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군대끼리 싸워서 이긴다고 해도 피해가 생겼다.
‘대략적인 군세는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피해가 중첩되면 결국엔 패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마지막에 남는다고 해도, 혹시나 모를 전투에 대비하자면 최대한 병력을 온전히 둬야만 했다. 그저 악독한 괴롭힘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럴 때 리즈가 있었다면.’
유트는 지금은 곁에 없는 리즈의 존재가 아쉬웠다. 지금처럼 어려울 때는 항상 그의 지혜가 빛을 발했었다.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랄랄라~!”
테헤라자드는 기분 좋은 듯이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양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은돌이는 과연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유트를 외통수에 몰아넣었다.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곧바로 테헤라자드가 만들어둔 천사 50마리를 상대해야 했다.
혹시나 이럴 때가 있을까 봐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소중한 인형들이었다.
“아악, 흰둥이도 위기의 순가아아안~!”
테헤라자드는 머리를 쥐어짜며 절망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러고는 샐쭉 웃어 보였다.
엘 파실드가 카르샤의 일방적인 공격을 받으며 도망치고 있었다. 계속 설득을 하려 하지만, 카르샤의 결심은 굳어진 상태였다.
“전부 개판, 다 죽어! 옳지, 옳지!”
테헤라자드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이제 슬슬 이런 장난도 마지막이었다.
황금의 샘을 향해 어둠의 숲과 몬스터들이 진군하고 있었다. 곧 이 도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절망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테헤라자드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테헤라자드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삭.
시원하게 한 입 베어 물은 빨간 사과에서 향기로운 단맛이 풍겼다. 그것을 베어 물은 청년은 기분 좋은 듯이 눈을 여미었다.
온통 백색으로 칠한듯한 청년이었다. 흰 머리, 흰 제복, 흰 피부. 시선을 조금만 흐려도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것 같은 사람이었다.
수십 년째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아세튼은 안경을 닦았다. 그리고 앞에 있는 손님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괏값을 지불할 수 있을 나이구나.”
* * *
-우리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 한다…….
벌써 7년 이상 듣는 망자들의 소리였다. 눈을 감기만 하면 찾아오는 망자들은 애통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원…… 한다.
내 목숨을 원할 테지.
청년은 비릿하게 조소했다. 항상 시끄럽게 구는 덕분에 선잠밖에 자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위험을 잘 감지하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항상 날카로운 상태였기에 정신건강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망자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의 퀭한 눈에서는 애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망막 없는 허무한 검은 허공이 원망하듯이 바라본다.
“소원대로다.”
검은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같은 망자니 멋대로 해.”
망령들이 청년의 발을 붙들었다. 망자들의 손길이 몸 곳곳을 붙들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에서 끝났을 꿈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죽음의 그림자를 뒤집어쓴 이상, 그럴 자유는 없었다.
이제는 깨어나지 않는 나날의 계속이었다.
청년은 눈을 감았다.
“바보 원숭이.”
“…….”
리에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가를 열었다. 시커먼 어둠의 공간 속에서 망령들의 손길만 닿는 곳이었다.
그런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여성의 맑은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익숙한 호칭,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톤. 듣기만 해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표정.”
시커먼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이 있었다. 은발로 밝게 빛나는 여성은 코끝을 찡긋거리며 조소하고 있었다.
“유이…….”
꿈이 분명했다. 아직도 주변에는 망령들의 손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 속에서 단 하나의 밝은 빛은 눈을 아리게 만들었다.
뚝.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다.
“넌 정말로 바보야.”
유이 페브리안, 은발의 사랑스러운 여성이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의 도움이 되지 못해서.”
검은 청년, 리에르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남성이 서 있었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던 형이었다.
스스로 부족한 형이라고, 동생을 도와주지 못해 속이 상한다고 말했던 바보 같은 형이었다.
“형…….”
리에르의 볼이 적셔졌다. 턱에 맺힌 눈물을 굳이 닦아내지 않았다.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팠다.
“네놈은 죽음이 속죄라고 생각하나.”
짧은 머리카락의 뱁새눈을 한 남성이 힐난했다. 로빈타 왕국의 마지막 순백의 기사였던 피스 메이커였다.
“네놈은 죽음으로 방관했다. 죽음을 통해 회피했다. 죽음으로 인해 외면했다. 네놈이 바로 이 모든 것의 악이다!”
피스는 리에르를 향해 검지를 들며 소리쳤다. 공허한 울림 속에 리에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달콤한 변명을 하더라도, 자네가 한 것은 모두 죄악.”
중후한 노인이 테이블이 있는 의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그의 반대편에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중년 여성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한심한 남자로군.”
그때 비릿한 웃음을 짓는 남성이 거대한 양손검을 들쳐메고서 걸어왔다.
“크큭, 약육강식의 세계다. 신경 써서 좋을 것은 없지.”
엘빈 트위아. 팔검의 기사 대장이었던 인물이었다.
하나둘씩 리에르에게 죽은 이들이 나타났다. 일개 병사들부터 시작해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까지.
리에르의 귀에 왱왱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어지러웠다. 그대로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것들을 뱉어냈다.
심하게 구역질이 났다. 역겨웠다.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도 소리쳤다. 대장을 구해달라고.”
일찍이 구 7검 기사단이었던 인물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리에르를 힐난했다. 리에르는 귀를 막았다. 그저 영원한 안식을 원했다.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은 죄가 컸고, 씻어낼 수도 없었다. 적어도 가치 있는 죽음을 위해 움직였다.
-우리는 구원을 원한다.
리에르는 두 눈가를 열어 보였다. 끊겨서 들려오던 망령들의 저주가 분명히 들려왔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 주길 원한다.
-우리는 시스템의 변경을 원한다.
-우리는 네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
리에르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망령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리에르를 원망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따로 존재했다.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해 주길 원한다. 오로지 너만이 가능한 일이기에.
망자들의 끔찍한 저주 같았던 목소리들이 지금은 고통스러워하는 불쌍한 이들의 흐느낌으로 들려왔다.
그들은 대답조차 해주지 않는 리에르에게 끝없이 구원을 원하고 있었다.
“1대 테헤라자드인 리엘 군만 가능한 일이겠죠.”
리에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마도사. 리즈 지센라이드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당신이 왜…….”
이 공간은 죽은 이들의 요람이었다. 리즈는 빙긋이 미소로 답해보였다.
리에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유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리즈가 여기에 왔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알겠나요?
“뭘?”
리에르의 모르겠다는 얼굴.
“당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
리즈의 말에 리에르는 잠시 입술을 닫았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 그리고 자신의 정체.
“그래.”
리에르는 이제 확실하게 모든 것을 기억했다. 지금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고 있는 테헤라자드는 진짜 테헤라자드가 아니었다.
지금의 테헤라자드는 태초에 자신의 곁을 지켰던 하와였다.
“알고 있어.”
리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진짜 테헤라자드였다. 이 세상을 조종하고, 이 세상의 시스템을 운영하던 인물이었다.
즉, 이 모든 비극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균열을 자신이 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하와는 항상 자상한 자드와 함께이고 싶었다. 낙원에서 그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 그저 기뻤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그의 얼굴도, 자상하게 안아주는 그의 품도.
하지만 테헤라자드는 그렇지 않았다. 하와에게는 오로지 그만 존재하면 됐다.
그러나 테헤라자드는 지상의 인간들에게 관심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