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392)
레필리아 레소드-392화(392/398)
레필리아 레소드 392화
EP5 이상한 나라의 리에르(1)
이것이 마지막 전투다!
리에르는 칠흑이 새겨진 아르카이제를 들어 어깨와 수평이 되도록 들어 올렸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싸움이었다.
목숨을 걸리라!
리에르는 스스로의 무거운 죄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것을 짊어지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죄는 깊어져만 갔다. 유일하게 그것을 갚아낼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정의를 관철하고 죽는다!
리에르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최후의 적을 쓰러뜨릴 생각이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죽음이라 해도 달콤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두려운 것은 없었다.
리에르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의 뒤에서 펄럭이는 빛의 날개는 점점 깊이를 더해갔다. 그의 앞을 가로막던 적들은 감히 마왕을 가로막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홍수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이듯이 하나둘 그의 앞에 길을 트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다시 한 발 내디뎠다.
이 걸음 이후로 되돌아올 수 없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가 안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는 몸이 되리라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었다.
리에르는 두 눈을 지그시 여미었다. 소중한 가족들과 지인들을 떠올렸다. 마지막에라도 그들을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큰 욕심이 생겨났다.
아니, 이게 끝이야!
리에르는 이제 앞을 향해 달렸다. 칠흑으로 휘감긴 돌진을 그 누구나 감히 막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최후의 적은 리에르의 돌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번쩍!
시커먼 어둠이 지나는가 싶더니 새하얀 광휘가 모든 것을 휘감았다. 리에르는 두 눈을 여미고서 감각이 되살아나길 기다렸다.
갑자기 밝은 빛을 본 탓에 리에르의 시력은 그 기능을 잃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리에르는 천천히 눈가를 열었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새하얀 빛이 리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뒤로 껑충 뛰어 보였다.
“이 병X X끼야, 죽고 싶어!”
갑자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더니 욕설을 하고 사라졌다. 리에르는 조금 전만 해도 쿵쾅거리던 심장을 안정시키며 상황 파악을 하려 애썼다.
주변의 공기는 굉장히 매캐했다. 무엇보다 사방에서 자잘한 소음들이 잔뜩 울려대고 있었기에 리에르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여긴…….”
시커먼 밤의 하늘. 어두운 별빛은 리에르가 알고 있던 맑은 하늘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언가 알지 못할 이질감에 리에르는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굉장히 낯선 구조의 도시였다. 굉장히 높다란 탑들로 우거진 건물로 이루어진 숲.
밤하늘에만 떠 있어야 할 별빛이 도심의 건물에 새겨져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건물들 속으로 성냥갑의 성냥개비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의 인영.
무엇보다 방금 보았던 괴물 마차들이 도끼눈 같은 안광을 흩뿌리며 질주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전신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종합해 봤을 때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단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 * *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오자 붉은 머리카락의 남성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붉은 머리인 것은 불량해 보이기 때문에 손님들에게 큰 위화감을 줄 수 있었다.
“4,500원입니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붉은 머리카락의 남성은 익숙하게 카드를 받아 단말기에 마그네틱을 긁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신호가 화폐를 측정하여 정보를 전송한다.
그런데도 붉은 머리 남성이 편의점에서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존재했다.
첫 번째로는 그가 편의점의 사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알바생을 쓰든지, 근태 시간을 조절하든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그는 철저하게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고 희롱하고 이용하는 것에 능숙했다. 이전에 그는 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사 직원에게 불량스러워 보인다. 무직으로 보인다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듣고서 잘라내야만 했다.
하지만 의외로 긴 머리카락을 잘라내자 그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매우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은 그를 보는 여성으로 하여금 황홀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붉은 머리카락에도 불구하고 이상 없이 편의점을 운영할 수 있었다. 물론 인상을 더욱 부드럽게 보이게 하려고 반강제로 안경을 쓰게 되었다.
그의 안경까지 쓴 모습을 보고 본사 여직원은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몇 번인가 사진을 찍어대고는 다음 교육 때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물론 그녀는 매일 같이 붉은 남성을 보러왔다.
잘생긴 얼굴과 성실함. 그리고 친절한 마인드 덕분에 붉은 남성의 편의점은 매우 장사가 잘되고 있었다.
그는 계산을 마치고는 손님들이 채워둔 쓰레기통의 봉지를 걷어내 입구를 묶었다.
마침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편의점 문을 열자 두 명의 여성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붉은 남성은 단련된 고객 대응용 미소를 지으면서 부드럽게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아, 네…….”
두 명의 여성은 붉어진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듯이 서 있었다. 그녀들은 편의점 인근에서 일하는 사무직 여성들이었다.
원래는 인근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곤 했지만, 붉은 남성을 보고는 마치 약속한 듯이 편의점에 커피를 사러 오게 되었다.
“정말 잘생겼다.”
“진짜 내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야.”
그녀들의 작은 속삭임이 붉은 남성에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있어야만 붉은 남성은 매출을 올릴 수 있었고, 먹고 살 수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들은 생계를 책임져 주는 고마운 은인들이나 다름없었다.
“근데 저런 미남이 있는가 하면 저기 냄새 풀풀 나는 거지 같은 애들도 있고 말이지.”
“그러게. 그래도 여기 사장 때문에 눈 정화했으니까 대머리 부장 상대로도 한동안 눈이 썩지 않을 것 같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붉은 남성의 귓가에 여성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녀들의 말마따나 쓰레기 버리는 곳 근처에 걸터앉은 거지가 보였다.
