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54)
레필리아 레소드-54화(54/398)
레필리아 레소드 54화
흩날리는 검무(7)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듯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고깃덩어리들의 향연.
이전에는 사람이라 불렸을 것들이 거름이 되어서 뿌려져 있었다.
무너져 내린 잔재는 예전에 안락한 집이라고 불렸었다.
말 그대로 지나가는 개 한 마리도 보기 어려운 참담한 상황이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두 동공을 일그러뜨렸다.
이곳은 전략적인 요충지도,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마을이었다.
지금 이 청년이 향하고 있는 페이서스. 그곳과 수도 사이에 있는 4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사는 촌락에 불과했다.
떠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던 수도의 화려한 불빛과 향기가 가시기도 전에 비극은 벌써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파에트 대장님.”
한 중년의 기사가 검푸른 청년에게 다가와 예를 취하였다.
파에트라고 불린 검푸른 머리칼의 청년은 참기 어려운 분노로 인해서 눈가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보고하려던 중년의 기사는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네.”
뒤늦게 젊은 상관의 대답이 나왔다.
중년인은 힘겹게 입을 열어 보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변해 버렸다.
파에트의 매서운 눈빛을 보고 중년인은 참담함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둠의 숲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중년의 기사는 나뭇잎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사람 얼굴만 한 크기에 거무튀튀하고 딱딱해 보이는 잎사귀였다.
나뭇잎은 사람의 손에 닿자 스스로 오그라들면서 공처럼 변했다.
중년인은 공처럼 변한 나뭇잎을 땅에 떨어뜨려 짓밟았다.
시뻘건 핏물이 그의 신발 아래서 터져 나온다.
어둠의 숲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었다.
강력한 생명력과 인간에 대한 증오.
이 녀석들은 나뭇잎 한 장도 살아 있다. 의식은 없지만, 이처럼 씨앗처럼 변하여 자신이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을 양식 삼아서.
말 그대로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생물들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대대적인 토벌 사업이 아니었다면, 어둠의 숲은 대륙 전체로 뻗어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어둠의 숲이 이렇게 빠른 진군이 가능하다니.’
파에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도 보고되지 않는 기현상이었다.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얼마 전에 만났던 수상한 붉은 남자. 그가 말한 무대가 이것을 말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비참하게 살육당한 촌락의 모습이, 고향인 페이서스의 모습과 교차하여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아르빈트 대원수에게 전령을 보내라.”
“네, 알겠습니다.”
파에트는 대체 ‘그것’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에트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페이서스가 가디언이 많이 배치되어 있어도,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의 전투에 고안된 인원이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아레스트 영지는 왕국 선포를 위하여 아스 영지와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페이서스라는 주요 항구를 잃는다는 것은 경제적인 치명타였다.
파에트가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칠검 기사의 정예 50인이었다.
촌락의 파괴 상태와 학살 정도로 보아서 적은 최소 300기 이상이었다.
몬스터들은 인간형을 제외한 이상 무리를 지어 사냥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성이 다르고 성향도 매우 다르기 때문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몬스터들에 한정된 이야기다.
어둠의 숲에서 파생된 것들이라면 200기 이상의 대규모 이동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최강의 기사단을 가지고도, 최상의 경제권을 가지고도 아레스트가 왕국령을 선포하지 못한 이유는 어둠의 숲 덕분이었다.
자신의 몸에 종양 덩어리를 가득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정복 전쟁에 나설 수가 있겠는가.
“얼마나 된 것 같습니까?”
파에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면서 씹듯이 말했다.
그것들이 이곳을 습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분노에 정신을 가라앉히지 못한다면 지휘관으로서 자격이 없다. 분노는 하되 이성은 차갑고 냉정하게 가져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지휘관은 자신의 부하들마저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파에트는 이상적인 지휘관 유형이었다.
중년의 기사 역시 나이와 경력은 헛먹은 것이 아니었기에 참혹한 광경에도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까만 피부는 분노로 인해 붉어져 있었고, 코와 입 사이에 있는 콧수염은 부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반나절은 지난 듯합니다.”
“반나절. 페이서스가 초토화되기에는 적절한 시간이군.”
파에트는 더 지체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려 말 위로 올라탔다.
너무나 매끄럽고 가볍게 말안장 위로 올라선 파에트는 칠검 기사 대의 정예들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들었는가,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항상 죽음을 곁에 두는 기사들에게조차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번은 전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부지런히 일하고, 자신의 가족들과 웃고 뒹구는 평화로운 이들이 이 앞에 있다.”
그들은 지금 이 비극을 모른다.
“그들이 이 비극을 견딜 수 있겠는가?”
견딜 수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기사들마저도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지금 여기 우리가 기사인 이유가 있다. 지금부터 전투에 진입한다. 돌아가고 싶은 자는 말리지 않겠다.”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파에트도 자신할 수 없는 싸움.
“못 해도. 우리 이름을 기억해 줄 사람을 단 하나라도 더 구한다.”
기사들이 투구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이 앞은 이제부터 괴물들의 세상이었다.
“칠검 기사단, 출정한다.”
죄 없는 이들이, 선량한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무차별하게 학살을 당했다.
이런 것을 보고서 피가 끓지 않는다면 그가 어찌 기사랴.
약자를 품지 못하는 강자가 어찌 기사라 불리랴.
