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56)
레필리아 레소드-56화(56/398)
레필리아 레소드 56화
검은 날개의 숙명(1)
백색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청년이 미소를 짓는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짧은 숏컷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백색의 청년이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저주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백색의 청년은 슬퍼 보였다. 그의 눈빛에 처연함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오로지 소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슬픈가요?”
숏컷의 여성이 백색 청년에게 물었다.
백색 청년은 많은 것을 희생했고, 많은 것을 이룩했다.
“슬프긴.”
백색 청년은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네가 있잖아.”
청년의 곁을 지키던 트루 나이트(True Knight) 길트 페브리안은 따라오지 않았다.
맹약의 블루 드래곤, 카르샤는 다른 곳에 있었다.
최강의 오른팔과 왼팔이 없는 청년은 맨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고작 숏컷의 여성 한 명뿐이기에.
따뜻한 온기를 품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슬픔으로 가득한 호수 같은 눈동자.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자상하게 웃어 보인다.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남자고,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가는 남자였다.
이미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어떻게 대답할지 예감한다.
“괴롭지만 이제는 마지막이야.”
긴 백색 머리칼의 청년은 앞을 바라보았다.
더럽혀진 대지와 성스러운 하늘을 잇는 구름에 가려진 길. 일명 천공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남자는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위를 오른다면 죽든지 살든지, 끝이라는 종착점을 손안에 쥘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숏컷의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에게는 생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 그분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착실한 종일뿐이다.
백색 머리칼의 청년 곁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점점 자신은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아니, 이상해졌던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한 의문마저도 그분에게 허락된 적은 없는데도 말이다.
“당신의 숭배자……. 아니,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친구들. 그중에 특히 강한 블루 드래곤과 트루 나이트마저도 데리고 가지 않는 건가요?”
어차피 누구를 데려가든, 데려가지 않든, 그분에게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백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조금이나마 살 수 있는 확률은 보장할 수가 있었다.
소녀의 말에 백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절대적인 죽음을 앞두고서도 어찌 저렇게 평안하고, 부드럽게 웃을 수 있는지 소녀는 묻고 싶어졌다.
“말했잖아. 마지막이라고.”
그의 말에 소녀는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과 발이 굳어진다.
항상 무표정했던 소녀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부르르 떨려온다.
백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소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서 한 걸음씩 계단에 올라섰다.
그분에게 희롱당하고, 그분에게 유린당하며, 소중한 존재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았던 남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마지막 길을 가고 있다.
부하들, 아니, 친구들을 두고서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것은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청년의 작은 바람. 그리고 삶을 마감하기 위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멈춰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소녀는 큰 목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더 놀라운 것은 감정이 없다고 알고 있었던 자신의 눈가에 슬픔이 밀려들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멈춰 섰던 긴 백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다시 한 걸음, 하늘로 이어진 계단에 올라섰다.
분명 자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키워냈던 그분의 뜻과는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소녀는 다시 크게 소리쳤다.
항상 지시대로만 움직이고, 행동해 왔던 소녀의 지금까지를 송두리째 바꿔 버리는 듯한 감정들.
그것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다.
이성적으로는 자신의 역할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눈앞의 청년을 잡아야 한다고 스스로 외치고 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그분의 시선을 피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생이라는 삶을 유지만 하고 있다면 행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청년에게 깨우치게 하여 지금의 무모한 행동을 말려야 한다.
그제야 백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은 고개를 돌리어 소녀를 바라보았다.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스스로 인지 못 하는 것처럼 닦아내지 않는 소녀.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청년은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계단을 내려와 소녀에게 속삭였다.
“네 역할은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는 것. 그 역할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이번에는…….”
잔잔한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청년의 눈가를 가린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분명 청년의 눈가는 슬픔으로 가득 메워져 있을 것이다.
청년의 부드러운 입술이 열리며 가지런한 하얀 치아가 눈가에 보인다. 그리고 잔잔하게 속삭이는 그의 말이 혀를 타고 흘러내렸다.
“죽게 될 거야.”
당연한 그의 말에 소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분은 한없이 자애롭지만, 한없이 잔인하기도 하다. 역할을 이행하지 못한 소녀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슬픔을 느껴도 그것은 악마의 감정이라며 억지로 밀어냈다.
절제되었던 감정들이 갑자기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하자 소녀의 큰 눈망울에서 방울방울 눈물만 맺혀져 내렸다.
청년은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는 따스한 봄날의 햇볕과도 같았으며 생명의 고갈을 나타내는 백색의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 흩날리는 것이 보인다.
“마지막 운명까지도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 이 앞길은 내가 선택해서 내가 걸어가겠어.”
큰 손으로 소녀의 작은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백색 청년은 다시 계단을 걸어 나갔다.
더는 그를 말릴 수 없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만이 유일할 뿐.
멈추지 않고 저만치 앞서 나가는 백색 청년을 보면서 소녀는 소매를 들어 눈가를 훑어 보였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그녀는 청년의 뒤를 따라갔다.
