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85)
레필리아 레소드-385화(385/398)
레필리아 레소드 385화
순백의 리에르(1)
하와는 반대했다. 하지만 자드는 결행하려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대립하였다.
하와와 테헤라자드는 내기했다. 알량한 유일신의 힘 없이도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지.
하와는 혼자 남았다. 다시 그가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생까지 했다. 그는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하와는 미쳐갔다.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만을 바라보던 존재가 사라졌다. 이미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그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다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리에르는 눈물을 토해냈다. 모든 것의 시작이 자신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과 싸우고 있었다.
“당신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리즈가 말했다. 리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원해요.”
바닥에서 올라오는 망자들의 손길. 그것은 리에르를 지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올려보내기 위한 행위였다.
“리에르 아르빈트가 아닌, 첫 번째 테헤라자드로서 이 균열을 메워달라는 거예요.”
리즈의 말에 리에르는 눈을 감아 내렸다. 자신에겐 아무런 자격이 없었다. 그저 달콤한 죽음만을 원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다음 생에서 또다시 기억을 잃고.
“리엘…….”
부드럽고도 온화한 목소리.
“힘들었지?”
리에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나 바라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따뜻하게 뒤에서 안아주는 그녀의 품이 눈물을 불러일으켰다.
“난 예전의 너를 몰라. 하지만…….”
그녀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바보 같을 정도로 순박했던 소꿉친구였다. 성인이 되었어도 자신이 만들어 낸 죄의 무게에 짓눌려 버린 남자.
“널 믿어, 리엘.”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이었다. 리에르는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이미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모든 것을 되돌릴 힘이 있다면. 할 수 있다면 멈추지 않고 싶었다.
“그래.”
리에르는 눈물로 범벅이 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안아주던 금발의 에레사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지켜보던 리즈도, 바라보던 유이도. 비난하던 망자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망자들의 뼈와 시체가 바닥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리에르의 발밑을 언덕처럼 쌓아 올라갔다.
시체로 만들어진 언덕이 까마득한 천장으로 향했다.
리에르는 그것을 올라갔다. 걷다가 힘이 들면 기었다. 기다가 힘이 들면 드러누웠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환한 빛이 주변을 감싼다. 여미어졌던 눈가를 열었을 때는 무덤을 나온 뒤였다.
유트가 친구를 위해 만들어주었던 무덤은 전부 파헤쳐져 있는 상태였다.
리에르는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마치 유체처럼 흐릿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한 순백으로 칠해지고 있었다.
리에르의 검은 머리카락은 백색으로 탈색되어 있었다.
리에르는 천천히 입가에 처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죽은 몸에 다시 한번 깃들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죽였던 망령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던 망령들이 전부 힘을 합해 단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어……? 어……!
무덤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에르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름답고도 투명한 검신을 가진 무기가 있었다.
“아르미안.”
-리…… 엘……?
아르미안의 검신이 웅웅, 하는 소리를 내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리에르였다.
그는 분명히 죽었다. 그리고 자신도 저주받은 삶을 마무리하기 위해 옆에서 잠들었었다.
-꿈……?
아르미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에르가 살아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지금의 리에르는 칠흑으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한 백색으로 보였다.
아니, 그의 뒤에서 밝은 후광까지 비치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기적이 벌어졌어.”
신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니었다. 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 그야말로 기적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아르미안, 부탁이 있어.”
리에르는 제자리에 앉아서 아르미안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제 검으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시작과 같은 모습이었다.
-말하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를 도와줘.”
리에르는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맑은 눈동자를 보자 아르미안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주는 확실히 저주였다. 죽음도 벗어날 수 없었다.
-얼마든지.
리에르의 손이 아르미안의 검자루를 쥐었다. 아르미안은 사용자와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기적이구나.
아르미안은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죽고, 찢어지고, 상처받아도 일어났다. 마지막이 되어서도 마지막이 아니라는 듯이.
“응.”
리에르는 눈가를 여미었다. 불길한 붉은 하늘. 그 위에 떠 있는 붉은 달.
이미 태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붉은 구름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세상에는 지금 붉은 비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황금의 샘으로 가자.”
-어디든지.
리에르는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주변의 나무들보다 한참 높이 올라간 리에르는 어둠의 숲들이 창궐한 모습을 보았다.
세상은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어둠의 숲은 대지를 모두 집어삼키고 있었다.
파핫!
리에르는 공중에서 튕기듯이 날아갔다. 마치 과녁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순백의 궤적을 길게 늘어뜨렸다.
순백의 날개 네 장이 밝은 빛을 뿜어내며 펼쳐졌다.
순식간에 지상의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 엄청난 속도에 아르미안조차 위치가 어디인지 인지 못 할 정도였다.
