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50)
레필리아 레소드-50화(50/398)
레필리아 레소드 50화
흩날리는 검무(3)
얼마나 바라던 일이던가.
유트는 자신의 단 하나뿐인 친구의 등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항상 패배자의 눈빛으로 세상에 주눅 들고 살았던 친구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서 있었다.
-상대를 이겼을 때 어떤 기분이 들어?
언젠가 리에르가 유트에게 물었던 말이었다.
유트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기분이 좋지. 살아 숨 쉬는 듯한 기분이랄까…….
유트는 팔짱을 끼고서 나름 진지하게 대답했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유트의 대답을 들은 리에르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절묘한 대답이네. 난 죽어 있는 것 같으니.
-…….
성격은 구김살 없이 좋은 녀석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짙게 깔린 패배의식이 있었다.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리에르를 보면서 유트는 가슴이 아파져 왔다.
약한 주제에 허세 부리기 좋아하고 남에게 압도당하기 싫어하는 이 녀석이, 얼마나 머릿속으로 고민을 해댔으면 이런 쓸데없는 말까지 물을까?
‘내 친구 리에르, 널 살아 있게 하고 싶다.’
꼭 리에르의 카이샤 진학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의 기쁨을 친구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
그가 직접 검으로 얻어내지 못한다면, 자신이 도와서라도. 하지만 기연으로 인해 리에르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해졌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강해진다는 것은 유트로서는 질투가 날 만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신께 감사를 드렸다.
자신이 소망해 왔던 순간을 이제는 신께서도 들어주신 것이다.
리에르와 검술을 연마하며 그와 대결을 펼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리에르의 승리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유트 역시 친구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검을 겨루고 싶었다.
그것이 검사로서의 의지, 검사로서의 우정이었다.
지금 현재 리에르와 맞붙는다면 과연 누가 이길까?
그러한 아슬아슬한 생각만으로 유트는 가슴이 묘하게 떨려왔다.
“승자의 기쁨이 어떠냐, 리에르?”
유트가 물었다. 리에르는 물을 한 모금 물어 입안을 헹궜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이 달리 보여.”
“앞으로 더 달라질 거야.”
“그렇겠지.”
유트가 손을 들었다. 리에르가 이를 드러내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봤냐?”
“응, 봤어.”
“어떠냐, 이 슈퍼 리에르 님이?”
“못생겼어.”
유이의 말에 리에르가 미간을 좁혔다.
“얼굴 말고.”
“응, 지저분해.”
리에르는 유이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분명하게 말했다.
“잘 봐라, 이 슈퍼 리에르 님의 활약을.”
“누가 원숭이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이 서로에게 주먹 감자를 먹이는 것을 보고 유트가 웃었다.
리에르는 다음 시합을 지켜보기 위해 시선을 들었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환호성. 그것을 들으며 올라오는 상대는 리에르에게 있어 강적이었다.
리에르에게 첫사랑의 소녀이자 실연을 건네준 소녀.
에레사 레이나드가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뿐사뿐 걸어오는 모습이 흰 백조가 걸어오는 듯한 청아하고 우아한 자태였다.
리에르와 마주한 에레사는 웃음을 보이면서 말을 건넸다.
“안 봐줄 거야.”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풋, 웃고 말았다.
항상 예쁜 웃음 짓는 여자가 되겠다면서 거울 보며 미소 짓는 연습이나 해대던 에레사.
그녀를 보면서 항상 시크한 남자가 되겠다며 인상 찌푸리는 연습만 하던 리에르.
웃는 얼굴이 이제는 완연하게 자리 잡혀 버린 에레사가 딴에는 심술궂은 표정을 짓는다고 해봐도 영 어색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애교 부리듯이 보였다.
그것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여서인지, 좋아하는 여자라서 인지 모르겠지만.
안 봐준다는 그녀의 말이 갖는 의미는 리에르도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봐주지 말라는 의미다.
