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57)
레필리아 레소드-57화(57/398)
레필리아 레소드 57화
검은 날개의 숙명(2)
“이럇, 하아, 하앗!”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말도 사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엘빈을 태우고 밤새도록 달린 말은 특히 그러했다.
대지를 박차던 말굽도, 바람에 나부끼던 갈기도 서서히 눈에 띌 정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엘빈은 말을 세운 뒤,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는 자신의 발로 땅을 딛자 허벅지가 쑤셔오는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통증이었다. 안장을 걸쳤다곤 하나, 말의 위가 침대처럼 편안할 리는 없었다.
말은 주인보다 더 지친 주제에 고개를 털어내며 걱정하는 듯 콧소릴 내었다.
새벽녘의 찬 공기 덕에 말의 코에서는 허연 콧김이, 그리고 주둥이에선 끈적이는 침이 흘러대고 있었다.
엘빈은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생했다.”
푸르르.
말이 머리를 흔들며 투레질을 하였다. 녀석은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땅바닥이, 그리고 이슬을 머금은 풀 잎사귀가 말의 뜨겁게 지친 몸을 식혀주었다.
녀석은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주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오고 있었다.
그 거대한 무리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다가온다.
그것들의 속도는 느릿해 보이나 예상 이상의 속도로 페이서스 방위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엘빈은 페이서스의 관문성을 향해 뛰었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를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관문병이 보였다.
“당장 문을 열어라!”
살기등등한 엘빈의 외침에 관문병은 눈을 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엘빈은 매우 친절하므로 관문병이 잠에서 깰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그는 롱소드 들어 투척했다.
투척된 롱소드는 절묘하게 찬바람을 찢어내며 성가퀴에 박혔다.
웅, 진동을 울리는 롱소드를 보고 관문병이 화들짝 놀랐다.
검이 조금만 위로 날아왔어도, 자신이 맞았을지도 몰랐다.
관문병은 엘빈의 힘에 놀란 것보다, 죽을 뻔한 것에 화가 치밀어서 소리를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엘빈은 바로 옆에 관문병이 있었다면 반 토막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관문병은 높은 곳에 있었다. 그를 베려면 땅에 내려오게 해야 했고, 관문을 열게 하기 위해서도 내려오게 해야 했다.
엘빈은 자신의 망토를 들어 위쪽에서 잘 보이도록 추어올렸다.
십일검 기사단을 상징하는 폭룡의 날개 문양. 그 문양을 관통하는 여덟 자루의 검을 보고서 관문병은 헛숨을 들이켰다.
망토 위에 그려진 문양은 십일검 기사단을 상징하였고, 여덟 자루의 검은 제 팔검 기사단을 의미했다. 게다가 붉은색 안감으로 덧쓰인 화려한 망토는 오로지 해당 기사대의 대장급들만 소유할 수 있었다.
마을의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사실을 관문병이 모를 리 없었다.
“문을 열든지, 네 목을 내놓든지 택해라!”
관문병은 그야말로 번개처럼 망루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동료 관문병 둘에게 급하게 손짓을 하면서 문을 올리라는 시늉을 하였다.
페이서스 출신인 칠검 대장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하들을 굉장히 아끼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동기인 팔검 대장은 칠검 대장과 성격이 전혀 달라서 괴팍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는 죽이고, 마음에 드는 상대는 죽기 전까지 싸워야 기분이 좋아지는 변태 중의 상 변태.
서둘러서 열리는 성문 안으로 살기등등한 엘빈이 들어오자 관문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엘빈에게 욕을 퍼부었던 관문병은 혹시 책이라도 잡힐까 봐 전전긍긍했다.
엘빈의 짐승 같은 모습을 보고도 감히 그를 막아서는 인물은 그 누구도 없었다.
“생각 같아선 네 녀석 혀를 먼저 자르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 기회로 하지. 말을 가져오라.”
당장에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엘빈이 으르렁거렸다.
관문병은 신중하고 신속하게 말을 골라 대령했다.
다행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엘빈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관문병은 겨우 살았구나 한숨을 쉬었다.
“살고 싶다면 성문을 굳게 잠그고 정신 바짝 차려라.”
“네?”
“어둠의 숲이 온다. 최선을 다해서 막되, 목숨을 소중히 해라.”
엘빈의 말에 관문병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팔검 대장이나 되는 사람이 헛소리를 늘어놓을 리도 만무했다.
엘빈이 말을 타고 페이서스로 향하자,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급하게 병사들이 긴급 소집을 내리며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피를 잔뜩 머금은 검은 구름이 당장에라도 비를 쏟아낼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먹구름의 밑으로 대지를 가득 메운 시커먼 무언가가 불길한 기운을 뿜으면서 성벽을 향해 직진하였다.
관문병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에 말문이 막히고 다리가 굳어져 버린다.
‘빌어먹을.’
엘빈은 생각보다 그것들의 이동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슨 해괴한 방법을 사용하는지 몰라도, 녀석들은 이미 지척까지 도착해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땅에 귀를 가져다 대지 않아도 녀석들의 쿵쾅거리는 거대한 발소리들이 주변을 울리는 듯 보였다.
지금 엘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일라의 애처로운 부탁도, 이 도시의 안위도 아니었다. 부랑아나 다름없던 자신을 거두어준 아레스트 영주의 은혜를 갚는 일. 그리고 그의 단 하나뿐인 영애, 제이미의 안전을 확실하게 하는 것.
