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43)
레필리아 레소드-43화(43/398)
레필리아 레소드 43화
태동하는 위험(3)
“자네는 검술 대회가 처음이라던데? 그전에는 실력이 형편없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처음에는 말도 못 붙이게 하던 제이미였다. 지금은 묘하게 말이 많아졌다.
리에르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제이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저 친구를 위해서라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 혀, 형의 길을 따라가 보고 싶어서랄……까나.”
“오, 그거참 대견한 생각일세.”
사실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거짓말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자네까지 기사단에 들어온다면 아르빈트 가문의 세 남자가 전부 나라의 기둥이 되는걸세. 생각해 보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얼마나 열광할까? 자네를 따라서 기사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생겨날 거야.”
제이미의 눈빛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런 생각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이 제이미는 양손을 깍지 껴서 기도하듯 말했다.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네.”
“하, 하…….”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동급생인 쿠레드에게도 형편없이 당했던 리에르였다.
아직은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리에르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듯이 대광장의 분수대가 물 파편을 터트렸다.
참 이상했다.
지나가는 길에 누군가가 물을 끼얹으면 옷을 버렸다고 화를 낼 거다.
하지만 분수대에 뿜어지는 물줄기를 맞는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시원한 물을 맞으면 안 좋았던 기분마저 함께 떠내려가는지도 몰랐다.
리에르도 할 수 있다면 복잡한 심경을 물에 씻어내고 싶었다.
“거기는 대회장 방향이 아닐세.”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에 멍해져 있었다.
투둑.
리에르는 머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 위로 춤추듯이 흩날리는 물 파편이 보였다.
리에르는 왠지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물줄기를 맞으니 미열이 식는 기분은 들었다. 하나, 고민을 씻겨주는 정도까진 될 수 없었다.
리에르는 젖은 머리를 툭툭, 털면서 제이미의 곁으로 걸어왔다.
“자네 정도의 실력으로도 긴장하는 건가? 멍하니 길을 걷다니.”
제이미는 듣기 부담스러운 말을 아주 스스럼없이 했다.
리에르는 민망해서 낯을 들기가 힘들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은 노력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한 기회에 운이 좋게 얻은 것에 불과했다.
“그럼 오늘 시합도 기대하겠네.”
대회장에 다다르자 제이미는 예전보다는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말투는 원래 그런 듯, 여전히 딱딱한 말투였다.
리에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에 대기실로 향했다.
리에르가 대회에 참가했을 때는 조소만 가득했다. 특히 반 친구들은 온갖 조롱을 일삼았다.
하지만 리에르는 사람들의 기준을 완벽하게 뒤집었다.
지금의 그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지만, 대회 열광의 주역이었다.
리에르 덕분에 학원 랭킹은 완전히 뒤집혔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소감은?
아르미안은 그새를 못 참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리에르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대답한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으면 하는 기분이랄까.”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아르미안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조롱하던 눈빛이 관심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리에르는 이런 시선을 받아보는 것이 처음이라 부담감만 늘어났다.
그때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리에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곧 시합장 위에서 보게 될 얼굴. 다부진 체격을 가진 강력한 우승 후보, 티미 아크우드였다.
리에르에게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 1순위였다.
그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티미가 먼저 그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 루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좋았었는데.”
“응?”
리에르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티미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못 알아들었나?’
리에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티미는 쓸데없을 정도로 사람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비꼬는 말을 못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대단해. 네 평판을 생각한다면 검제의 제자를 이기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는데.”
“평판?”
리에르가 되묻자 티미가 잠시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실수했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사과하지 마. 사실이니까.”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실력이 늘었는지 궁금하군. 원래의 실력이었다면…….”
티미는 말을 하다가 잠시 멈췄다. 리에르는 그의 말을 듣고 한쪽 눈썹을 찌푸리면서 물었다.
“원래 실력? 내가 검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나?”
“에레사의 소꿉친구니 그 정도는 알고 있지.”
“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아는 것이 이상한 거 아니야?”
리에르는 티미가 자신에 대해서 뭔가 확인했다는 것을 느꼈다.
“하하, 그런가?”
“그렇지.”
“그런데 선배와 이야기를 할 때는 존댓말을 해야지. 그렇지 않아?”
티미의 차가운 말을 듣고 리에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굳이 그래야 하나?”
“그거참.”
티미의 웃는 얼굴에 말라붙은 듯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는 리에르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네가 유트라도 된 거로 착각하나 본데.”
리에르의 얼굴도 굳어졌다.
“착각하지 마, 낙제생.”
티미는 평소에 보여주던 온화한 웃음이 없어진 상태였다. 그것을 보고 리에르가 웃어 보였다.
“가식적이던 모습보다 지금이 훨씬 나은데?”
“나와 경기장에서 만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기대할게.”
“기대해. 에레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지.”
티미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흠흠, 헛기침을 해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다시 가식적인 미소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만들었다.
“오늘 컨디션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군. 이따가 보지.”
“네, 만년 2위 씨.”
