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42)
레필리아 레소드-42화(42/398)
레필리아 레소드 42화
태동하는 위험(2)
리에르는 제이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서서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모친의 첫 번째 정보원인 채소 가게 아저씨와 만났다.
아저씨는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제이미를 보았다. 그러고는 리에르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리에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화를 낸다.
제이미는 리에르를 하나하나 뜯어 보았다. 확실히 파에트와 닮은 얼굴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리에르의 오뚝한 코와 눈동자는 똑같다. 채소 가게 주인과 장난을 치며 웃는 모습은 파에트의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윽,’
제이미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곧 리에르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투덜거렸다.
“저 아저씨는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
“무슨 소릴 했는데 그러나?”
“아니, 내가 너랑…….”
리에르는 입을 열다가 도로 닫았다.
“됐다.”
“왜 말을 하다 마는가?”
“네가 들으면 저 아저씨한테 칼질할지도 몰라서.”
리에르의 말에 제이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를 뭐로 보는 건가? 나는 여성이지만 엄연히 수습 기사로 인정받았다. 어찌 검도 쓸 줄 모르는 이에게 무기를 휘두른단 말인가?”
“네가 내 새 애인이냐고 묻더라. 잘 어울린다고.”
“다녀오겠네.”
제이미가 빠른 걸음으로 채소 가게 주인에게 가는 것을 보고 리에르가 기겁했다.
리에르는 제이미가 행패를 부리려는 것을 겨우 붙잡았다.
“그러니까 듣지 말랬잖아.”
“그렇군.”
제이미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보였다.
“자네는……. 여성이 들어가 있는 방에 노크도 할 줄을 모르네. 예의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아까 하지 못한 말이다.
‘내 알몸도 봤지.’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더 분노하게 된 것은 계속 남자라고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거야……. 난 둔해서 잘 몰랐어.”
“머리가 좋아 보이진 않네.”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아니, 똑바로 보고 있었네.”
“……미안하다.”
리에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아, 미안하다고! 나도 정말 몰랐잖아. 고의는 아니잖아.”
제이미도 리에르가 고의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어 보였다.
제이미는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타인에게 적의를 오래 갖지 않는 성향이었다.
두 사람은 모친 라일라의 두 번째 정보 상인인 아세튼 아줌마의 앞까지 당도했다.
리에르는 언제나 그랬듯이 잘 익은 사과 하나를 손에 쥐고는 한입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른 사과 하나를 쥐어서 제이미 쪽으로 던져주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물건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제이미는 얼떨결에 사과를 받아들고는 눈만 깜박였다.
“뭐야, 안 먹어 봤어? 대충 옷에 문질러 닦고 껍질째로 먹어봐. 아세튼 아줌마가 파는 과일은 맛있기로 소문났거든.”
리에르는 한쪽 볼이 미어져라. 사과를 베어 물고는 우물거렸다.
제이미는 리에르의 모습이 참 품위 없고, 참 볼썽사납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밉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바로 전만 해도 이 세상에서 제거하고 싶을 정도로 미운 남자였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제이미는 리에르의 권유대로 했다.
손목까지 내려온 소매를 잡아 늘인 뒤 사과의 겉면을 문지른다.
고귀한 핏줄을 가진 자신이 길거리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생소했다.
소매로 과일을 닦아 먹는다니. 평소 성에서의 생활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제이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과를 한입 깨물었다.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입안에 단맛이 감돈다. 혀끝에서 볼까지 물들일 정도로 기분 좋게 하는 마법과도 같았다.
제이미는 솔직하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맛있어…….”
“그렇지?”
제이미의 짧은 감탄사에 리에르는 기분 좋은 듯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는 사이 아세튼 아줌마는 눈을 비비면서 졸음에서 깨어났다.
“아줌마, 그렇게 자고만 있으면 물건은 누가 팔아요?”
“안심하렴. 손님이 오면 바로 일어난단다.”
아세튼이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리에르는 자신을 가리키면서 되물었다.
“그럼 이건요?”
“코흘리개 꼬마 때부터 내 소중한 사과를 강탈해 온 빚쟁이 아니니? 나중에 돈 많이 벌게 되면 한 번에 받아낼 테니 각오하는 게 좋단다.”
“사과에 이자가 붙지는 않겠죠.”
“항상 무일푼으로 사과를 먹는 꼬마에게 이자 대신 미움은 늘어나고 있지.”
아세튼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금세 얼굴을 풀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에 맞춰 리에르 역시 하하,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저 우승하는 거나 보러 오세요!”
으스대는 리에르의 말에 아세튼은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잠결에 눈치채지 못했었는지 제이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리에르는 양손과 머리를 흔드는 묘한 행동을 취해 보였다.
그런 리에르의 반응을 보고 아세튼 아줌마는 싱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올렸다.
리에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들. 그것은 하나같이 친근해 보였다.
제이미는 성에서 기사들이 자신을 대하던 것이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리에르에 대한 성향을 말해준다.
“이따가 가게 문 닫고 보러 갈 테니 힘내거라, 리에르.”
“네네, 검술 대회 우승자 리에르 아르빈트가 애용하는 과일 가게라고 소문나게 할게요. 그러면 지금까지의 사과 빚 전부 없어지겠죠?”
리에르의 말에 아세튼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수작 부리지 말아라. 그래 봤자 이자도 갚기 힘들 테니.”
“쳇.”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세튼 아줌마는 힘내라는 듯이 팔뚝을 걷어붙였다.
