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66)
레필리아 레소드-66화(66/398)
레필리아 레소드 66화
각성(3)
“마음대로 해.”
결국, 리에르는 거절하지 못하고 티미의 의도대로 대답하고 말았다.
티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리에르는 단순했고, 이용하기 좋은 유형이었다.
리에르는 티미의 속마음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카이샤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티미는 리에르의 대답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계속 따라붙었다.
같이 들어가서 뒤를 칠 생각이었는데, 수수께끼의 남성도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티미가 자꾸 곁눈질로 자신을 바라보자 리즈는 능청맞게 물어보았다.
“제가 따라가면 곤란하기라도 한 얼굴이군요.”
“그, 그럴 리가요.”
티미는 리즈가 두려웠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뿌리고 다니질 않나, 마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조종하지 않나.
‘귀신같은 놈.’
티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얼빠진 아르빈트의 차남과 리즈는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리즈가 뭐 하는 녀석인지 리에르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물어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알면 안 될 것 같은 기운이 풀풀 풍기는 녀석이었기에.
리에르는 따라오지 않을 줄 알았던 리즈가 함께하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마음을 열 수 없는 녀석이지만 리즈에 대한 것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몬스터에게 죽을 일은 없었다.
어느새 카이샤 앞에 도달하자 리에르는 후우, 숨을 내뱉었다.
시간을 끌수록 에레사가 위험해진다.
안에 무엇이 있건 간에 가야만 했다.
리에르는 굳은 얼굴로 문에 손을 갖다 대었다. 망설이는 것도 아주 잠시였다.
가져다 댄 손을 조금 앞으로 뻗자 끼익, 문소리가 울렸다.
아르미안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리에르를 도망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에르는 도망치지 않을 거다.
이 앞에는 그가 사랑하는 에레사가 있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는 아르미안도 잘 알고 있었다.
-리엘.
주변에 티미가 있었기에 리에르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에 몬스터들이 있다는 건 알겠지?
리에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난 솔직히 이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고 싶어. 이 안에 있는 몬스터는 한, 둘이 아니야.
리에르도 느껴졌다.
-네 잠재 능력은 굉장히 강해. 조금만 시간을 가지면 넌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어.
대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직 힘이 불안정했다.
“알아요.”
리에르는 작게 중얼거렸다.
항상 약하기만 했던 리에르에게 강해질 수 있다는 유혹은 대단히 강했다.
하지만 그 최강이라는 이름에 에레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의미는 없었다.
-이 안에는 검은 숲의 중심체가 있어. 들어가면 위험할 거야. 그리고 그 사실을 리즈도 알고 있을 거야. 에레사도 리즈가 납치했을 수도 있어. 리즈는 널 각성시키고 싶어 하니까.
이유는 필요 없다.
‘어쨌든 에렌이 이 안에 있다는 거잖아요.’
에레사가 안에 있다. 그리고 그녀가 위험하다. 그것만으로도 리에르는 충분히 함정에 빠질 생각이 있었다.
아르미안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의 생각 이상이었다.
-그렇구나.
말을 하는 아르미안의 목소리가 점차 떨려오는 듯이 느껴졌다.
아니, 격앙되어 당장에라도 눈물짓듯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영문 모를 불안감이 한 스푼, 그리고 의문점이 두 스푼.
‘그런데 왜 날 각성시키고 싶어 해요?’
리에르는 궁금했다. 아르미안은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리즈 그는 너를 이용하고 싶어 하니까.
리에르는 머릿속이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조그만 힘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원하던 카이샤에 진학한다.
에레사와 같이 지낸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정작 자신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은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너무나 빨리 달라져 갔다.
그것도 단 며칠 만에.
리에르는 그동안 리즈가 자신에게 얼쩡거린 이유가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르미안. 의지를 가진 마법 검이자, 리즈와 함께했던 파트너.
분명 리즈에게 있어 아르미안은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반 불사와도 같은 포스의 존재.
광기를 가진 머더러 리즈에게 남겨진 이름은 아르미안이라는 단어 하나밖에 없었다.
차마 리에르는 리즈에 대해서 더 묻지 못했다. 이 이상 이들의 이야기 속에 발을 들였다가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치 늪처럼.
리에르는 검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검술을 연마하는 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 목숨을 건 전투를 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근처에 있는 사람과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었다.
나이를 먹고, 사랑을 하고, 그 뒤로 행복했습니다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리에르는 지금 해야 할 행동의 순서를 정확히 파악했다.
에레사를 찾는다.
에레사를 구출한다.
카에르 학생인 리에르가 고등 교육 건물의 구조를 알 리가 없기에, 티미가 자연스럽게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티미의 분위기로 봐서는 에레사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리에르는 왠지 모르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에렌이랑 같이 있었나?”
“그……래.”
티미의 대답이 시원찮았다.
“근데 왜 혼자 나와 있는 거야?”
“그건…….”
티미는 리에르의 질문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의 곤란함을 느꼈을까?
리즈가 대신 말을 이었다.
“슬슬 모여드는군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괴하게 생긴 무리가 하나, 둘씩 보였다.
이족보행 하는 도마뱀들. 물고기 비린내를 풍기는 비늘.
놈들의 세로줄 눈동자 여러 개가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두 분은 먼저 들어가시죠. 전 이것들을 처리하고 뒤따라가도록 하죠.”
리즈는 분명 꺼림칙한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같은 편이라면 든든한 보호자임은 분명했다.
리에르는 심경이 복잡해졌다.
