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55)
레필리아 레소드-55화(55/398)
레필리아 레소드 55화
흩날리는 검무(8)
리에르는 유이의 손 위에 얌전하게 손을 올려놓았다.
마치 잘 훈련 받은 원숭이가 자신의 앞발을 내미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반전은 시작되었다.
리에르는 자신의 손을 받아든 유이의 오른손을 잡더니 다른 왼손마저 낚아채 버렸다.
깜짝 놀란 유이가 흠칫하는 사이 리에르는 손을 번쩍 들고서 만세 포즈를 취해 보였다.
유이는 까치발을 들어야 리에르의 가슴에 닿을락 말락 했다.
게다가 체구도 작고 마른 체형이었다.
리에르에게는 솜털처럼 가벼운 존재였다.
유이는 바둥거리면서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리에르는 승리자의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리에르 황제 폐하님 내려주세요. 라고 해보시지.”
“망할 원숭……이. 함정에 빠뜨리다니!”
“뭐가 함정이냐? 건방지게 입을 놀린 대가가 아니던가?”
리에르는 유이의 굴하지 않는 얼굴을 보며 심술궂게 웃으며 팔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유이는 분노하며 발버둥 쳤다.
리에르는 힘이 실리지 않은 발차기 따위는 우습다는 듯이 보였다.
결국, 유이는 뒤로 고개를 돌리며 빼엑,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유트는 방관자의 처지에 있었다.
친하지도 않은 제이미에게는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유이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믿음직한 리에르의 모친을 불렀다.
라일라는 아들만 둘인 것을 아쉬워했다.
덕분에 라일라는 에레사를 딸처럼 어여쁘게 생각했고, 유이를 한없이 귀여워했다.
모친 라일라가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얼레…….”
리에르는 순간 가슴속에서 당혹감이 일어났다.
모친 라일라가 안광을 뿜어내면서 달려들었다.
리에르는 유이를 잡은 두 손을 놓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레필리아 제1식 제로를 펼치면서 앞으로 원을 그렸다.
모친의 아들 훈육 펀치는 예상대로 매섭게 바람을 날리며 리에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원에서 원으로, 호에서 호로. 리에르는 아름다운 선율을 그리듯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결승전에서도 먹힌 기술이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모친 라일라의 아들 훈육 펀치는 리에르의 레필리아 검술을 뚫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강하다. 괜히 있는 명언이 아니었군.”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잖아.
리에르가 아무 때나 갖다 붙이자 아르미안의 핀잔이 날아든다.
그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리에르의 시야에는 악당을 물리친 라일라가 앙증맞은 유이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우리 유이 괜찮니?”
“아줌마…….”
유이마저 모친 라일라의 자상한 모습에 감동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두 사람은 꽃을 배경으로 눈빛을 반짝이더니 마치 모녀인양 서로를 끌어안았다.
유트와 제이미는 감동을 자아내는 장면을 보고서 자신들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말았다.
구석에서 힘겹게 일어나는 리에르의 눈에는 흉악한 악마들이 크르르, 소리 내어 웃는 장면들로 보인다.
‘여기 있다가 저들에게 당할지도 모른다.’
식사는 이제 막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한다면 뒤는 말 안 해도 되리라.
리에르는 슬그머니 악마들의 틈 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사실 식사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에레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리에르는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왔다.
그녀를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으나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엎질러진 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리에르는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엉켰다.
그는 에레사가 만나자고 하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풀벌레는 쐐애액, 기분 좋게 울고, 풀은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사르르, 하는 밤바람을 연주한다.
밝게 뜬 달밤의 얼굴을 문지르는 어스름한 구름. 그것은 기분 좋은 저녁임에는 분명했다.
리에르는 왠지 모를 설렘에 입가 사이로 미소를 그려 넣었다.
에레사가 타인의 시선을 피하여 입을 벙긋벙긋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소리 내지 않고 움직이는 그녀의 속삭임.
‘우리가 자주 놀던 언덕.’
자주 놀던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에레사에게 맞지 않으려고 도망가던 기억밖에 남지 않은 그 장소.
그것을 떠올리며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에게 짓궂은 장난으로 관심을 표현했던 시절. 뛰다 보면 도착하던 그 언덕.
그 언덕을 가기 위해 우거진 숲이 리에르의 안구 속으로 들어온다.
이곳은 도주의 장소이기에 앞서서 둘만의 소중한 기억들이 깃들어진 곳이었다.
한 걸음.
약속 장소로 향하는 리에르의 무릎에 몸으로 비벼대며 수풀들이 반가워한다.
다시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놀란 풀벌레들의 찌르륵 소리에 사과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오늘따라 주변의 작은 것 하나하나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기분 좋은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이 몇 번째 걸음을 하는 것까지 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밝은 달빛 아래 항상 에레사와 자주 노닐던 언덕.
마을 전경이 풍부하게 보여 낭만적이었던 그곳은 이제 저만치 눈앞에 보인다. 그리고 언제나 리에르를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에레사였다.
아름다운 긴 금발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분명 오늘도 만났고, 바로 옆집에 살았기에 지겹도록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와 마주치는 것은 하루의 일과 중에 하나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특별했다.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얼굴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리에르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걱정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에레사와 얼굴을 마주하면 이런 생각들은 전부 마법처럼 잊어버리고 만다.
달빛에 반사된 에레사의 흰 피부, 가지런한 치아를 수줍게 드러낸 웃는 얼굴.
자상하게 지어지는 그녀의 눈 미소를 받으며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똑같이 미소를 머금어 버렸다.
마법에 빠진 리에르를 혼미하게 만드는 듯한 에레사의 맑은 목소리가 청아하게 밤공기에 울려 퍼졌다.
“한참은 기다리게 할 줄 알았는데.”
