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7)
레필리아 레소드-7화(7/398)
레필리아 레소드 7화
축제(1)
검이 사람의 몸까지 조종한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동화에서 나오는 전설의 용사도 자신의 검을 들고서 사악한 용을 베었다는 이야긴 나온다.
하지만 전설의 용사님이 자신의 검에게 조종당해 싸운다는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다.
“전에 혹시 마녀였다던가?”
-응?
“옛날에 사악한 마녀였는데 아리따운 공주의 몸을 빼앗는 것에 실패해서 지금은 검에 봉인되었다던가.”
-그 아리따운 공주가 나일지도?
“내 육체에 대한 권한은 나에게 있습니다. 지금 다시 날 눕혀주고 날 쉬게 해줘요. 난 정당하게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깔깔 웃음을 한 번 터트렸다.
리에르는 자신의 오른손이 주먹을 쥐는 것을 보았다.
퍽!
주먹이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리에르는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하고서 한마디 내뱉었다.
“오, 신이시여. 맙소사!”
-호호. 잘 봤지. 이젠 말대꾸 자꾸 하면 때려 줄 거야.
“아, 네 그러시군요.”
리에르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너무 어이없어서 화를 내기도 힘들었다.
‘무슨 놈의 검이 사람의 몸까지 조종해?’
리에르는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검을 떠올렸다.
사람의 몸을 지배하는 마검.
힘을 원하는 자에게 힘을 주고, 그 강력함만큼이나 소유자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저주받은 검.
‘아, 이로써 나도 검에게 조종당해서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말겠구나. 기왕이면 영웅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건만.’
리에르가 쓸데없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그녀는 그것을 느꼈는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쳐 보였다.
이윽고 리에르는 마음대로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아아, 남의 몸을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군요.”
만사를 포기한 리에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에게 지배된 리에르의 몸은 목검을 손에 쥐고서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호에서 호로, 선에서 선으로. 자신이 지금껏 휘두르던 투박한 움직임이 아닌 매끄럽고도 간결한 동작들.
리에르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또 불필요한 말만 주렁주렁 달려 나올 것 같았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발동작, 그리고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하는 땀.
바람의 설렘이 기분 좋게 느껴져 왔다.
‘이건…….’
리에르는 자신의 몸이 허공에 그려 넣는 검의 호선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검무를 추고 있었다.
자신은 전혀 할 수 없는 화려하고도 날카로운 춤사위였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호선은 바람을 찢어 갈긴다.
바람과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로 이루어진 것 같은 일체감이 느껴졌다.
착각이란 것을 알지만 주변의 풍경에 녹아들고,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황홀했다.
비록 자신이 만들어내는 검무가 아니지만, 충분히 전율을 느꼈다.
‘뭐야, 이건…….’
리에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둔하디둔한 자신의 검술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검의 호선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이야.’
처음이었다. 리에르가 검술을 익힌 것은 환경적으로 강요받은, 말하자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들만 모인 십일검 기사단의 단장인 아버지.
천재 유격기사이자, 최연소 기사 대장인 친형.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한 검술은 금방 한계를 드러냈다.
어차피 남자는 강해야 하니까 검술 정도는 배워 둬야지. 라는 어설픈 생각.
그 어설픈 생각은 더 깊은 상처만을 남겼다.
어차피 형과 아버지를 따라갈 수는 없으니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변명과 핑계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육체가 빚어낸 화려한 검무는 빠르게, 그리고 전율을 느끼게 하였다.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는 달리 마음은 편안했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흘러져 내려와 코끝을 타고 턱을 지나 더운 목덜미에 적셔진다.
‘기분이 좋다.’
뒷마당에 자란 풀들이 리에르의 발에 밟힐 때마다 허리를 구부렸다.
발이 떠나자 그들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다시 한번 발이 풀들을 밟았다.
재차 밟힌 풀들은 화가 나는지 고개도 들지 않고 땅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었다.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혔다.
마치 리에르의 등을 시원하게 감싸 안아 주는 것과도 같았다.
“에휴, 제대로 데이트 한 번을 못 하네.”
오래간만에 꽃단장하고 나갔었던 에레사는 잔뜩 토라진 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연인이 검술 대회 준비에 바쁜지라 데이트 약속이 취소되고 말았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검술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두각을 보이는 남자친구는 자랑거리지만, 이럴 땐 섭섭하다.
뾰로통한 에레사는 집에 들어가려다 문득 리에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리에르는 오늘도 수련 중이려나?’
옆집에 살아 항상 같이 놀러 다니고, 항상 같이 지냈던 가족 같은 아이.
그런 그가 검술 수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고서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 들어서려던 에레사는 호쾌한 파공음을 들었다.
‘리엘인가?’
에레사는 리에르가 오랜만에 훈련하는 소리를 듣고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뒷마당에 들어선 그녀는 리에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인사를 하려는 순간 그녀는 놀라움을 느꼈다.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에레사는 저절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투박하기만 했던 리에르의 검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름다운 검무를 뽑아내고 있었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땀투성이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았다.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수련이 즐거운 듯이 웃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냈기에,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하는 에레사였다.
‘어느새 저 정도로…….’
에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혹시나 리에르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조용히 돌아섰다.