이 앞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사이도 안 좋은 연적과 함께 가야 한다니.
리에르와는 반대로 티미의 입가에 옅은 미소기가 서려졌다.
티미의 입장에선 리즈만 없다면 어리바리한 꼬마 하나 해치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의 위에 설 수 있는 옷을 입고 태어났다.
재능 있는 사회 지배층의 교육을 받고 자라온 그였다. 태생도 모르는 은색 머리의 청년에게 패배하였을 때 집안의 어른들이 크게 실망했다.
단 한 번도 가문의 어른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았었다.
앞을 가로막던 은발 청년과 다시 한번 겨루게 되었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드러눕게 된 것은 자신이었다.
검술 대회라는 것은 그저 치장하기 위한 장신구에 불과했다.
귀족의 파티를 거닐며 가십거리를 만들기 위했던 것이, 이제는 그를 나락에 빠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트에게 잇따른 패배의 충격은 실의를 주었다.
명예가 망가졌다. 이인자라는 낙인을 찍고서 살아야만 했다.
불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유트의 친구인 낙제생 리에르에게 패배했다.
이 사건은 학원 내에 즐거운 가십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티미는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내몰리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소유했던 여성도 녀석에게 빼앗겼다. 프라이드 하나만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비참함을 안겨준 만큼, 뒤틀린 증오심은 리에르와 에레사에게 돌아갔다.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 거다.’
그동안의 수모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앙갚음은 당연한 거였다.
아무리 리에르가 강하다 해도, 불시의 일격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티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묘한 설렘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티미는 순간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루비 빛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미는 리즈와 시선을 마주치자 고양이 앞의 쥐처럼 무력한 공포감을 맛보았다.
그 두려움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되물을 여유도 없었다.
리즈는 리에르와 티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을 타고서 붉은색 기류들은 피를 뚝뚝 떨어뜨릴 듯 이글거렸다.
이내 모인 기운은 검붉은 화살이 되어 티미와 리에르를 향해 날아갔다.
“키헷!”
“카핫!”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간 붉은 기류는 몰래 다가오던 트리글로다이트를 토막 냈다.
“길을 만들어 드렸으니 가시죠.”
리에르는 도마뱀 몬스터보다 리즈 쪽이 더 징그럽다고 느껴졌다. 분명히 생긴 것은 잘생겼지만.
“빨리 앞장서.”
리에르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그러지.”
티미는 리즈의 눈치를 보면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는 리에르를 보면서 내심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전문 기사들을 통해 실전 경험도 있는 자신도 몬스터를 보니 두려웠다. 그런데 리에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정말로 무섭지 않은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평생의 수치가 될 것 같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에렌…….’
지금 리에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단 하나만 존재했다.
카이샤에서 실력이 좋은 여검사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원 내에서 한 이야기였다.
이런 괴물들 앞에서 그녀는 연약하기만 하다. 어디선가 두려워 떨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당장 목숨이 위급할 수도 있었다. 지금 이렇게 있는 동안에도 에레사에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랐다.
“빨리 가자.”
리에르가 서두르자 티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생각해둔 목적대로 일을 진행해야 할지, 이대로 도망을 갈지 망설여졌다.
‘일단 저 남자랑 떨어지는 거라면.’
티미는 리즈에게서 떨어지는 것만은 반가웠다.
리즈는 두 사람이 멀어지자 여유롭게 손을 휘저어 보였다.
매끄러운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자 붉은색의 룬문자가 서서히 빛을 뱉어낸다.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 하겠죠, 도마뱀 여러분?”
트리글로다이트들은 동료 다섯이 즉사했어도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녹슨 창을 앞으로 낀 채로 달려들었다.
평소의 그들이라면 리즈 같은 괴물에게 덤비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둠의 숲이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괴물이 있었다.
“키헤엣!”
“카아!”
리즈는 트리글로다이트들의 이판사판 공격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허공에 마나를 수놓았다. 곧 달려들던 트리글로다이트가 수박의 육편처럼 으깨져 나갔다.
* * *
카이샤의 내부는 예전의 활달한 기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앉아 있던 강의실은 삐걱거리는 문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강의를 끝낸 카이샤 학생들이 거닐던 잔디밭은 이름 모를 시커먼 덩굴에 감싸져 있었다.
리에르는 고대하던 카이샤를 이런 식으로 거닐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못내 입안이 썼다.
“얼마나 가야 해?”
리에르가 재촉하자 앞에서 걷고 있던 티미가 짜증을 부렸다.
“안달하지 않아도 다 와 간다.”
“뭐? 안달하지 않게 생겼어? 에렌은 내 친구이기도 하지만, 당신 연인이기도 하잖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레사와 티미가 연인관계란 것은 학원 내에 알려져 있었다.
티미는 리에르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내 연인이냐, 네 연인이냐?”
“뭐?”
생각지도 못한 티미의 말에 리에르는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에레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적인 티미에게 들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티미는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리에르를 보면서 이를 사리물었다. 여기서 화를 내봤자 의미가 없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이딴 놈에게 감정적이 되는 것도 우습지.’
티미는 그렇게 속으로 뇌까렸다. 하나, 다시 리에르의 얼굴을 마주하니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에렌을 구하고 나서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지? 나에게서 승리를 빼앗아 갔으니, 이제 여자도 빼앗을래?”
티미는 예전만 해도 지극히 냉정하고 현실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학우들이 기억하는 그의 기존 모습일 뿐이다.
지금 그는 질투심에 사무친 한심한 남자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