절대적인 죽음의 앞까지 그를 인도하는 것으로 그분에게 받은 사명은 이미 달성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를 죽음에서 지켜내는 것은 이제 자신의 자유의지다.
보기에도 높아 보였던 천공의 계단을 오르는데 이상하게 숨은 차오르지 않는다.
오르면 오를수록 나른할 정도의 편안함을 일그러뜨린다. 명백한 공포가 피부에 스며든다.
백색 머리카락의 남성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그런 주제에 절대적인 죽음의 앞에서 태연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이후로도 저 같은 운명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꼭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기 바랍니다.”
그녀는 다리가 휘청였다. 곧 제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현기증이 정신을 지배하고 몸을 조종한다.
주변의 사물이 어지러이 춤추는 가운데 백색 머리카락의 남성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소녀에게 뭔가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지 않을 것이다.
소녀는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다. 혼자서 천공의 계단을 오르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등을 바라보면서 소녀는 눈물을 토해냈다.
“그것이 당신의 다음 역할입니다. 부디 저주받은 당신에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우습지도 않은 마지막 인사.
백색 청년은 그 말을 끝으로 분자 상태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엘 파실드!”
자신도 모르게 비명처럼 외친 아르미안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주변을 둘러본 아르미안은 후우,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리에르의 침대 옆, 단상 위에 올려져 있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잠꼬대를 하고 말았다.
검인 그녀가 무슨 꿈을 꾸고, 잠꼬대하느냐고, 건방진 꼬마 주인이 놀릴 것이 분명하다.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모든 것을 흡수할 권리를 가진 능력. 그 덕분에 레필리아 레소드도 순식간에 익힌 청년.
단지 운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리에르는 마법적인 재능이 타고났다. 아울러 꾸준히 해왔던 검술 훈련 덕분에 체력은 충분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애초에 레필리아 레소드를 빠르게 습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르미안은 자신을 믿고 잘 따라와 준 청년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가 너무나 기특했다. 그가 너무나 예뻤다.
그녀는 지독한 고통과 싸워왔다. 그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나날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자신이 말하면 받아줄 사람이 있고, 떠들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비록 피가 흐르지 않는 쇠붙이 형태지만, 아르미안은 지금의 생활을 만족하고 있었다.
꼬마 주인도 그동안 가슴앓이했던 짝사랑과 진전이 있었던 덕분인지 매우 행복해 보였다.
죽음에 이를 것 같은 고독이라는 병. 그 병을 유일하게 치유해 주는 청년.
아르미안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자는 리에르를 보니 실소가 머금어졌다.
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니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된다.
“음냐, 에레사…….”
자신은 걱정으로 항상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악몽까지 꾸고 있다.
한데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무사태평한 모습을 보이니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감기에 걸려도 싸지.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리에르를 보면 걱정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녀의 마음속을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의문점이 있다.
서로 어긋났던 두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곧 두 사람은 연인, 혹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며 더 친밀한 관계가 될 것이다.
오랜만에 세상 바깥으로 나온 아르미안은, 지금의 세상이 너무도 평화롭다는 것을 느꼈다.
평화는 검을 놓게 만든다. 리에르는 재능이 있지만, 포스라는 위험이 있는 이상 전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전사로서 살아가지 않을 리엘에게 나라는 존재는 정말로 필요할까?’
아르미안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아예 잊어버릴 것 같았던 고독이라는 무서운 질병이 전신을 전염시킨다.
에레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축복해 줬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은 이질적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르미안의 마음속 파동은 점점 확연하게 의문을 자리 잡아 나갔다.
버림받는다.
엘 파실드가 그러했듯이, 필요가 없어지면 아르미안이라는 존재는 의미가 없었다.
동료로서 인정받지 못한 그녀는 그와 함께 가지 못하고 버려졌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 새 파트너를 만나게 되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미남자. 엘 파실드처럼 일그러진 운명을 가진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아르미안을 밀어냈고, 죽은 이후에도 리즈는 그녀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되살리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금단의 위험을 건드렸다.
지금의 그녀를 있게 했던 제1대 포스, 엘 파실드의 비참한 생과 사. 그리고 제2대 포스이자 연인이었던 리즈의 슬픔과 광기들.
비극을 향했던 전대 포스 사용자들과는 전혀 다른 리에르 아르빈트. 아르미안은 세 번째 인연은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가슴 한편에 찾아드는 무서운 생각들과 두려움들을 밀어낼 정도로.
리에르만은 다를 것이 분명했다.
아르미안 자신이 없더라도 리에르는 라일라, 에레사, 유트, 유이 등등 그의 광기를 제어해 줄 단단하고도 견고한 검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했던 엘이나, 영원히 혼자서 살아왔던 리즈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번만은, 이번만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넌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그렇지?
친동생을 대하듯이 상냥한 목소리로 듣지도 못하는 코골이 꼬마에게 말해본다.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리에르의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아르미안은 실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