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86)
레필리아 레소드-386화(386/398)
레필리아 레소드 386화
순백의 리에르(2)
리에르는 지금까지 지상을 날뛰며 인간을 사냥하던 와이번들을 전부 급습했다. 녀석들은 처음에는 공중에 부유한 상태에서 적진을 살폈다.
그리고 사냥감들을 향해 돌격해서 낚아챈 뒤에 식사를 즐겼다.
와이번은 페이서스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위협하지 못한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갑자기 튀어나온 인간은 한 합에 모든 동료를 즉사시켰다.
와이번은 다급하게 날갯짓하며 일어섰다. 하지만 백색의 인간은 잔영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그 인간의 모습을 찾았을 때는 이미 목이 잘려 나간 이후였다.
“리, 리에르?”
리에르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 시선을 내려뜨렸다.
바로 앞에 와이번에게 공격받던 남자였다. 마치 멧돼지처럼 생긴 남성은 눈물, 콧물을 짜내면서 떨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안겨져 있었다.
“쿠레드?”
리에르는 설마 하고 입을 열었다. 자신의 기억에는 멧돼지같이 생긴 남성, 그리고 마을의 자경단 조끼를 입을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리, 리에르 맞지? 어?”
쿠레드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듯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리에르가 깨끗하게 도려낸 와이번들을 향했다.
인간의 솜씨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 또 똥침이라도 먹이게?”
“헙.”
리에르가 그 말을 꺼내자 쿠레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칠흑의 마왕, 대륙의 학살자라고 불리는 옛 학우가 복수하겠다고 나서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소문으로 들은 리에르는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쿠레드는 다급하게 자신의 유언들을 떠올렸다.
“쿠레드, 일어나.”
“어, 어.”
쿠레드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리에르를 보고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쿠레드는 일어나서 리에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쿠레드는 살집이 있었지만, 워낙 키가 컸으니 나름 보통 체형으로 보였다.
리에르는 슬림한 체형으로 보이지만 옷 안에는 잘 단련된 근육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같은 키를 지니고서, 잘생긴 마스크로 바뀌어 있었다.
새삼스럽게 세월을 느끼며 쿠레드는 분한 마음이 일었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나 찌질하던 녀석이 이렇게 바뀌어 있을지는 예상치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리에르는 굉장히 깨끗한 순백의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런 살육의 현장에서는 어울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잘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친구 찾으러.”
쿠레드는 리에르의 말에 대번 유트를 떠올렸다.
유트와 리에르에 관한 이야기는 페이서스 동창회에서는 항상 화젯거리였다. 아니, 굳이 같이 공부했던 학우들이 아니더라도 그러했다.
대륙의 패왕으로서 군림하는 유트. 혹시나 그에게서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다시 검을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이 공부했던 학급 친구 두 명이 서로 대륙의 양대산맥이었다. 가십거리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경단 옷이 잘 어울린다.”
리에르의 말에 쿠레드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주변이 조용하자 쿠레드의 품 안에 있던 소녀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자아이는 온통 순백으로 물들어 있는 리에르를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천사님…….”
아이는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수줍게 중얼거렸다. 쿠레드는 대번 웃음이 튀어나오며 이 자식은 그딴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진 못했다. 죽을까 봐서가 아니었다.
쿠레드의 눈에도 리에르의 뒤에서 비치는 후광이 보였다. 눈의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쿠레드는 방금 리에르와 악수했던 손의 감각을 다시 떠올렸다.
“너, 혹시……. 무슨 일 있는 거냐?”
쿠레드는 자신이 듣던 소문과 리에르가 딴판이라고 느꼈다. 스스로 악이며, 어둠이라고 규정하는 듯한 칠흑에서 순백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표정도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사실 나 죽었어.”
“어?”
쿠레드는 리에르의 어이없는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지금 너는 뭔데. 라고 물으려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났다.
머리에 뿔이 달린 거인이었다. 청 푸른 몸을 가진 거인은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서 리에르를 내려찍었다.
쿠레드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비명조차 지르지도 못했다. 눈을 질끈 감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시 후 느껴질 엄청난 충격에 대비해서 각오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것이 이상해서 쿠레드는 살며시 눈가를 열어 보였다.
거인의 큰 팔은 이미 잘려 나갔다. 뿐만이 아니라 이미 목이 잘려서 뒤로 넘어가 있었다.
큰 덩치답게 쏟아지는 핏물도 홍수를 연상시켰다.
“더 대화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일단 피해 있어.”
“넌……?”
쿠레드의 말에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몸이 사라지기 전에 할 수 있는 만큼 해봐야지.”
쿠레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리에르는 등을 돌렸다.
“아, 아세튼 아줌마도 대피 좀 시켜줘라. 그 아줌마 가게에서 졸고 있어.”
리에르는 쿠레드의 뒤편에 있는 과일가게를 가리킨 뒤에 사라졌다. 삽시간에 건너편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리에르를 보며 쿠레드는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우리 동창들, 모이기만 하면 유트랑 네 얘기를 해! 너희는 우리의 자랑이야!”
“푸하!”