에레사는 다시 한번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힘내, 리엘.’
리에르는 에레사가 있던 것도 몰랐다.
정신없이 검무를 추어내던 리에르는 미친 듯이 타오르는 갈증과 피로감을 느꼈다.
결국, 리에르는 숨을 헐떡이면서 그녀에게 하소연했다.
“이제, 그만 쉬시죠. 헉헉.”
-응?
“이제, 그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은 너 혼자 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 리에르는 멈칫하였다.
근육이 파열될 것 같은 통증이 팔다리를 타고 올랐다.
숨을 쉬는지, 쉬지 않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턱 끝까지 벅차오른 헐떡임.
리에르는 더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에고 소드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된 거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같은 스타일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 더 빠르거든. 처음엔 내가 조종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 혼자 잘하더라?
그녀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리에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피곤이 몰려든 리에르는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서 땅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맑은 하늘이 눈자위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눈부셔서 리에르는 손차양했다.
실컷 움직이고 땀을 빼니 근육에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전해진다.
-레필리아 레소드야.
“네?”
그녀가 갑자기 생뚱맞은 말을 내뱉었다.
-방금 네가 배운 검술 이름.
“처음 듣는 검술인데요.”
리에르는 들어본 적 없는 검술이었다.
-검의 춤사위라는 뜻이야. 검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마나를 사용하는 검술.
‘춤사위라…….’
리에르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춤사위라는 말마따나 방금 그 검술은 검무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리에르는 낯선 단어를 들은 것 같아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마나?”
-응. 마력의 단위 개체.
무슨 의미냐고 리에르가 다시 물으려고 하기 전에 그녀가 다음 말을 시작하였다.
-레필리아 레소드라는 것은 마검술(魔劍術)이야.
“설마……. 마법을 사용하는 검사라는 건가요?”
흔히 책에서 절대 무적을 자랑하는 주인공 용사들은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과 마법사를 일행으로 데리고 다녔다.
용사는 특이하게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때도 있다.
둘 다 사용하면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검과 마법을 조합한 용사의 검은 그야말로 필살이었다.
용사의 이야기 같은 것은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로망을 품는다.
리에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검사는커녕, 마법사도 없는 시대였다.
마지막 마법사라고 불리는 중력의 마도사 라에룬 비 그라비스틴을 끝으로 마법의 시대는 종막을 맞이했다.
-모든 사물에는 마나가 있어. 바위에도 풀에도 사람의 몸도 저 푸른 하늘 역시 마나로 이루어진 가시적인 단위지. 체술을 익히는 무투가도 검술을 사용하는 검사도 마나 단위 아래서 활동해.
“그렇군요.”
-레필리아 레소드는 그러한 마나 연소 단위를 극한으로 올린 검술이지.
“이해가 안 갑니다만.”
리에르의 말에 그녀가 어휴, 하는 소리와 함께 낭랑한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말귀를 잘 알아먹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논리보단 육체파였지?
“논리는 육체적으로 약자들의 무기와도 같죠.”
-말이나 못 하면. 눈 감아봐.
일단 리에르는 별 의심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땀으로 질퍽하게 적셔진 셔츠를 식혀주는 바람도 풀밭이 날리는 소리도 라일라가 음식을 하는 고소한 냄새도 코끝을 간질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그녀의 명랑하다 못해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 떠봐.
눈을 지그시 열은 리에르는 자신의 주변 환경이 변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누워 있던 풀밭은 구체적인 형상보단 초록빛의 물결이었고, 항상 유트와 걸터앉아 있던 바위는 짙은 갈색의 덩어리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공기 중으로 푸른색의 물결과 붉은색, 노란색 각기 다른 색들로 세상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신의 집 공터였지만 이곳은 더 이상 그가 알고 그가 지냈던 공간이 아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마나들은 각 성질에 따라 세상에 구현되고 각자의 색을 지니고 있어. 불, 물, 빛, 어둠, 대지, 대기와 같은 속성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이것이 세상을 구성하는 미시적인 요건들이며 각 마나 원소 연소점을 다루게 된다면 마법의 구현이 가능하지.
“설마 제가 알아들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리에르는 눈앞의 빛의 아지랑이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구체 하나를 매만져 보였다.
뭔가 뭉클거리는 부드러운 느낌이 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별 느낌이 없었고 따뜻한 기운만 손안에 가득 차올랐다.
-느낌이 어때?
“네? 신기하군요.”
-아니 방금 넌 빛의 연소점을 건드렸어.
“별 느낌 없는데요. 그냥 따뜻하다는 정도?”
별걸 다 묻는다는 생각에 리에르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머리가 나쁘다고 마나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니구나.
“욕하는 거죠?”
리에르의 시큰둥한 말에 마치 고개를 젓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 말투로 넌지시 대답하고 있었다.
-칭찬이야. 넌 검술에 재능은 없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뼈저리게 느끼고, 사무치게도 알고 있던 운명.
리에르는 그녀에게 고마움의 표현을 하기 위해 가장 거칠고, 가장 표독스러운 단어들을 조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녀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넌 역시 마법에 재능이 있어.
“마법요?”
-그래. 예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리에르는 예전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도 들었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