쓰레기에 파리가 날리는지, 그 거지의 주변을 날고 있는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악취가 나는 사내였다.
무엇보다 한동안 굶었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이 곧 죽을 것만 같이 보였다.
붉은 남성은 편의점 안에 들어오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은 행위였다. 하지만 어설픈 도움은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붉은 남성도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저런 비렁뱅이나 다름없었다. 그도 처음 영문도 모르고 이상한 세계에 온 뒤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만 경험하고 절망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명석한 두뇌로 곧 이 세계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금은 스스로 먹고살기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붉은 남성은 이전의 자신이 생각났는지 삼각 주먹밥 두어 개를 들고서 편의점을 나섰다.
역시나 굶주린 젊은 거지는 초췌한 몰골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저기, 유통기한이 지난 거라도 괜찮다면.”
물론 정말 유통기한이 지나진 않았다. 붉은 남성은 한때 본격적인 식당에서 총괄 쉐프로서 일한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먹는 것에 대해선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으뜸으로 여겼다.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음식이라도 시간이 가까워지면 무조건 처분해 버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였다. 고깝게 듣고자 한다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거지는 힘없이 붉은 남성이 건네는 것을 바라보더니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삼각 김밥을 받고서 감동하여 울먹거렸다.
그의 모습을 보며 붉은 남성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따뜻함을 상대에게 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나름의 행복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돌아서려는 남성은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었다.
“리즈……?”
붉은 남성. 아니, 리즈 지센라이드는 자신의 본명을 듣고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리즈는 테헤라자드와의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져 이세계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겨우겨우 이 세상에 적응하면서 다시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한국이라는 곳에 어울리는 이름을 따로 만들었다.
이 준. 리즈의 한국식 이름은 외자였고, 자신의 본명을 아는 이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누…… 구인 걸까요?”
리즈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그는 오랜만에 손끝까지 전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평화로운 세상에 떨어져서 평화의 감수성에 젖어 산 지 오래였었다.
날카로워진 리즈의 눈동자를 받으며 젊은 거지는 울먹거리며 리즈에게 달려들었다.
리즈는 깜짝 놀라 상대방을 가격할 뻔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움직인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상대에겐 전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즈의 감각대로 상대는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리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서 엉엉 울고 있었다.
“나, 이제 굶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응?”
감격스러워서 하는 젊은 거지를 보며 리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보니 그의 외모는 지저분하긴 했지만 낯익었다.
“혹시……. 리엘 군인 건가요?”
젊은 거지는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였다. 리에르도 리즈처럼 이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저 칼질만 할 줄 아는 그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다. 사방은 모르는 건물 천지였고, 사방에선 괴물 마차들이 돌진해댔다.
리에르는 야전에 매우 자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내온 환경과는 아예 다른 세상이다 보니 위화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리에르는 한동안 풀뿌리를 캐 먹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탈진해 버린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리즈를 만났으니 리에르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리엘 군과는 대체 무슨 인연일까요…….”
리즈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올렸다. 원래 세계에서부터 지금까지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만난 두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조차 이렇게 만났다.
그것은 필연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리에르는 리즈 덕분에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그가 준 새로운 옷을 입고 나자 겨우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 준비되었으면 이쪽으로 오세요.”
리즈는 리에르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조끼 하나를 건네주었다. 리에르는 별다른 생각 없이 조끼를 받아 걸쳤다. 초록색과 파란색 줄이 그어진 조끼는 편의점과 대치되는 색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저를 사장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사장님……?”
리에르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리즈는 주입식으로 편의점의 배경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생존 경쟁과 역학적 관계. 아울러 세계의 구도 및 경제 관념을 기본 베이스로 하여 담배의 이름과 가격을 교육받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는 이 장비 하나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스이니 포스기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어? 포스기?”
리에르는 리즈의 설명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고, 토할 것 같은 구토감이 일어났다.
결국, 리즈가 원한 것은 명확했다.
“시간당 500원을 드리겠습니다.”
“그거 뭐야……. 나 일하라고?”
리즈는 일할 사람을 채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리에르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보면 리에르는 원래 세상에서도 반백수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가끔 유트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싸움 같은 것을 했으니 이 세계의 시점으로 보았을 땐 시정잡배나 양아치, 건달에 불과했다.
“다시 우리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기엔 막대한 정보력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마력이 없는 지대라 우리가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것들을 다 충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금력입니다. 이 세상은 돈만 있다면 여자 친구도 생길 만큼 물질 자본주의가 발전된 세상입니다. 당신과 저의 힘으로 자본력을 확충하여 다시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어, 어…….”
리에르는 무슨 말인지는 몰랐으나 지금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은 그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편의점이 우리가 가진 최초의 성입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우리는 전국을 제패하게 될 것입니다.”
“아, 응…….”
리에르는 리즈의 파이팅 넘치는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설득당했다.
“그럼 가게를 부탁합니다.”
“뭐? 갑자기 나 혼자?”
리에르가 당황하자 리즈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곧 선임자가 올 테니 그녀에게 배우면 됩니다.”
리즈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가게 유니폼을 벗어 던지며 밖으로 나갔다. 편의점 밖에는 리즈를 기다리고 있던 괴물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리즈는 겁도 없이 괴물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무서운 폭음을 뿌리며 괴물 마차는 리에르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