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69)
레필리아 레소드-69화(69/398)
레필리아 레소드 69화
각성(6)
티미는 명백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리에르는 붉은 남자 이상의 공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티미는 다시 한번 흠칫한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방안에 들어선 리즈는 에레사에게 씌워주었던 자신의 망토를 집어 들었다.
평소의 유유자적하던 얼굴이 아닌 냉기가 서린 듯한 얼굴이었다.
피를 부르는 듯한 리즈의 루비 빛 눈동자는 자신과 똑같은 눈동자를 한 청년을 바라봤다.
“무슨 말인가?”
리에르는 이제 어엿한 포스로서의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이질적인 기운과 함께 말투조차 달라져 있었다.
“말장난하고 싶지 않군요. 지금 리에르 군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리즈 역시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리에르를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지독한 살기 속에서 티미는 말 그대로 미쳐 버릴 것 같은 충동이 일어났다.
지금껏 느껴보지도 못했던 공포감이 심장에서부터 역류해 온다. 당장에라도 창문 밖을 뛰쳐나가고 싶은 절실한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리에르가 아니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리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려 보았다. 리즈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르미안도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포스로서 각성했기 때문에 튀어나온 본능이 아니었다.
리에르가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아르미안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으니, 같은 포스인 리즈가 속을 리 만무했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리즈의 등 뒤로 붉은색의 마나 깃털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깃털은 일체화되며 시뻘건 화염의 날개처럼 펄럭이기 시작했다.
리즈의 긴 손가락이 리에르를 향한 것과 동시에 붉은색 창이 날아들었다.
리에르는 풋, 입가에 미소를 흘린 채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발을 한 번 굴렀다.
쏴아아!
리에르의 앞에 검은색의 벽과 부딪힌 붉은 색의 창이 허공중에 빛을 흩날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격이 급하군, 자네.”
“제 계획에 끼어들어서 엉망으로 만든 주제에 다정한 말이라도 기대하셨습니까. 내 연출 안에 당신이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하고 이용해 왔다. 바로 이날을 위해서 안배해 왔던 것들, 포스로서 리에르를 각성시킨다는 단계까지 이르렀지만, 그 이후가 리즈의 목적이었다.
준비해 왔던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는 이 순간에 리즈, 그조차도 전혀 예상 못 했던 변수가 있었다.
리에르의 인격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리에르의 안에 잠재된 재능과 포스로서의 강력한 마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존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티미와 같은 인물들도 조종하였고, 폭룡과 그의 수하들까지 이용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잽싸게 모든 것을 가로챘다. 정체 모를 그를 향해 리즈는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리즈의 등 뒤로 붉은 깃털들이 맹렬히 타올랐다.
마치 공작새처럼 화려한 문양을 뿜어내는 등 뒤의 날개는 아름다움과 동시에, 맹목적인 두려움을 불러들인다.
그것을 보는 티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느껴졌다.
-리즈…….
아르미안의 눈에는 슬픈 절규로 보였다.
리즈는 자신의 광기를 누르면서까지 이런 알 수 없는 일을 벌였다.
아르미안은 그가 원하던 목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왔기에 그를 잘 알았다.
목적과 이유. 그것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너무 화내지 말게. 가로챌 생각이 아니었네.”
리에르는 자상하고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18년 이상……. 아니지. 벌써 30여 년은 기다렸던 세월이군.”
리즈는 상대가 말장난한다고 생각해서 기운을 끌어모았다.
적을 놓치지 않는 강력한 피의 창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생성되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손을 저어 보였다.
“농담이 아닐세. 난 이 아이의 삼촌이니까.”
리즈는 잠시 멈칫했다.
리에르는 리즈가 공격을 멈추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이 아이의 아비인 로이의 오랜 지기이자, 이 아이의 어미인 라라의 사제(elder)였지.”
설명하던 리에르는 얼굴에 맞지도 않는 경륜 있는 미소를 흘리며, 나지막하게 다시 말했다.
“내 본래 이름은 라에룬 비 그라비스틴, 라엘이라고 불리던 남자라네.”
대륙이 낳은 젊은 마도사.
어렵기로 유명한 중력 마법 활용을 잘하던 그는 그라비티(Gravit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거대 제국 오트리아가 국력의 쇠퇴로 인해 분열되기 전부터 천재로 소문난 인물이다.
신검의 로이스타와 맹우이기도 했던 그가 행방불명된 것도 벌써 몇십 년 전의 이야기였다.
그동안 봉인되어 있던 아르미안으로서는 라에룬이라는 남자에 대한 것을 잘 몰랐다.
하지만 리즈는 대륙을 방랑하고 다녔기에 라에룬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티미는 말 그대로 이제 미쳐가고 있었다.
그의 정상적인 생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능력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제는 잠적해 버린 대륙 유일의 대마도사인 라에룬이라니.
마치 수면 마법에 걸린 듯, 기절해 있는 에레사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들어본 것 같군요.”
공격을 멈춘 리즈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언제라도 핏빛 창을 쏠 수 있게 대비하고 있었다.
“허허, 그거 영광이구먼. 포스 오브 머더러가 미천한 마법사 따위의 이름을 알아준다니. 그런데 학살자 리즈가 이렇게 곱상한 얼굴인지는 몰랐구려.”
이미 리에르, 아니, 라에룬 역시 리즈에 대한 것은 눈치채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겉으론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상대에게 치명타를 넣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리즈는 머더러의 힘으로 신의 창을 들어 상대를 조여들고 있었다.
라에룬은 언제든지 그 공격을 막아내고서 카운터를 칠 준비를 했다.
“제 정보통을 통해서 들었던 이야기는 사실이었나 보군요.”