그런 아세튼 아줌마와 이별하고서 두 사람은 계속 길을 걸었다.
“원래 기운이 넘치시는 분이셔.”
“그래 보이는군.”
그렇게 대답한 제이미는 다시 사과 한입을 아삭 깨물었다.
달콤한 사과 향이 입안에 퍼지며 기분을 들뜨게 한다.
제이미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리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사과도 그렇고……. 혹시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미인가?”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는 흥, 코웃음을 쳤다.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
“사이좋게 지내고 뭐고, 내가 실수한 부분에 대해선 확실하게 선을 긋는 거니까 다음은 네 자유지.”
“그런가?”
“너희 가문이랑 우리 가문 친하다며?”
“친한 정도가 아니지.”
“그럼 우리도 친하게 지내야지. 괜히 애들 싸움이 아빠 싸움 될라.”
아르빈트 가문이 있기에 아레스트 가문이 있고, 아레스트 가문이 있기에 아르빈트 가문이 있었다.
아레스트 영주와 로이스타는 주종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사석에서는 서로 존칭을 생략하는 사이였다.
아레스트 영주는 어릴 적에 방랑벽이 있어 여행을 다녔다. 여행 중 로이스타와 같은 동료가 되었고, 그때의 인연으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꽤 솔직한 녀석이구나.’
제이미는 처음으로 리에르를 웃으면서 쳐다보게 되었다.
파에트와 닮은 얼굴. 항상 점잖은 파에트와는 달리 가지각색의 표정을 가진 리에르.
‘이 녀석 그다지 싫은 녀석은 아닐지도.’
제이미는 리에르에 대해서 다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리에르의 팔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속삭였다.
“아르빈트 가문과 아레스트 가문이 사이가 나쁘면 안 되지. 세상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가십거리를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가까이 온 제이미에게서 좋은 향기가 났다.
리에르는 왠지 제이미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겨우 옷만 갈아입었을 뿐인데 이미지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자신만을 향한다.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귓불까지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 그런 거지.”
리에르는 쑥스러움을 내쫓는 데에 한참 시간이 걸렸다.
분명히 처음에는 모친 라일라의 정보 위험 지역만 벗어나면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이미와 리에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세튼 아줌마의 가게를 넘어 에레사와 자주 먹던 시츠 슬라임 노점상이 보인다.
리에르는 시츠 슬라임 막대를 사서 제이미에게도 나눠주었다.
“이게 뭔가?”
“역시 귀하신 몸.”
“그렇게 부르지 말게.”
“비천한 몸?”
“그건 자네지.”
제이미는 처음 보는 시츠 슬라임 꼬치를 보고 망설였다.
그녀는 리에르가 두어 개씩 먹어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하나 집어 들었다.
사과는 자연이 만들어낸 순수한 맛이었다.
시츠 슬라임은 인간이 자연을 가공해서 만든 최상의 맛이었다.
여러 개를 집어 먹으면 입안이 얼얼할 정도의 달콤함이 느껴졌다.
제이미는 한창나이 대의 소녀답게 시츠 슬라임의 달콤함에 빠져 정신 못 차렸다.
리에르는 그런 것을 보면서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항상 찡그린 얼굴만 봐서 잘 몰랐었다.
웃고 있는 제이미는 소녀다운 귀염성과 해맑음이 있었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제이미는 문득 리에르의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그녀의 미간이 접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로 하게나.”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는 피식, 실소하며 손가락을 들어 입 언저리를 툭툭, 쳐 보였다.
그제야 제이미는 당황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그녀의 손에서 딸려 나온 것은 흰 손수건이었다.
그것을 보고 리에르는 눈을 깜박였다.
‘허, 이 녀석도 손수건을 들고 다니네?’
리에르는 제이미가 손수건이 있는 것이 놀라웠다.
에레사 같은 여성스러운 사람 아니면 손수건 같은 건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너도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럼 손을 닦을 때는 무엇을 사용하는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제이미에게 리에르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난 안 가지고 다니는데.”
“그야, 자네는 원숭이니까.”
“하아, 그러셔? 엘빈도 가지고 있는 건가.”
리에르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 되물었다.
제이미는 크게 호통치듯이 대답했다.
“엘빈이 그렇게 깔끔한 체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엘빈은 1년 동안 비가 오는 날에만 목욕을 하는 자일세. 비가 오는 날도 욕탕에서 씻는 것이 아닌 그냥 비에 몸을 적시는 것으로 그는 목욕을 끝내는 것이네. 자네는 그러한 사실을 믿을 수나 있는가?! 자네의 그 어리석은 질문은 더러운 자를 모욕하는 행위일세.”
리에르는 제이미가 엘빈을 옹호해 주는 것인지 욕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들 그러지 않아?”
“…….”
제이미가 리에르를 바라보는 시선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리에르는 아차 싶어서 서둘러 다시 바쁜 걸음을 하였다.
“난 이제 대회 시작이니 준비하러 가야지. 넌…… 어쩔 거냐?”
“나 역시 결승을 봐야 할 의무가 있네. 따라가지.”
역시나 제이미도 결승전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 결승전에 오르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본인이다.
이런 데서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어서인지 경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관중의 대다수는 유트와 티미의 대결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리에르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 리에르는 올킬을 달성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무엇보다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이니 알아보기도 쉬웠다.
“그런데 자네는 대회에는 무엇 때문에 나간 건가?”
제이미의 물음에 리에르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회를 나가는 이유, 이제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 에레사와 함께하고 싶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그냥 친구 때문에.”
차마 한심한 이유를 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