티미는 가볍게 인사를 하며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리에르의 말을 듣고 제자리에 섰다.
리에르는 빙글빙글,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아, 잘못 말했어. 올해는 유트와 나에게 밀려 랭킹 3위로 떨어지겠네?”
리에르의 도발에 티미는 안면 근육이 굳어지며 볼에 핏줄마저 돋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려 버릴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대다수는 시합 전에 좋은 구경거리를 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어디를 가든 불구경과 싸움 구경은 안주가 없어도 술이 들어간다.
“나에게 감정이 제법 있구나?”
“이렇게까지 해도 눈치를 못 채는 놈이 있네?”
리에르의 계속되는 빈정거림에 티미의 인내심이 한계치까지 이르렀다.
그것을 나타내는 듯, 그의 주먹은 부르르 떨려왔다.
티미는 이를 사리물며 씹듯이 내뱉었다.
“네까짓 흉내만 낸 검술이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땅바닥을 핥게 될 것이 누구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리에르는 지금 몸 안에 깃들어진 힘이 넘쳤다. 허세가 아니었다.
그것이 자신의 노력이든, 천성이든 상관이 없었다. 지금의 그는 더 이상 나약했던 둔재가 아니었다.
티미 아크우드.
말년 2위지만, 유트가 없다면 매년 우승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자였다.
그런 티미를 우습게 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 설마 에레사를 빼앗겼다고 질투하는 거냐?”
리에르는 티미의 돌발 발언에 움찔하고 말았다.
“알기 쉬운 반응인데?”
티미의 입꼬리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지금껏 빈정거리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리에르의 입꼬리가 원위치로 내려갔다.
리에르의 표정 변화를 보고 티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에레사와 사귈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분이기도 하지. 그래서 항상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이러면 곤란하잖아.”
“내 덕분?”
리에르는 티미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항상 네 녀석과 붙어 다니던 에레사와 친해지려면 별수 없었거든. 미안한데 널 좀 팔았어.”
“팔어?”
“너랑 친하긴 친한 것 같더군. 네 이야기를 하니까 에레사가 경계를 풀더라고.”
“하…….”
리에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내가 검술을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군.”
“알면 알수록 넌 쓰레기 같은 놈이더라.”
“너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은데?”
리에르의 말에 티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한테 고마웠던 것이 많으니 오늘 일은 참아주지.”
“굳이 안 참아도 되는데?”
티미는 아까와는 다르게 여유만만한 표정이 되었고, 리에르는 도리어 얼굴이 붉어졌다.
“선배 뭐 해요?”
그때 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 금발 머리카락을 찰랑대며 다가오는 여성은 에레사였다. 그녀는 리에르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리엘도 있었네?”
“…….”
에레사는 티미의 곁에서 웃음꽃을 피웠다.
그녀의 옆에 티미가 있다. 그 자리는 분명 리에르의 자리였었다.
“자, 우리 먼저 들어가자.”
티미는 리에르가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리에르 보란 듯이 에레사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에레사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돌아가며 쳐다봤다.
그녀는 리에르가 뭔가에 화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비록 시합에서는 적이지만, 둘 사이엔 그것을 넘어선 유대가 존재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이 신경 쓰였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감싼 티미의 손을 풀고서, 리에르에게 향했다.
“근육 씨, 우리 내기 하나 할까요?”
리에르는 화가 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둘 중에 싸워서 이기는 상대의 소원을 들어주기. 에렌과 자주 했던 놀이인데 이게 또 스릴이 있어 흥이 돋더라고.”
갑자기 난데없는 리에르의 말이었다.
에레사는 눈만 깜박거렸다.
어릴 적에 자신을 골려주기 위해서 리에르가 종종 했던 못된 장난이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몰랐다.
엉덩이로 이름 쓰기 같은 것은 약과일 뿐.
“리엘, 무슨 말 하는 거야?”
에레사는 리에르에게 물었다.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하지도 않던 이상한 장난을, 그것도 자신이 아닌 티미에게 하자고 하는 것이 의아함을 일으켰다.
리에르의 말에 티미는 입술을 씰룩였다.
“가령 도시에서 꺼지라면 꺼질 테고.”
“카이샤를 그만두라면 그만두겠지. 어때, 서로가 이길 것을 확신하는데 내기를 해보는 것이.”
에레사는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대화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이 소원 내기 같은 유치한 놀이를 할 사이도 아니었다.
티미는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리에르도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비아냥거린다.
‘대체 무슨 일이……?’
주변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두 사람의 대화나 눈빛들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에레사만 가운데 껴서 곤란해하고 있었다.
“가자.”
티미의 우악스러운 손이 에레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선배…….”
왜 그러는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해도 시간을 주지 않는다.
고개를 돌린 에레사는 리에르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리에르의 얼굴에는 항상 장난스러움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조각의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소꿉친구의 이질적인 표정에 당황했다.
무서웠다. 자신이 아는 그 아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에레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리에르의 등 뒤로 붉은 날개가 보였다.
에레사는 눈을 비비고서 다시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핏빛을 닮은 날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