갑자기 리에르는 날개를 꺼뜨리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쾅!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거대한 몬스터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들이 식탁 위에 올라온 식사라도 되는 양. 그것을 보고 리에르는 아르미안을 고쳐 잡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서걱.
깨끗하게 도려졌다. 리에르가 지나가는 곳의 몬스터들은 전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목과 몸이 잘려 나갔다.
구해진 인간들은 순백으로 빛나는 청년을 보면서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백으로 물든 리에르는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전부 삭제시키며 전진했다. 너무나 빠르고 강력한 공격에 몬스터들은 제대로 된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핏물이 튀어도 옷에는 묻지 않았다. 그저 순백을 간직한 채로 베고, 또 베어냈다.
사람들은 마치 구세주를 보는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순백의 날개를 달고서 괴물들을 제거하는 모습은 구세주라고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적에 감사하며, 환호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멈춰 서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안에 있는, 자신을 깨워준 망자들에 대한 예우였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그들이 바라왔던 것. 그들이 하지 못한 것들을 최소한으로 만족시켰다.
리에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서스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페이서스는 가슴 한구석을 아리게 만들었다.
거의 폐허처럼 변했던 도시는 복원을 통해 옛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필 그런 상황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숲은 페이서스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이 안에 들어갈 수도, 이 밖을 나올 수도 없도록.
하지만 리에르는 그곳을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검은 숲의 삼자갈나무는 기괴하게 꺾인 나뭇가지를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리에르의 몸에 닿기도 전에 으스러졌다. 리에르는 가볍게 검을 허공에 그어 내렸다.
풍압만으로도 삼자갈나무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멋모르고 달려드는 삼자갈나무 열매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증발했다.
트리글로다이트는 용맹하게 전투 준비를 했다. 녹슨 창을 갈고 닦아, 적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투척했다.
리에르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풍압으로 튕겨 나간 창은 투척자에게 되돌아가 비명만을 토해내게 했다.
백화요란(百花燎亂).
리에르가 걸어나갈 때마다 주변에 있던 괴물들이 썰리고, 부서져 나갔다. 그저 편안히 걷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조용했다.
리에르가 무너진 페이서스 성문으로 들어갈 때는 검은 숲의 괴물들은 누구 하나 남지 못하고 전멸한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온통 핏빛으로 가득했다. 건물이며 도로며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익숙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곳의 풍경이 여전하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리에르는 황금의 샘을 향해 걸어나갔다. 붉은 하늘에 솟아오른 황금빛 물결은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했다.
리에르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낯익은 골목이었다. 항상 에레사와 함께 걷던 그 길.
카에르로 향하는 길목의 그리움이 물씬 일어났다. 그곳을 걸어가면 생선가게가 있었다.
항상 모친 라일라의 정보망이었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이 난리가 나서인지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리에르는 조소했다. 안경을 쓴 중년의 부인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수십여 년간 과일가게를 열었던 여성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반가움이 물씬 올라왔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무사한 것을 보니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아세튼 아줌마는 이제 할머니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나이 들어 보였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지금 한창 난리가 나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마음 편하게 졸고 앉아 있었다.
리에르는 진열된 사과 한 알을 쥐었다.
“손님이 오면 일어나야죠.”
리에르의 말에 아세튼은 흠칫하면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안경을 고쳐잡으며 리에르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투덜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손님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단다.”
아삭.
사과를 한 입 깨무니 흰 속살이 드러났다. 향긋한 과즙이 터져 나오며 입안을 적셨다. 여전히 기분 좋은 맛이었다.
“그럼 이건요?”
리에르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세튼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항상 이자 대신에 미움을 받는 꼬마지.”
“꼬마요?”
“내겐 아직도 코흘리개 꼬마로 보이는구나.”
아세튼의 대답에 리에르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실제 나이 차이를 보면 그녀에게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것이 아니라 해도 자신은 제대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어설픈 꼬마에 불과했다.
“맞아요. 아직 꼬마죠.”
태초가 생겨날 때부터 존재했다. 이 세상의 기원을 보았다. 삼라만상이 움직이고, 생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와이번들이 지상에 착륙해서 도망가는 인간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쿵쿵쿵.
놈들은 마치 사냥개가 된 기분으로 맛있는 사냥감들을 가지고 놀았다. 이미 배는 양껏 채운 상태였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애송이에 불과하죠.”
리에르는 씁쓸하게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리에르의 모습은 잔영만이 남았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와이번의 앞에 나타났다.
놈은 이제 막 여자아이의 부드러운 속살을 씹어 먹기 위해 부리를 들고 있었다.
서걱!
와이번의 목에 혈선이 그어졌다. 거대한 전투 도끼로 내려쳐도 잘리지 않을 목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깨끗한 단면으로 미끄러지는 머리통. 그것은 잠시 허공에 부유하는 듯하더니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사과 한 알 먹었으니, 다시 힘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