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40)
레필리아 레소드-40화(40/398)
레필리아 레소드 40화
슬퍼지려 하기 전에(7)
로이는 친구의 로브만 남은 것을 보고 손을 떨어 보였다.
결국, 로이가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그는 그대로 자기 아들을 향해 검을 내려치려고 했다. 그때 라일라가 급하게 로이를 막아섰다.
“이미 저 아기는……. 포스가 아닌 우리의 아이일 뿐이에요. 오라버니에 의해서 봉인되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라일라는 눈물을 토해냈다.
치월향의 결계.
일찍이 라에룬이 폭룡 네버 에이지를 상대로 저주를 걸었던 힘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제를 잃은 그 날 두 사람은 포스가 봉인된 아기를 얻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기에게 라에룬의 이름을 따서 리에르라고 불렀다.
힘을 봉인 당한 아기는 아이가 되었고, 소년이 되었다. 형과 아버지의 화려한 검술에 매료되어 열심히 따라다니며 검을 단련하였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모든 힘을 봉인 당해 버린 소년은 같은 피를 이었음에도 좀처럼 검술이 늘지 못한다.
힘들어하고 자괴감에 빠져 있어도 라일라는 소년을 다독이면서도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런 힘이 없고 그냥 평범하게만 자라나는 아들을 보면서 안도했다.
이제 검술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렸을 거로 생각했지만 소년은 페이서스 카에르의 검술을 공부했다. 여전히 봉인된 힘으로 인해 소년은 무능력하고 약하기만 했다.
아버지와 형에게 비교되며 사람들의 차디찬 시선을 받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속으로 검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밝았기에 구김살이 없었다.
라일라는 아들이 안타까웠지만, 평생 평범한 아이로 자라나길 소원했다.
부친인 로이 역시 소망은 같았다. 그는 파에트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고 가르쳤지만 둘째, 리에르에게만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책임이자 힘을 갖지 않게 하려던 배려였으나, 아직 나이가 어린 리에르로서는 그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아무리 라일라가 리에르를 다독이고 위로해도 닫히기 시작한 그의 마음은 어두워져 갔다. 그리고 결국 리에르는 개방된 힘을 지니게 되었다.
제이미에게 쫓기는 리에르는 화를 내면서도 공격적인 자세는 취하고 있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구김살 없는 장난꾸러기였다.
창밖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자상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아들 참 착하게 잘 자랐죠. 오라버니…….”
라에룬이 흥,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고 라일라는 리에르의 뒤편에 마나로 이루어진 여성을 보았다.
그녀가 리에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리에르를 향해 온화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저 정체 모를 여성이 있음으로써 리에르가 비극을 겪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 * *
화려한 건물 위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유행을 선도하는 마을 처녀들이 보인다.
남성들은 그러한 처녀들에게 누군가를 닮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허술한 작업을 한다.
일 년 중 커플이 가장 잘 만들어지는 때는 축제였다.
축제에 대한 설렘은 인연이 되어 연인으로 탈바꿈하기엔 적절한 시기였다.
물론 분위기에 편승해야만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지만.
페이서스가 자랑하는 대광장.
이곳은 많은 사람의 동선이 집중되어 있기에 상가와 잡상인들이 많았다.
허술한 마술 연극을 보이면서 수상한 약을 팔아대는 사람들.
축제의 마지막 날, 고조된 분위기를 이용해서 솔로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카에르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노점상들이 이 시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축제에만 찾아드는 떠돌이 행상인들의 신기한 볼거리는 이때만 가능했다. 너무나 평화로운 페이서스의 풍경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리에르는 기지개를 켜면서 양손을 들어 깍지 끼고 몸을 비틀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든 기분이었다.
리에르는 어제 수련을 하지 않고 그냥 마음껏 먹고 푹 잠들었다. 여전한 소파 신세였지만 이제는 그마저 익숙하여 안락함 마저 느꼈다.
리에르는 일어나자마자 뱃속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남자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는 그들의 요청은 너무나도 타당했다.
분명 부엌에는 어제 먹다 남은 음식물들이 있을 터였다.
리에르는 익숙한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남아 있는 음식물들을 보자마자 게 눈 감추듯이 섭취하였다.
리에르가 라일라보다 일찍 일어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항상 리에르를 깨우는 것은 그녀의 일과의 시작이었기에.
리에르는 가장 먼저 일어났다는 자부심에 휩싸였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라일라가 어디 아파서 못 일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리에르는 조심스레 라일라의 방문을 열어 보였다.
라일라는 이제 막 일어났는지 커튼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방을 찾아온 아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켰다.
“어머,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열어젖힌 창문에서 시원하게 붙어오는 아침 바람.
라일라의 어깨까지 닿는 흑색 머리칼이 잔잔하게 부풀어 오른다.
모친 라일라의 반응을 보고 시큰둥한 표정의 리에르가 투덜거렸다.
“현실 도피하지 말고 밥 주라고요.”
“어머, 별일이 다 있구나. 아들이 이 시간에 일어나다니?”
라일라는 정말 놀랍다는 듯이 가슴께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리에르는 흐응,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했다.
“자상한 어머니들의 초상화 같던 분이 이러시면 안 되죠. 이 아들내미가 오늘 역사적인 우승의 날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아니 됩니다.”
“정확히는 유트 군이겠지.”