평소 온화한 기품을 보이던 파에트의 음성에서 깊은 분노와 용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온 50인의 정예들도 가슴 풍만한 여급만 찾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칠검 기사단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페이서스로 가는 길에는 촌락에서 가지고 온 사람의 팔, 다리가 장난감처럼 굴러다녔다.
이것을 보고 기사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솟아올랐다.
‘제발…… 어머니, 리엘……. 모두 무사하기를.’
파에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애타게, 이렇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망했던 적이 없었다.
* * *
리에르는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인생을 살면서 가장 기쁜 날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호들갑이라고 누군가가 손가락질할지 모르나, 리에르는 스스로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지독하게 어깨를 짓눌러왔던 열등감.
처음으로 그것을 이겨 낸 날이자 처음으로 세상 앞에 우뚝 선 날이었다.
“정말 대단했네. 파에트 님과 아르빈트 스승님도 보셨다면 기뻐했을 거네!”
제이미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축하했다.
그녀는 처음 페이서스에 온 목적마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결정한 약혼 건에 반항하기 위해서, 리에르를 반쯤 죽여줄 생각에 왔었지만, 이제는 그에게 친숙함 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르빈트의 차남이 가지고 있던 나쁜 소문들, 그리고 최악이었던 첫인상까지 달아날 정도로 좋은 활약상이었다.
“다들 많이 들어요.”
라일라마저도 리에르의 첫 활약을 위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
유트와 유이도 리에르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하여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다.
한쪽 팔을 깁스하고 있는 유트가 바비큐를 뜯어 먹지 못하자, 유이는 앙증맞은 손을 들어 올렸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연한 돼지고기를 쭉쭉, 찢어 보이며 유이는 유트의 접시 위에 먹을 것을 올려주었다.
돈독한 남매애를 보이는 두 사람을 향하여 리에르는 심드렁한 얼굴로 유이에게 자신의 접시를 들이대 보였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 몸이다!”
리에르의 거만한 말을 듣고서 유이는 뚱한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보였다.
아무리 싫은 원숭이라 할지라도 화려한 올킬을 하면서 우승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리에르였다.
어쩔 수 없이 유이는 리에르를 축하하는 의미로 자신이 먹은 과일의 껍질과 뼈를 얹어서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리에르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목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지지 않을세라 유이도 목검을 들고서 리에르를 상대로 노려보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오늘만큼은 두 사람도 그만 좀 싸워라.”
정말 질리지도 않는 두 사람이었다.
유트마저도 두 사람이 사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만났다 하면 으르렁거리기 바빴다.
“처음 우승한 역사적인 날에 식탁 앞에서 싸워서는 체면이 깎이지 않겠는가?”
제이미의 말에 리에르는 흥, 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유이에게 시선을 떼었다.
유트는 동조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이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미우나 고우나, 리엘 덕에 생활비 걱정 안 하게 되지 않았어?”
유트의 말에 유이는 잠시 멈칫하고서 기다란 속눈썹을 끔벅거린다.
듣고 보니 유트의 말이 맞는지라 유이는 으으, 하는 소릴 내어 보이면서 자리에 앉아 보였다.
리에르는 예상외의 활약으로 우승을 하였다.
우승한 덕에 상금이 나왔으며, 그 상금은 고아인 유트, 유이 남매에게는 귀중한 자금원이었다.
돈 벌어다 준 착한 원숭이.
그곳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이는 자못 감탄한 눈빛으로 리에르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달라진 유이의 눈빛에 리에르는 천장을 향하여 고개를 젖혀 들고서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볼 것까지야.”
역시 강해진 것이 약한 것보단 기분 좋았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감.
유트마저 인정해 주고, 처음에 잡아먹을 듯이 굴었던 제이미마저 치켜세워 주고 있다.
모친 라일라도 자신의 스테미너 회복을 위해, 질 좋고 맛 좋은 음식들을 잔뜩 차려주고 있었다.
개와 원숭이처럼,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던 유이마저도 알아서 꼬리를 말 정도이니 리에르는 끊임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한창 오만해진 리에르의 생각과는 반대로, 유이는 상대에게 얻어터진 원숭이가 무릎을 꿇고 상금을 바치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우낏, 주인님. 이 상금을 바치니 저를 종으로 삼아주십시오!
유이의 기다란 속눈썹이 몇 번 깜박인다. 원숭이와 리에르의 거만한 표정이 겹쳐 보이기 시작하였다.
유이는 리에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평소라면 바보가 옮을까 봐 다가가지도 않았었다.
리에르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유이를 보았다.
키도 한참 작은 주제에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굳이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까지 농락하자, 불쾌감이 물밀듯이 몰려든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리에르는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어린아이가 아빠 구두를 신은 듯, 어울리지 않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고 제이미는 입가를 살짝 가리며 웃어 보인다.
유이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새침하게 입술을 삐죽여 보였다.
“사육 중.”
“허!”
리에르는 기가 찬 듯이 헛숨을 내뱉었다.
유이는 리에르가 유트의 둘도 없는 친구라는 것을 망각하는 듯 보였다. 더군다나 검술 대회 결승전에서 올킬을 달성한 우승자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다!’
리에르가 반항하는 기미를 보이자, 유이는 흥하는 코웃음을 치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어 보였다.
“자, 손.”
‘오호라, 해보자 이거냐.’
리에르는 당장에라도 연장자 예우 펀치를 날리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한창 기분 좋은 라일라의 비위를 거스르게 될 것을 생각하고서 리에르는 잠시 고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