지금 지나쳐온 성벽의 병사들이 몰살당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엘빈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다.
엘빈 그 자신은 파에트 같은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저 최우선 임무에만 몰두한다. 이 도시 하나와 제이미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엘빈은 말의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고삐를 부여잡았다.
곧 그가 탄 말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얼마 만일까.
리에르는 아침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얼굴을 간질이는 것을 느꼈다.
“으랏차!”
리에르는 기합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모친 라일라가 이불 걷고, 때려야만 일어났다.
하지만 오늘도 어제처럼 이변을 연출하고 말았다.
“역시 난 천재 리에르.”
리에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어휴, 음흉한 생각 때문에 일찍 일어나셨겠지.
오늘은 웬일인지 잠꾸러기를 자처하는 아르미안마저 상쾌한 비아냥거림으로 인사했다.
“하하하, 오늘은 무슨 소릴 하더라도 이 슈퍼 리에르는 휘둘리지 않을 겁니다.”
-어이쿠, 에레사랑 잘되는 분위기라 신나신다 이거네?
항상 리에르를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하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질투심을 내비치는 아낙네에 불과했다.
“레이디 아르미안의 고마움은 언제나 잊지 않고 있습죠.”
-어구, 말이나 못 하면.
말로는 구박하고 있어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잘 느끼고 있다.
비록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그녀이지만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감정이 더 잘 느껴진다.
리에르는 오늘도 먼저 일어나, 아침 인사를 한다면 라일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심술 맞은 웃음을 흘리며 리에르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여느 때처럼 피곤하지도, 힘겹지도 않았다. 어제 한바탕 결승전을 치렀으니 몸이 찌뿌둥할 만도 하거늘, 오히려 머릿속은 상쾌하고 몸은 가뿐했다.
단지 결승전을 잘 치렀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짝사랑에 불과하던 현실이 이제는 ‘짝’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어젯밤의 에레사는 달빛의 마법에 취해 버린 리에르에게 사랑스러운 여신처럼 보였다.
촉촉한 온기를 품은 입술로 볼 키스를 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에레사.
자신의 두 손을 허리 쪽으로 감싸 안아 감춘 채, 별빛을 닮은 미소를 머금는 그녀의 모습. 생각만 해도 리에르는 행복해졌다.
그동안 쭉 함께 지내왔다.
서로 이웃사촌이었기에 싫어도 얼굴 마주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이제는 에레사와 만난다는 사실이 예전과는 큰 차이가 생겨 버렸다.
-어구, 보고 싶어 죽겠나 보네?
“검술대회 우승한 영웅에게 미인은 필수적인 선물 아니던가요? 하하!”
새벽과 아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비추는 시간에 내는 말소리치고는 너무 컸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떠들어 대는 리에르.
라일라가 그런 아들을 보면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할지도 몰랐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계단을 내려간다.
오늘만은 리에르도 만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잠이 부족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르미안은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론 가슴의 쓰림마저 느껴졌다.
리에르의 활달한 모습 덕분에 아르미안은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포스라는 잔혹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운명을 받아들이기엔, 청년은 너무나 나약하고, 너무나 착했다.
아르미안은 괜히 자신이 레필리아 레소드를 전수하여, 소년의 운명을 일그러뜨렸다고 자책했다.
하나, 걱정과는 달리 소년은 비극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핑크빛으로 물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대 포스 엘 파실드는 자신의 운명에 대항하며 마지막 싸움을 끝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2대 포스 리즈는 핏빛의 운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학살자가 되었다. 그 결과 아르미안과 단체에 의해서 봉인 당하게 되었다.
포스라는 힘을 가진 인물들은 누구 하나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강력한 힘은 인간이라는 좁은 껍데기 안에서 버티지 못한다.
다른 포스들과는 다르게 가족과 지인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 그라면, 그 뒤틀린 운명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아르미안은 기도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행복은 깨어지기 위해서 존재하고, 불행은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서는 리에르는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난 곳에는 리에르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엘빈 트위아가 서 있었다.
“이야, 오랜만……!”
“영애는 어디 계신가, 주무시고 계신 건가?”
목소리는 여전히 소름 끼치도록 낮고 음울했지만, 그 눈빛은 더욱 뱀처럼 가늘고 서늘하다.
그런 그가 초췌한 모습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리에르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르미안은 평소 엘빈이 가지고 있던 여유로움 대신에 다급해하는 것을 보고 불길함이 찾아들었다.
이 불길함이란 녀석은 수많은 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살육을 경험한 그녀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쯤 이불로 몸을 둘둘 감싸고 있겠죠. 하지만 저는 들어가지 않아요. 이상하게 제가 들어가면 항상 옷을 갈아입고 있더군요.”
리에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농담조로 말했지만, 엘빈은 별다른 표정 없이 성큼성큼 영애의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걸어도 을씨년스럽게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엘빈이 거침없이 그 위를 걸어가자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는 나무 계단의 비명에 귀를 기울이는 친절한 남자는 아니었다.
“리에르 군. 지금 당장 라일라 님을 깨워라.”
엘빈의 말에 리에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다. 그동안 어딘가 싸돌아다니더니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 시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움직여라, 리에르 아르빈트.”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동떨어진 단어보다 더 무섭게 느낀 것은 엘빈의 살기등등한 눈동자.
그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