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67)
레필리아 레소드-67화(67/398)
레필리아 레소드 67화
각성(4)
이런 곳에서 말다툼할 시간은 없었다.
티미는 한숨을 쉬면서 감정을 갈무리했다.
“미안하군, 잠시 흥분했다. 에레사가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앞에 어떤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끼리 이럴 필요는 없다. 가지.”
“뭐, 그래.”
리에르는 울컥하는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에레사의 생사가 중요했다.
에레사뿐만이 아니라 엘빈과 함께 있을 엄마도 걱정됐다.
리에르는 될 수 있는 한, 한시라도 빨리 위험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무 말도 없이 앞장서서 걷는 티미의 뒤를 따라 리에르도 따라갔다.
-저 남자 너에게 살기를 가지고 있어.
아르미안은 티미에게서 날카로운 살기를 느꼈다. 언제든지 리에르를 죽일 것처럼.
“살기를 가질 만하죠.”
그런 그녀의 걱정을 몰라주고 리에르는 태평한 소리로 소곤거렸다.
같은 남성으로서 그런 감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빼앗아 간다는 말은 분명한 어폐였다.
리에르 입장에서는 에렌을 빼앗긴 것은 티미가 아닌 자신이었기에.
-그래.
아르미안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지금의 리에르는 에레사의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듣지 않았고,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만 맹목적이었다.
아르미안은 여러 번의 비극을 경험했다.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부족했다. 사용자들은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고, 비극적 최후를 받아들였다.
아르미안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위기감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더는 걷잡을 수가 없다.
위기가 찾아올수록 각성할 위험성이 높아진다.
각성이란 단어가 달콤할지도 모른다. 하나,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몸을 망가뜨리는 마약과도 같다.
아르미안의 걱정과 충고도 리에르에게는 조언이 되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는 병.
아르미안은 수 없는 세월 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고독을 곱씹었다.
항상 그래 왔을 텐데 다시 한번 실망감과 슬픔을 맛봐야만 했다.
1대 포스 엘 파실드는 영원을 함께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 그녀를 떠났다. 그리고 엘 파실드는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르미안은 그를 말렸다.
그때도 그녀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2대 포스 리즈는 사랑하는 연인 마리의 죽음으로 비정상 각성을 하였다. 그리고 아르미안의 노력으로 그의 광기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했었다.
아르미안의 존재는 리즈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연인 마리의 대용품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금단에 손을 대고, 아르미안과는 등을 돌리게 되었다.
고독.
그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영원을 사는 존재에게 있어서 갈구함과 열망이 없는 것은 빈 컵과도 같았다.
물이 채워지지 않는 컵은 공허하고 외롭고 나약하다.
리즈가 뒤쪽에서 몬스터를 막아주는 덕분에, 두 사람을 막아서는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둘은 금방 에레사가 있던 방까지 이르렀다.
티미는 에레사가 무사했으면 하는 바람보다는 자신의 행실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지.’
에레사가 아깝긴 하지만, 곤란해지는 것보단 낫다.
‘이게 다 저놈 때문이지만.’
티미는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리에르만 곁에 없었다면 그녀를 설득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였다.
에레사는 다정하다. 얼마든지 자상한 말로 구워삶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리에르는 달랐다.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고, 그의 뒤에는 유트가 있었기에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이 안이다. 에렌은 여기에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한 뒤 티미는 잠시 문 열기를 주저하였다. 그 망설임을 기다리지 못하고 리에르가 먼저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강의실 안은 참혹한 현장이었다.
썩은 비린내가 가득했으며 책상과 의자들은 전부 부서져 강의실 벽에 처박혀 있었다.
바닥도 무언가가 폭발한 듯이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그 순간 리에르의 시야 안으로 에레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에렌!”
에레사는 왠지 낯익은 붉은 망토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는 트리글로다이트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 시체의 파편들은 하나같이 쓰러진 에레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에레사에게 공격을 하다가 도리어 공격받고 으깨진 분위기였다.
리에르는 불러도 움직이지 않는 에레사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뛰어들었다.
에레사는 아직 기절한 상태였으며, 리에르는 그녀에게 온정신을 쏟고 있었다.
티미는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리에르의 뒤를 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리에르는 쓰러진 에레사를 품에 안고서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고운 입술은 찢어져서 피가 적셔져 있었다. 뺨은 심하게 얻어맞아 부어 있었다.
더더군다나 팔도 상처투성이였고, 입고 있는 블라우스도 찢어져 있다. 그녀의 하얀 살결을 가진 가슴 굴곡까지 거의 드러나 있었다.
저벅, 저벅.
티미는 검을 가볍게 말아 쥔 채로 리에르의 등 뒤로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에레사에게 온 정신을 쏟아붓고 있는 리에르의 등은 허점투성이였다.
그대로 검을 찔러 넣기만 하면 얄미운 녀석을 해치울 수 있었다.
그때 티미는 등줄기에 오싹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전문 기사는 아니지만 기사 수련생으로서 겪었던 경험이 있다.
명백한 살기.
그 살기는 지금 이 순간 위험을 느끼게 했다.
“크르르.”
낮게 울리는 짐승의 소리는 두 사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리에르의 등 뒤를 노리던 티미는 검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도마뱀 인간들과는 달랐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보랏빛 입술. 얼굴에 딱딱한 비늘이 돋아나 있는 그것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놈의 곡선으로 꺾인 뿔은 보기에도 위협적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등 뒤의 꼬리가 바닥을 툭툭 치고 있다.
리에르는 이 녀석과 마주하자 리즈와 마주친 듯한 공포감을 느꼈다.
-리엘……. 도망쳐!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 없는 아르미안이었다.