“네가 보자고 하는 곳이 뻔하지 뭐.”
리에르의 투덜거리는 듯한 말에 에레사는 기분 좋은 미소를 다시 한번 지어 보였다.
“읏차.”
에레사는 양손을 깍지 끼며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기지개를 켜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것 같다.
에레사는 한눈에 보이는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 좋다.”
수풀이 바람 소리에 우수수, 하는 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퍼뜨린다.
그 바람에 에레사의 긴 머리카락도 물결이 일렁이듯이 넘실거린다.
에레사는 손을 들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집어 목까지 끌어당겨졌다. 진정된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와 장난스럽게 볼을 간질인다.
그 모습이 마치 호수에 사는 아름다운 인어가 멱을 감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겨우 리에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에레사가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를 빛내어 보인다.
주변의 배경에 따라서 사람의 이목도 많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었다.
하얀 설원의 남녀가 서로가 달리 보이는 효과가 있다. 짓궂은 구름을 밀어내며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달빛 아래 놓인 금발 소녀는 혼자 보기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금발 소녀에게 질투하듯이 밤의 여왕은 더욱 빛을 반짝이며 자신을 찬양하길 기원하였다.
리에르에게는 지금 이 순간 달도, 별도, 심술 맞은 구름도, 그리고 풀벌레들이 연주하는 음악회도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에레사에게 온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다.
에레사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오늘 정말 깜짝 놀랐어.”
설마 오늘 자신이 했던 고백 이야기인 줄 알고, 리에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실력이 좋아진 거야? 파에트 오빠와는 다른 방식인 걸 봐선 가문 검술은 아니던데?”
리에르는 갑자기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허를 찔렸다는 느낌이었다. 리에르는 에레사의 말투로 보아서는 분명 오늘 그 일에 관해서 이야기할 거라고 착각했었다.
“난 원래 강해. 그냥 귀찮아서 대충대충 했을 뿐이지.”
리에르는 흥, 코웃음을 치면서 팔짱을 껴 보였다.
에레사는 그를 보면서 실소하였다.
강하기는커녕, 카에르 내에서도 동급생들과 대무를 하다가 기절했던 적이 몇 번이던가?
어렸을 적에 자신을 지켜준다는 기세등등한 말을 내뱉던 소년. 그가 한 것은 상대를 때려눕히기보다는 상대가 때리다가 지쳐서 가게 만드는 것에 능했다.
리에르가 두드려 맞아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에레사는 엉엉엉, 울음을 터트렸었다.
그러한 소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소년은 아파 죽겠으면서도 허세를 부리기 위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라면 얻어맞은 것이 분해서, 혹은 코피가 터진 통증에 눈물을 펑펑 뿌리며 울어버린다.
리에르는 운동신경이 둔해서 동갑내기들을 상대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약했다. 싸우면 번번이 지는 주제에 하는 행동은 거만하고 당당했다.
지금처럼 리에르가 검술 대회에 우승하지 않았어도, 어렸을 적에 매번 싸움에 졌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가장 강한 남자였다.
“응.”
“엉?”
에레사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
에레사가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리에르는 그녀가 뭘 하는지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리엘이 내 옆에 있었지.”
“그야……. 옆집에 사니 보기 싫어도 뭐…….”
“나 때문에 괴롭힘당하고, 또 힘들어도 정작 나에겐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도 안 했었지.”
“그야……. 이 몸은 슈퍼 리에르라서…….”
말도 안 되는 소리밖에는 나오질 않는다.
멍석을 깔아주면 잘하던 행동도 못 한다고 하던가.
허세 부리면서 큰소리치는 것은 리에르의 특기 중의 특기였다. 하지만 에레사의 말에 리에르는 일일이 우물쭈물한 태도만 보였다.
“항상 내가 힘들 땐 아무 말도 없이 곁에 있어 주었어.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땐 항상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내 정신을 다른 곳에 팔리게도 하고……. 풋.”
에레사는 살포시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이 리에르라는 남자아이는 공기처럼, 가족처럼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에레사는 추억이 가득한 언덕에서 리에르를 기다렸다. 그동안 여러 번의 추억의 태엽이 되감아졌다.
생각해 보면 리에르는 이제 성인식을 올릴 18세 청년에 불과하다.
두 살이 연상인 에레사는 건장한 남자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자신의 동급생 남자들과 비교하자면 리에르는 풋내 풍기는 어린애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연인, 티미 아크우드를 생각하자면 그는 가문도 좋고, 카이샤 내에서 덕망도 좋은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남들이 보면 못난이 같아 보일 눈앞의 소년이 너무나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귀찮으면 이제 좀 떨어져 있으면 되지. 어차피 이젠 함께할 남자도 있으니까.”
리에르의 말에 에레사는 잠시 어깨가 움찔했다.
리에르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말한 발언을 주워 담기는 늦었다.
이런 말을 한다면 분명 에레사는 기분이 상한다. 자칫 감정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에레사는 리에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면서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리에르는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손을 들었다.
맞잡은 에레사의 손은 작고 부드러웠다. 따뜻한 온기, 잃고 싶지 않은 체온.
리에르는 장난스럽게 빙긋, 미소 짓는 에레사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착각을 느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은 부드러운 금발 커튼에 가려져 보이질 않는다.
부드러운 숨결, 향기로운 체취.
꿈결같이 느껴지는 촉촉한 입술이 리에르의 뺨에 닿았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 따스함.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금발이 턱 끝을 간지럽힌다.
에레사는 리에르를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행복을 상징하고 의미하는 것이었다.
리에르는 볼에 닿았던 온기를 떠올리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행복을 상징하고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불행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 수 없었다.
두 소년, 소녀의 설레는 밤은 천천히 깊어져만 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