잠시간의 정적 끝에 리즈가 먼저 매혹적인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가 가진 미소는 그림처럼 아름답고 수려하지만, 그것은 상대를 현혹하게 만드는 위장일 뿐이었다.
리즈라는 남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라에룬 역시, 사냥감에게 보여주는 가식을 지어 보였다.
“무슨 말을 말인가?”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이 태어났는데 그 아기씨는 울지를 않더라.
아기씨가 태어난 그 날 불길한 하늘의 징조가 덮치니 사람은 두려워하더라.
모진 고통과 이기 끝에 태어난 저주받은 아기씨의 두 눈에서 어둠만이 그려졌네.
그에 가슴 아파하던 친구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네.
사악함을 봉한 채 사라진 그를 존경하며, 그리워하여 그의 이름을 빌렸네.
노래처럼 흥얼거리던 리즈는 감았던 두 눈을 뜨면서 라에룬을 보았다. 여전히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당신의 이야기이었던가요?”
“알고 있었나?”
“당신은 아이를 위해 포스를 봉인한 것이 아니군요. 포스의 힘을 탐낸 겁니까?”
“하하하. 졌네, 졌어.”
리즈의 말에 라에룬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는 모습 그 자체가 리에르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아르미안은 가슴이 미어져 오는 것 같았다.
자신 때문에 리에르는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도 알지 못하는 음모는 아직도 숨겨져 있었다.
“설마 라에룬이라는 이름만으로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볼 줄은 몰랐네.”
“그런 유치한 수작도 몰라볼 거란 생각은 제게 모욕입니다.”
“이런, 자네는 설마 아직도 날 적대하는 건가? 리에르이든, 라에룬이든 이제 우리는 같은 종족이 아닌가?”
라에룬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봉인을 깨고 나왔을 때는 표정 관리도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원하는 대로 연기가 가능했다.
실로 오랜만의 세상이었다.
그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쁨 뒤에는 리에르가 희생당해야만 한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제 계획에는 리에르 군이 있지, 당신은 없습니다.”
리즈의 루비 빛 눈동자에서 다시금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주변에 산개해 있는 붉은 창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네 왜 이렇게 꽉 막혔나? 자기 힘도 다룰 줄 모르는 아이보단, 힘을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연륜 있는 내가 동지로 알맞지 않겠나?”
“당신은 없습니다.”
라에룬은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는 리즈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자네가 살인할 권리는 지녔지만, 흡수할 권리를 가진 이 힘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
라에룬은 슬슬 본성을 드러내며 송곳니를 내밀어 보였다.
그의 말은 허세가 아닌, 진실이었다.
태아였을 적부터 모든 것에 대해서 흡수할 권리를 지녔다. 덕분에 자신의 어미도 잡아먹을 뻔했다.
대마법사인 라에룬의 공격 마법도 전부 빨아먹던 아기가 이제 청년이 되었다. 마력도 마력이지만, 체력과 검술도 올라가 있으니 라에룬에게는 최고의 몸이었다.
더더군다나 리즈의 주공격은 피로 이루어진 살인술. 모든 공격에 대해서 흡수할 권리를 가진 리에르에게 쉽게 피해를 입히기는 어렵다.
즉, 리에르가 가진 힘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백전노장인 라에룬은 이미 그러한 점을 짐작하고서 리즈를 협박하였다. 하지만 리즈의 굳어졌던 얼굴에 피식, 웃음이 머금어졌다.
“리에르 군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아니, 오랫동안 봉인되어서 움직임이 익숙지 않은 것 같군요. 얼마나 시간을 끌기 위해 노력을 하실 건가요?”
리즈의 말에 핵심이 찔린 라에룬은 웃는 얼굴이 짐짓 굳어졌다. 하지만 다시 그는 웃는 얼굴을 지었다.
‘단순히 무력만 강한 것은 아니군.’
라에룬은 눈치 빠른 리즈의 발언에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사실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덕분에 정상적으로 힘을 사용할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이라면 모를까. 끝없이 솟아오르는 마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리즈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우아하게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고 있던 핏빛의 창이 칼날의 형태를 바꿨다.
강력한 포스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리즈는 차가운 눈동자로 붉은 입술을 일그러뜨려 미소를 흉내 냈다.
“부활한 것을 후회하게 해드리죠.”
리즈는 그대로 캐스팅을 시작했다.
“파공 안에 이르는 내 눈 안의 진자여……. 내 눈앞의 존재, 거역된 존재를 앗아주소서…….”
리즈의 눈동자가 멈춘 그곳을 향하여 핏빛의 창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날아드는 공격을 보며 라에룬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사리물었다.
라에룬이 리에르의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은 초월기는커녕, 마력의 분석도 끝나지 않았다.
라에룬은 왼발을 힘껏 땅에 굴렸다. 검은색의 길쭉한 석판들이 라에룬의 주변을 감싸듯이 솟아올랐다.
검은색 석판은 리즈의 붉은색 창들을 전부 흡수하며 라에룬을 지켜냈다. 하지만 리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허공에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지휘하듯이 펼쳤다.
“아울러 파멸의 검을 부르노니…….”
웨이브 캐스팅(Wave Casting).
라에룬의 등이 한순간 오싹해져 왔다.
마법 주문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나의 연소점을 파악해야 하며, 마나 혼합에 비율과 조정을 해야 한다.
마나를 조합하기 위해서는 수식어를 외워야 하며, 캐스팅을 시작할 때에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즉 말하자면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는 무방비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수련에 수련을 겪은 몇몇 마법사들이 가능한 경지가 있었다.
그것은 주문을 외우는 동안 적의 화살 혹은 날아드는 검을 피하기 위한 무브 캐스팅(Move castin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