“헹, 과연 그럴까요? 오늘 이 아들의 활약을 꼭 보러 오시죠.”
리에르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으스댔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라일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꼭 보러 갈 거란다.”
갑자기 자상한 모친의 말에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라일라는 그런 아들의 등을 툭, 치면서 검지를 들어 욕실을 가리켰다.
언제나 아들에게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을 강요하지만, 청개구리 같은 아들은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혼내지는 않는다. 그가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리에르는 라일라가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일단 씻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단 것을 생각했다.
어제 종일 입었던 옷은 땀을 흘린 덕분에 찝찝했다. 무엇보다 이제 결승전을 치러야 하는데 어제 입었던 옷을 또 입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리에르가 섣불리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자신만의 아늑한 공간이었던 방. 그 방은 이미 시건방진 애송이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라일라는 부엌에서 아침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리에르는 그런 모친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이제 이사 갈 때가 되었는지 참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계단도 끼익, 끼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방안에 들어서는데 이렇게 조심히 가야 한다니. 리에르는 새삼스레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 기어이 제이미에게 한 대 맞았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제이미에게 복수하고 싶어졌다.
심술궂게 웃고 있는 리에르를 보고 아르미안이 한마디 내뱉었다.
-어휴, 넌 자다 일어나서 밥 찾더니 이젠 또 장난이니? 기운도 좋다 정말.
리에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껴졌다.
발랄했던 목소리가 축 처진 것을 보니 자다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 이전에 검이 잠을 잔다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리에르는 예전에도 그녀에게 궁금증을 물었지만 빈정거림만 잔뜩 들었었다.
문득 리에르는 아르미안이 인간형으로 나타나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각났다. 아무리 현실 세계가 아닌 이공간이었지만.
“근데 정말 정체가 뭐예요”
리에르는 방문을 열기 전 짚고 넘어가고 싶다는 듯이 물었다.
-인간에게 기생해서 마나를 빨아먹는 마녀라고 해두지.
“그거참 다행이군요.”
리에르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었다. 자기 방을 열면서 끼이익, 하는 문소리도 조심해야 하는 처지가 정말 싫었다. 이것은 청년에 대한 질책이며 시련이었다.
모친 라일라의 권력 구조 아래 힘없고 가녀린 자신이 당하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웬일로 오늘은 일어나 있냐?”
제이미는 오늘도 징그럽게 긴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정말 근육 하나 제대로 붙지 않은 말라빠진 몸뚱이였다.
‘저런 몸이니 기운이 없지.’
검을 한다는 녀석이 근력 수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제이미는 갑자기 리에르가 들어온 것을 보고 당황했다.
“네, 네 녀석은!”
그녀는 무슨 소설책에서 나오는 철없는 악당 같은 대사를 외쳤다.
자신의 몸을 이불보로 감싸며 씩씩거리는 제이미의 모습을 보며 리에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 남의 방에 막 들어오다니!”
“원래 내 방입니다요.”
“나, 나가줘!”
“옷 좀 갈아입고.”
제이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는지 데친 문어 같은 얼굴이 되었다.
리에르는 자신의 윗옷을 벗었다. 제이미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뭐야, 이 녀석.’
리에르는 대충 윗옷을 걸치고, 바지도 갈아입으려고 준비했다. 그때 갑자기 뒤통수를 향해 베개가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을 받고 리에르는 짜증이 치솟았다.
“야!”
리에르는 한바탕하려고 했다가 제이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았다.
“부, 부탁이니……. 제발 나가서 입어……주게.”
리에르는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쳤다.
제이미의 말에 왠지 모르게 맥이 풀려 버린 리에르는 투덜거리며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풉.
아르미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리에르는 방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처량함이 한탄스러웠다.
“혹시 귀족 나리들만 맡을 수 있는 냄새라도 있나? 아니, 내가 방에만 들어가면 질색을 하네.”
-너 정말…….
아르미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리에르는 투덜거리며 벗은 옷을 가지고 계단을 내려왔다.
부엌에서 구수한 아침 냄새가 흘러나왔다. 기분 나쁜 감정은 전부 식탐으로 돌변했다.
“잘 먹겠습니다!”
“리엘, 아직 제이미가 안 왔잖니.”
“금방 올 거예요!”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지.”
결국, 리에르는 제이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제이미가 한참 만에 방에서 내려왔다.
리에르는 그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제이미는 보닛 모자를 벗고 흰색 원피스를 입고 내려왔다.
그야말로 미소녀의 자태였다.
“오늘은 어쩐 일이니?”
라일라는 제이미가 남장을 벗은 것을 보고 궁금해했다.
“치렁치렁한 여자 옷이 편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이미는 그렇게 말하며 리에르를 쏘아보았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여자였어?”
리에르의 말에 제이미의 고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제이미가 빙긋 웃어 보였다. 리에르도 따라서 웃어 보였다.
제이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걸어갔다.
리에르는 제이미가 뭘 하나 지켜봤다. 곧 그녀가 부엌칼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뭐 하려고?”
“흐흐…….”
제이미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리에르 쪽으로 다가왔다.
불안함을 느낀 리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옆으로 비켜 보였다.
리에르는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제이미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다시 옆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제이미는 리에르의 동선을 따라 흐느적거리면서 걸어왔다.
“아니지?”
리에르가 뒷걸음질했다.
제이미는 맛이 간 얼굴로 리에르를 향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