-슈퍼 리에르 님, 위기신데요?
‘어휴, 동네 아줌마처럼 왜 이런대.’
리에르는 속으로 아르미안에게 핀잔을 주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열어 보였다.
주심이 시합 시작을 선언할 때가 되었는지 손을 들어 올린다.
에레사도 검술 학원의 정통 교본 자세인 페이서스 검식을 취해 보였다.
리에르는 자신의 뺨에 닿을 정도로 검을 바짝 들어 올리고서 에레사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동안 말하고 싶던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좋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신을 슈퍼 리에르라고 아르미안에게는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을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리에르는 검술의 강력함, 그리고 생각의 의지마저 며칠 전과는 달랐다.
시합 개시를 선언하며 주심이 손을 내려졌다.
에레사는 이얍, 하는 소리를 내면서 페이서스 식의 장기인 찌르기 견제를 들어왔다.
리에르는 아르미안 그녀의 지시가 없어도 레필리아 제1식, 제로를 이용하여 에레사의 검을 막아냈다.
검에서 검으로, 원에서 원으로, 호에서 호로. 마치 물이 흐르는 듯이 유려한 검의 유영.
에레사는 검술의 감각이 상당했다.
리에르가 선봉에서도 보여줬던 기술에 당하면 검을 놓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같은 방향으로 검을 그려 나갔다.
두 남녀가 검을 맞대고 허공에 검광을 수놓는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는지 관중석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연극에서 추는 검무를 연상시킨다.
리에르가 허공에 원을 그리는 것을 따라 에레사도 똑같이 따라간다.
원에서 호로 넘어가며 내치는 기술마저도 똑같이 따라감으로써 검을 무사히 회수하였다.
-제법이다.
아르미안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리에르가 레필리아 레소드를 익힌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뻗어내는 검무라지만 그것을 한 번 본 것만으로 움직임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렵다.
에레사는 리에르를 향해 다시 검을 찌르고 들어왔다.
예상외의 적극적인 공격에 리에르는 뒤로 주춤하면서 검을 피하면서 거리를 두었다.
에레사의 몇 차례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며 뒤로 물러서던 리에르는 레필리아 2식 체이서를 시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에레사는 허리 쪽으로 날아드는 리에르의 검을 옆으로 틀어 막아냈다. 그녀의 손안에 가볍게 튕기는 느낌이 전해진다.
에레사는 직감적으로 레오가 쓰러졌던 기술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첫 타는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치고, 그 뒤에는 무섭게 빠른 속도로 연타 공격.
그것은 에레사의 예상대로 머리 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에레사는 최대한 빠르게 머리 위로 검을 들어 막았다. 그와 동시에 퉁, 튕기는 느낌이 전달되었다.
‘한 번이 아니었던 거야?’
허초(虛式)와 실초(實式)가 섞인 공격이었다.
에레사는 더는 반응하지 못하고 리에르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리에르의 가검.
에레사도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리에르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학내의 검술 선생들 이상이었고 기사단과 맞붙는다 해도 패배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심은 결국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리에르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관중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톱에 열광하였고 눈을 즐거워하였다.
비록 그들이 원하는 치열한 공방전은 없었지만, 리에르가 보여주는 새로운 검술은 그들을 기대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에레사는 놀란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리에르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상해서 리에르마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레사는 지금의 리에르가 자신감이 넘치고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눈만 없었더라면 자신도 모르게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에레사는 그 심정을 억지로 뭉개며 입술을 열려고 할 때, 멍한 표정으로 있던 리에르가 중얼거렸다.
“좋아해.”
“응……?”
에레사의 얼굴이 순간 당혹감이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에르의 얼굴이 삽시간에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이고, 연애질을 담당하는 신이시여. 왜 당신이 내 입을 조종하고 난리랍니까? 아이고, 어머니. 아들이 미쳤나 봐요.’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 위해 바닥을 줍는 시늉을 하였다. 이런다고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는 말도 아니었지만.
