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59)
레필리아 레소드-59화(59/398)
레필리아 레소드 59화
검은 날개의 숙명(4)
리에르는 거대한 괴물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리에르는 지금 이 순간 피식자로서의 원초적인 감정에 붙들렸다.
머릿속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후들거렸다.
전에 학시엘을 경험했던 제이미마저 와이번을 보고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는 저절로 마른 입술을 깨물며 경직되어 있었다.
비단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가롭게 떠들고, 장사하던 사람들마저 멍한 표정이었다.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평화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와이번이 흉흉한 두 안광을 열어 보였다.
와이번이 땅을 향해 하강한다.
쿵!
와이번이 피막 날개를 펼치며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엑!”
곧 있을 피의 축제에 대한 기쁨이었을까.
와이번의 찢어질 듯한 고함이 터져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현실을 깨달았다.
“으아악!”
외마디 비명이 울려 펴졌다. 와이번의 발톱에 짓밟혀 버린 첫 희생자는 눈물과 핏물을 토해냈다.
그는 조금 전만 해도 공원의 커플들을 부러워하던 남자였다.
평생 여자 친구 하나 없었다.
커플을 저주하는 한편, 부러워하며 올해에는 꼭 연애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짓이겨진 자신의 육편이었다.
부서진 갈비뼈가 장기를 찔렀고, 잘려 나간 손이 저만큼 떨어져 있다.
“살…….”
남자는 구원을 원했다. 하지만 와이번의 거대한 부리가 남자의 머리를 물고서 좌우로 흔들었다.
뚝!
목뼈가 끊어져 나갔다. 와이번은 마치 포도알이라도 따먹듯이 남자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아드득, 아드득.
남자는 형편없이 찌부러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것을 끝으로 의식이 끊어졌다.
첫 번째 희생자를 시작으로 평화로웠던 광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이 주변을 메웠다.
개미 떼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와이번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듯이 부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허공에서 선회하던 두 마리의 와이번도 땅에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르면서 사람들과 부딪혔다.
말이 부딪히는 거다. 방패 같은 비늘로 전신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생명체다.
지금 도망치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개구리가 파리를 먹기보다 쉬웠다.
아니, 도망치는 개구리를 발로 짓이기는 소년의 잔혹함을 닮았을지도 몰랐다.
그러한 착각이 착각만은 아니라는 듯이 와이번은 어린아이 하나를 부리로 집어 올렸다.
꼬마 아이는 으아앙 하는 울음을 토해내며 단풍잎 같은 손아귀를 허공에 흔들었다.
아이의 엄마는 너무나 두렵고 놀란 나머지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와이번은 장난스럽게 아이를 허공에 휘휘, 두어 번 휘둘러 보이더니 미끈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녀석은 열린 부리를 앙, 하고 다물었다.
푸쉭!
잔혹한 소리와 함께 붉은 액체로 변한 아이가 와이번의 부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아…….”
아이의 엄마는 그대로 눈물을 토해내며 혼절했다.
아이를 구해줄 영웅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혼절한 여성을 배려해 줄 용감한 남자들도 없었다. 모두 자신이 표적이 되지 않기를 빌며 도망치고 있었다.
와이번은 아이의 엄마를 발로 짓밟고는 다음 표적을 향해 머리를 바쁘게 놀렸다.
너무나 표적이 많으므로 오히려 사냥하기가 어렵다.
드래곤은 옛날부터 처녀를 좋아한다고 했다. 인간들처럼 성 노리개 같은 개념은 아니었다.
변태 같은 유희의 생명체라면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꼭 그렇다고 보기만은 어려웠다.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인간들도 늙은 돼지보단 젊고 생생한 돼지, 특히 어리면 어릴수록 육질이 연하다고 하였다.
와이번도 수많은 고기를 보고 미식을 행하려 했다.
제이미는 와이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다리가 돌처럼 굳어졌다.
아니, 몸 전신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깊고 깊은 심해에 빠진 것 같은 절망감이 그녀의 목을 엄습한다.
라일라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제이미는 거의 혼이 빠져나갔다.
라일라는 비록 지금 힘은 잃었지만 이름 높은 마법사였다. 여러 전투 경험은 그녀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리엘, 제이미 양을 부축해 주렴!”
서둘러서 도망쳐야 했다.
리에르는 어머니의 외침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그것을 맛있게 먹어 치우는 괴물이 있었다.
-리엘, 정신 차려!
리에르는 스스로 정신이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신이 멀쩡한 게 아니라면 저렇게 두려운 생명체를 보고도 침착했을 테니까.
-와이번 한 마리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어!
“아, 알았어요…….”
리에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일라를 도와 제이미를 부축했다.
쿵쿵!
와이번이 제이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녀석은 기쁘게 부리를 흔들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야, 정신 차려!”
리에르는 제이미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항상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괴물……. 파에트 님이 없는데…….”
이렇게 어설프게 도망갔다가는 전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쐐에엑!
바람을 찢는 듯한 굉음이 주변을 울렸다.
와이번은 그 커다란 덩치에 맞지도 않게 땅에 닿을 듯 낮게 날면서 교묘하게 사람들을 짓뭉개 버렸다.
개중 마음에 드는 먹잇감, 살이 연하게 보이는 처녀들은 친절하게도 부리로 덥석 물어서 으적, 으적 씹어 먹었다.
부리 대신 주변 볼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안쪽에 톱니처럼 생긴 치아는 단단한 것도 잘게 부서뜨렸다.
와이번의 두꺼운 볼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처녀의 팔, 다리도 꿈틀댄다.
하지만 이내 힘을 다했는지 팔은 천천히 허공에 늘어뜨린 채 피를 뿌렸다.
다른 동료들이 포식하는 것에 질투가 생긴 한 녀석은 제이미를 보면서 군침을 삼켰다.