리에르는 멀리서도 그 말을 들었는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유트는 분명 훌륭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끝없는 악행을 펼친 자신에 대한 용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짓말이 너무 티 나잖냐.”
리에르는 힐트를 고쳐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고마워.”
리에르는 제자리서 높이 뛰어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 있었던 집은 순식간에 점처럼 작게 보였다.
한눈에 보이는 페이서스의 모습을 보니 사방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트가 보이지 않아.”
-그럴 리가.
리에르의 말을 아르미안이 받았다. 유트가 없을 리는 없다. 황금의 샘이 솟아나는 곳에 결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낯익은 인물이 있었다.
“테헤라자드.”
유일신 테헤라자드가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엘과 유트를 결계 속에 가둬놓고서 신나게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의 시야에 순백색의 빛의 꼬리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테헤라자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순백의 인영이 솟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것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헤라자드는 지금 더 이상 신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저것에 대한 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테헤라자드는 손을 뻗었다. 그녀 주변의 바닥이 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하나둘 생성되는 마법진에서 천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미리 만들어 두었던 레벨 3 형태의 천사 오십 마리였다. 한 마리여도 능히 기사 백 명은 상대할 수 있는 괴물들이었다.
“죽여.”
테헤라자드의 조그만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천사들의 입이 말벌의 턱처럼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허리에서는 한 쌍의 팔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흰 날개를 말벌처럼 펼치더니 침입자를 향해 창을 들며 날아올랐다.
리에르는 천천히 검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순백의 검광이 검 끝에 이글거린다.
-그러고 보니, 레필리아 레소드는 너의 검술이구나.
아르미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그가 레필리아 레소드를 순식간에 습득한 것도, 단순히 석셔너의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엘프 최초의 기사 리안덴은 유년 시절 아리아를 보았다. 그가 가진 유려한 검술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직접 아리아에게 검술을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아리아는 검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의 검술은 인간이 사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리안덴은 그것을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형했다. 그것이 레필리아 레소드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것 같아.
아르미안의 중얼거림. 리에르는 조소하며 받았다.
“그렇지도 않아. 모든 검술은 나에게서 나왔지만, 완벽하지는 않았으니까.”
리에르의 온화한 말에 아르미안은 잠시 말을 잊었다. 계속 이상하기는 했지만, 지금 대화하는 리에르는 너무나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각성 전의 리에르도, 각성 후의 리에르도 아니었다.
리에르는 눈을 감았다.
수십여 개의 악의가 화살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이 일대에 펼쳐진 결계가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하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리에르는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푸른빛 이채가 서려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리에르는 양손으로 검을 말아쥐고서 오른쪽 어깨 위로 곧추세웠다.
레필리아 레소드 원식(原式) 페이즈(Phase).
리에르의 검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검 끝을 타고서 푸른 마력들이 잔상을 일으켰다.
일섬(一殲) 월광(月光) 참수(斬首) 베기.
검의 진형(陣形)을 끝내며 베어낸다. 푸른 검기가 사방에서 날아드는 천사들을 향해 번뜩였다.
테헤라자드는 검이 그어질 때마다 푸른 반원 형태의 검기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레벨 3이나 되는 변형 천사들이 삽시간에 잘려 나갔다.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져가는 천사들을 보며 테헤라자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의 자드!”
테헤라자드의 눈이 일그러지듯이 웃음을 그렸다.
리에르는 열 마리의 천사를 동시에 베어냈다. 하지만 아직 마흔 마리나 남은 상태였다. 놈들은 바로 직전에 본 검격에 위협을 느끼고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에 마력을 듬뿍 담은 창을 그대로 투척했다. 마치 미사일처럼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창격들을 보며 리에르는 몸을 비틀었다.
후우욱!
창격이 일으킨 바람만으로도 옷자락이 찢겨 나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말벌 주둥이 같은 턱을 달고 있는 붉은 천사들이 웃음을 흉내 냈다.
‘다음 호흡까지 시간이 부족해.’
리에르는 놈들의 창격을 막아내거나, 비껴내 가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에르가 테헤라자드로서 만들어낸 생명체는 인간이었다. 실패한 유사인종은 하와가 만들어냈다. 이런 천사나, 몬스터도 전부 하와가 창조한 생명체들이었다.
“리에르으으으으으 군?”
갑자기 리에르의 뒤쪽으로 섬광이 번뜩였다.
“살아 있다?”
리에르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옆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제자리에서 튕기듯이 회피한 리에르는 황금빛 검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치이익!
불똥이 튀었다. 리에르는 가까스로 공격을 막았지만, 상대의 말도 안 되는 신력에 당황스러움을 가졌다.
“살아 있네? 어? 살아 있었어어어?”
티미는 몸을 기괴하게 틀면서 폭소했다. 그의 한쪽 날개는 무언가에 의해 찢겨 나가 있었다.
티미는 엉망진창의 몸이었다. 하지만 마력만은 말도 안 될 정도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정상적인 마력은 날개의 빛과 크기로 발전한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마력이 부풀려진 티미의 날개는 이미 찢겨 나가 있었다.
“자? 에레사를 걸고 승부다?”
티미가 한쪽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이미 눈 하나는 재생도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는지 검은 구멍에 핏기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