“방금 뭐라고 했어, 리엘?”
리에르가 이상한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하자 에레사는 영문을 몰라 했다. 더더군다나 저렇게 얼굴을 붉히면서.
-깔깔깔.
아르미안은 리에르를 곤혹스럽게 했다.
아마 지금 현신해 있는 모습이었다면 배를 잡고서 땅바닥을 뒹굴었을지도 몰랐다.
낯 뜨거워진 리에르는 에레사를 향해 훠이, 훠이. 손짓하면서 말했다.
“시합 끝, 패자는 내려가시죠.”
“아, 응…….”
에레사는 계속 알 수 없는 행동을 취하는 리에르를 등지고서 경기장을 내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머릿속에 들어오는 생각이 있었다.
‘좋아해……?’
에레사는 대번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리에르는 속으로 탄식을 하고 말았다.
에레사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속에서만 품어왔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놓은 거야. 내가 미쳤지. 아,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기를.’
리에르는 스스로를 나무라며 당장에라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에레사가 리에르의 고백을 못 알아들은 듯 보였다.
관중의 환호성 덕분에 유트 남매도 대화 내용은 못 들은 거로 보였다.
어떻게 해서든 무마하고 나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창피함이 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순간 리에르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리에르는 그 시선이 전해져 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나이도 점잖게 먹은 주심의 눈초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아차, 저 아저씨를 생각 못 했구나.’
리에르는 에레사와 자신 이외에 또 하나의 사람을 생각 못 했다.
보아하니 나이도 3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채신머리없이 입가를 가리며 킥킥거리는 주심을 보니 리에르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싸울래요?”
얼굴이 붉어진 리에르가 흥분한 듯이 검을 겨누자, 주심은 서둘러 안색을 바꾸면서 손사래를 쳐 보였다.
“오해하지 말게.”
“그럼 다행이고요.”
“나도 괜한 고백을 받고 싶진 않네.”
“이 자식이?”
주심이 입꼬리를 올렸다.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주심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하지만 실격패가 걱정되니 억지로 화를 삭였다.
주심도 겨우 웃음이 진정되었다.
리에르가 잡아먹을 듯이 바라봐서 그랬다.
드디어 상대 팀의 마지막 선수, 랭킹 2위의 티미가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잘 단련된 근육에 떡 벌어진 어깨, 저 가슴에 안겨보고 싶어 하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난 자네를 응원하지.”
주심이 한쪽 눈을 윙크하면서 리에르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아마 재미있는 가십거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아.”
리에르는 한숨을 쉬었다.
티미가 경기장 위에 올라오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한다.
“어휴, 왜 은발의 귀공자는 나오지 않고 저런 원숭이 같은 녀석이 있는 거야.”
관중 중 한 여성은 유트의 시합을 보러 왔다.
하지만 유트 대신에 계속 서 있는 리에르에게 불만을 품었다.
“금방 떨어지겠지.”
“유트 님의 라이벌은 오로지 티미밖에 없으니까.”
잘생긴 유트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검의 호는 소녀들의 설렘을 불러들인다.
그런 그녀들에게 실질적인 대회 우승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녀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검술에 관한 것도, 시합의 규칙 따위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보고 싶은 것은 오로지 미소년의 활약뿐.
“얘, 그래도 저 검은 머리 남자애도 왠지 괜찮지 않아?”
다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두 명의 소녀가 대번 성을 냈다.
“어휴, 어디 유트 오빠랑 저런 듣보잡을 비교해? 쟤는 생긴 것을 봐도 검술 이외에 내세울 게 없으니 그거만 파고드는 스타일이잖아?”
친구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끄덕해 보였다.
생김을 떠나 대회. 그것도 결승점까지 오른 남성이 멋있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하물며 항상 대회 결승전까지 올라오는 티미가 경기장 위로 들어서자, 리에르는 상대에게 왠지 모를 중압감마저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