나이도 어리고 육질도 연해 보였다. 보기도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인간들의 말이 와이번에게도 통용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혹은 다른 동료들에게 맛있는 것을 빼앗기는 것이 싫은 것일 수도 있었다.
제이미의 후들거리는 다리는 주인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리에르 앞에서는 당당한 척해 보였지만 제이미도 소녀였다.
자신의 몸의 몇십 배 이상 되는 생물이 달려오는 것은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절 두고 도망…….”
제이미는 자신 때문에 라일라와 리에르가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포식자가 날개를 펼치며 거대한 부리를 벌리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부리에서 썩은 시체 냄새가 느껴졌다. 톱니처럼 자라나 있는 이빨 사이로 낀 살점을 보니 다시 한번 거부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아아……!”
제이미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옆에 있던 라일라가 제이미를 지키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서 그녀를 몸으로 감싸 안았다.
제이미는 기시감을 느꼈다.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때, 유모는 라일라처럼 끌어안았다.
자신을 호위하던 병사들도 싹 죽어 나갔다.
그때 그 순간처럼 라일라는 제이미를 품에 끌어안고서 와이번에게 등을 돌렸다.
과거의 공포와 현재의 공포가 교차하며 제이미가 눈물을 토해냈다.
‘파에트 님!’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연모하는 사내가 떠올랐다. 자신의 아비인 영주가 알면 서운해할지도 모르나 갑작스러운 최후를 당하게 된 딸의 마음을 탓하진 않으리라.
지금 이곳에 과거 자신을 구해줬던 파에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제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푸우욱, 깊게 베이는 소리가 제이미의 귓가를 때렸다.
제이미의 가녀린 어깨가 부르르 떨려왔다.
자신의 머리와 고운 뺨 위로 뜨거운 피가 후드득, 소리 내어 떨어졌다.
제이미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에 고백이라도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녀는 자신을 감싸 안은 라일라의 몸을 꼭 끌어안는 거로 말을 대신했다.
“리엘…….”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제이미의 귓가로 라일라의 온화한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이 들려왔다.
제이미가 천천히 눈을 열자 기다란 속눈썹에 가려진 시야 속에서 검은 인영이 보였다.
“파에트…… 님?”
제이미는 순간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앞에 서 있는 파에트가 뒤돌아서서 안심하라는 듯 인자하게 웃어줄 거로만 보였다. 하지만 파에트의 잔상이 일그러졌다.
그 자리에 있는 리에르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야! 빨리 울 엄마랑 피해!”
리에르의 손안에는 은은하게 빛을 뿜어내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끼에에에엑!”
와이번이 비명을 질렀다.
땅바닥에는 녀석의 두꺼운 발이 잘려 나가 형편없이 미끄러졌다.
와이번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건물에 쑤셔 박혔다.
학살을 즐기고 있던 와이번 두 마리는 동료의 괴성을 듣고서 리에르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였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제이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지 못했다.
“리엘…….”
라일라가 입술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철제 방패 같은 두꺼운 비늘은 화살도 튕겨낸다. 일반 검으로 찔러봤자, 박힐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와이번의 다리는 깔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아르미안, 대단해요.”
-어때, 잘 잘리지?
리에르는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에는 농담처럼 들었고, 반쯤은 무시한 것도 있었다.
큰 기대 없이 검을 휘둘렀다.
두꺼운 와이번의 갑주를 종이 자르듯이, 깨끗하게 잘라내자 리에르도 놀랐고, 와이번도 당황하였다.
리에르를 평범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하고 무시했던 와이번은 다리 하나라는 비싼 값을 물어줌으로써 동료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와이번은 부서진 건물 잔해를 헤집으며 기어 나왔다.
끄에엑!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허공에 수차례 내질렀다.
거대한 와이번 두 마리는 즐거웠던 살육을 끝냈다. 대신에 리에르를 노려보며 날아들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애써 참아내고 눌러냈던 공포감이 다시 꾸물꾸물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르미안을 쥔 리에르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려온다. 다리는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전신에서 차가운 땀이 적셔지며 옷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주변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두운 공간 속에 갇힌 것과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벼락같은 아르미안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리엘 멍하니 있지 마!
리에르는 무서웠다. 당장에라도 이불을 둘러쓰고 자다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실은 꿈이었습니다와 같은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았다.
등 뒤로는 모친 라일라와 제이미가 있었다.
“리엘, 빨리!”
라일라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이제 제이미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리에르가 도망치지 않자 다시 소리쳤다.
-지금 도망치면 전부 죽을 거야. 알고 있니?
그녀의 친절한 사형선고가 없어도 알 수 있다.
-각오는 했니?
아니, 그딴 것은 할 수 있을 리 없다.
자신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낙제생에 불과했다.
참혹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구원을 바라는 누군가의 마지막 기도가 살육의 공간에 감돈다.
리에르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지그시 눈을 감는다. 몸 전신에 예리한 감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두 눈을 열자, 마나 덩어리로 가득한 세상이 펼쳐졌다.
“레소드 5식, 임페리얼 소드.”
리에르가 검을 들자 불꽃의 연소점들이 반응했다.
허공으로 검을 긋는다. 검이 불꽃의 연소점에 닿으면서 폭발하듯이 깃들어졌다.
리에르는 달려드는 와이번을 향해 돌진했다.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
끼에에엑!
와이번의 거대한 부리가 리에르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든다.
-지금!
아르미안의 신호와 함께 리에르는 몸을 낮추면서 검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
취이이이익!
와이번의 목에서 붉은 선이 그어졌다. 비산하는 핏물이 불꽃에 산화되어 고약한 냄새를 흩뿌렸다.
와이번의 잘려 나간 속살에서 불꽃이 깃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