리즈와 싸웠을 때도 일단 리에르의 경험을 쌓게 해주려 했었고, 와이번과 목숨을 걸고 싸웠을 때도 그를 격려하였다.
처음으로 도망치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키이이이이이이이!”
“아악!”
리에르와 티미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머리를 감싸며 쓰러졌다.
폭룡 네버 에이지의 용기사가 내뱉는 음성은 일반인이라면 미치게 만들어버린다.
“뒤통수를 치나 했더니. 이런 선물을 주고 가는가. 네 녀석이 라에룬이렷다?”
뇌를 후벼 파는 듯한 고통. 그것은 전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가는 길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리에르는 용기사가 말하는 것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고통뿐.
-리엘, 정신 차려! 도망가야 해!
아르미안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리에르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검을 잡아야 할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것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이대로 있으면 너뿐만이 아니라 에레사도 죽어!
아르미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금 리에르를 독려했다.
리에르의 머릿속은 순간 뜨거운 물을 뒤엎은 듯이 고통이 올라왔다.
아픈 와중에도 리에르는 품 안에 안은 에레사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두통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에렌…….’
이 와중에도 리에르는 에레사의 안위를 걱정했다.
물론 에레사는 무사했다. 겉으론 외상을 입었으나, 목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리에르는 양쪽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뗐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
리에르는 있는 힘을 다해 에레사의 몸을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음성을 정면에서 듣고도 일어나는 리에르를 보며 용기사의 세로줄눈이 껌벅거렸다.
“더러운 라에룬이여, 이 정도론 굴복하지 않겠단 건가!”
용기사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티미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리에르는 눈썹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대로 있으면 에레사는 죽는다.
그 일념으로 이를 악문다.
-상대의 주파수에 맞춰 네 청각을 조절 중이야. 조금만 있으면 익숙해질 거야.
“고마워요.”
그렇게 중얼거린 리에르는 투명한 검을 들어 올렸다.
용기사는 리에르가 싸울 태세를 갖추는 걸 보고서 흥, 하는 코웃음을 쳐 보인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강력한 괴물에게도 여러 가지 표정이 보인다. 리에르는 신기함마저 들었다.
“댁은 누구야?”
“네 안에 있는 라에룬의 혼이 이 나를 모르는가?”
“아까부터 라에룬, 라에룬. 내 이름은 리에르 님이시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내뱉는 괴물에게 리에르는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도마뱀 아저씨, 암컷 도마뱀들에게 인기가 없으시겠네. 상대랑 대화할 땐 서로 공통된 화제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냐? 게다가 사람을 쓰러지게 만드는 입 냄새라니……. 양치는 하고 다니나?”
-피해!
아르미안의 앙칼진 목소리가 리에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휘릭. 보라색 섬광이 번쩍하며 리에르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몸을 조종해서 무릎을 굽혔다.
보라색의 섬광은 아슬아슬하게 리에르의 머리카락 끝자락만 베었다. 하지만 리에르는 마치 목이 베인 것과 같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내저었던 손을 회수한 용기사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암컷에게 인기 끌기 좋은 머리를 달아주려 했는데 아쉽구나.”
“아, 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했던가.
리에르는 상대에 대한 위압감을 몰아내려다가 오히려 몸과 머리가 따로 놀 뻔했다.
-저건 리즈와는 달라. 리즈는 즐기지만 지금 눈앞의 상대는 인간을 증오하는 용족이야. 무조건 도망쳐!
리에르는 무조건 도망치라는 그녀의 말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디로 도망을 치란 말인가?
에레사는 아직도 기절한 상태였고, 티미는 거친 숨소릴 내뱉으며 헐떡이고 있었다.
아르미안 덕분에 지금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혼자서 상대할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시간 끌 것 없지. 라에룬이여, 네 목을 취해 주인의 사슬을 풀겠노라.”
용기사는 맹수처럼 발톱을 세웠다. 그 크기가 단검만 한 크기인지라 제법 위협이 느껴졌다.
보라색의 섬광은 그의 손안에서 춤추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저기…….”
용기사의 맹수 같은 손이 들어 올려졌다.
저런 보라색의 섬광은 필요도 없었다.
달려들어 할퀴기만 해도 사람의 살은 두부처럼 으깨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잠깐만요!”
리에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용기사의 손이 허공을 할퀴었다. 그와 동시에 보라색 섬광은 긴 꼬리를 흩뿌리면서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눈 한 번만 깜박거리면 순식간에 다가오는 속도.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하고 몸도 반응하지 못한다.
수많은 실전 경험이 있다면 감으로라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리에르에게 있는 것은 몇 차례의 검술 대전, 그리고 수업에서 대무를 펼친 경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남과 다른 특수성이 존재했다.
그것은 말하는 검이자 스승인 아르미안의 도움이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검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바닥을 짚게 하였다.
귓가를 스치는 섬뜩한 빛줄기와 파공음. 붉은 파편들이 하늘거리며 눈 앞을 가린다.
콰앙!
리에르를 스치고 지나간 섬광은 그대로 뒤편의 벽면을 깨부쉈다.
리에르는 차마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 번째 공격도 그가 피해내자 용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 어떠한 적이라 해도 주인에게 받은 용혈(Dragon Blood)은 눈앞의 적을 토막 내었다.
그것을 두 번이나 휘둘렀어도 멀쩡한 리에르를 보면서 몹시 분한 듯이 이를 갈았다.
“그렇군, 그나마 강자라는 건가.”
-리엘, 마침 잘됐어. 벽면에 구멍이 생겼으니 거기로 빠져나가!
“하지만…….”
리에르의 시야에 에레사가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