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71)
레필리아 레소드-71화(71/398)
레필리아 레소드 71화
운명의 수레바퀴(1)
제국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무렵. 부활한 네버 에이지는 어둠의 숲을 필두로 대륙을 불태웠다.
그것을 토벌하기 위해 제국의 대군이 파견되었고, 많은 이들이 죽었다.
어찌 보면 제국이 몰락한 이유는 토벌 탓이 컸다.
젊고 유망한, 제국에 충성하는 이들이 아깝게 목숨을 잃었으니까.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간신들은 뒤에 숨어서 목숨을 연명했다.
폭룡 네버 에이지를 상대로 인간이 승리하였을 때, 남은 간신들은 제국의 위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였다.
결국, 제국의 현 상태를 보고 실망한 많은 영웅은 등을 돌렸고, 쇠퇴를 계속하던 제국은 이름만 남았을 뿐이었다.
폭룡 토벌 때 참여했던 로이스타는 그 전투에 살아남아 신검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마법사였던 라일라와 결혼했다. 그리고 대륙 유일의 7급 마도사인 라에룬은 폭룡을 봉인한 마력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파에트는 아레스트 영지에서 나온 많은 영웅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 라일라마저도 당시엔 전장의 꽃이라 불리는 아레스트 영웅 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힘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파에트는 지금 그 당시 활약했던 영웅들이 자신의 곁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되도록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너무나 늦어버렸다.
“부디 무사하기를.”
파에트는 부질없는 기도를 반복하며 고깃덩어리로 가득한 도로 위를 질주하였다.
지독한 죽음의 향기가 느껴졌다.
파에트는 자신의 소망이 부질없지 않기를 기도했다.
“대장, 급한 것은 알겠지만……. 다들 먼 길을 행군해 왔습니다.”
부하의 말에 파에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은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
처음 페이서스 입구부터 현재 달려온 곳까지 멀쩡한 곳이 없었다.
파에트도, 기사도 지옥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실감했다.
바닥은 선혈로 그려진 카펫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찢긴 살점과 피에 적셔진 뼛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신발에 짓밟히는 적출된 안구와 연분홍 내장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구토 증세를 일으켰다. 토막 난 시체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분노와 조급함이 파에트를 채찍질했다.
그의 기사들은 기묘한 두려움에 빠졌다. 만약 대장이 파에트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도시 하나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을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칠검 기사대는 자랑스러운 십일검 기사단의 일부다. 스스로 정예를 자처했다.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겨우 오십 명에 불과했다.
“미안하군, 모리스.”
파에트가 젊은 나이에 대장의 위치까지 오른 것은 로이스타라는 존재 때문은 아니었다.
그 자신의 실력은 이미 대륙에서 손가락에 꼽혔으며, 부하들을 통솔하는 능력, 그리고 인품까지 겸비했다.
칠검 기사단 서열 2위인 모리스의 말에 파에트는 조급한 마음을 최대한으로 가라앉혔다.
자신이 기억하는 페이서스는 검은 숲이라 해도 쉽게 끝장날 영역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디타 해적단, 그리고 해류의 몬스터들을 상대로 굳건히 빗장 문을 열지 않았던 땅이었다.
기사단보다 부족할지 모르나 풍부한 실전 경험, 그리고 그들만의 굳건함이 있다.
페이서스 가디언이 쉽사리 굴복한다는 것은 쉽게 예상이 가지 않았다.
“모리스, 대원들과 말을 쉬게 하라. 20분 후에 다시 출발하겠다.”
“예.”
험상궂은 인상의 모리스는 겉 생김과는 달리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일사불란하게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쉬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리스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 검은 숲에 대한 정보를 교육했다.
검은 숲 정벌에 나가본 인원도 있지만, 아직 나가보지 못한 신규 대원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교육은 대원들의 목숨을 책임질 수도 있었다.
보통 기사들이 입는 강철 갑옷의 무게가 40㎏ 이상이다.
칠검 기사 대원들은 빠른 기동성을 위하여 20㎏의 경량화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경량화되었다고 해도 갑옷의 무게는 장시간의 이동에 불편함이 있다. 당연히 갑옷 내부는 발열과 땀으로 가득하다.
20분의 짧은 휴식이 너무나도 달았다.
그런 달콤한 휴식 와중에도 작전에 대한 브리핑이 계속 이어졌다. 평소 같으면 귀를 닫고 드러누웠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나같이 잘 벼려진 도검처럼 날카로운 상태였다.
평소에는 자신들의 젊은 대장을 어떻게 골탕 먹여볼까 궁리하던 이들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전장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 웃고 떠들지만 언제 자신의 동료가, 전우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널지 몰랐다.
혹은 자기 자신이 내일을 상상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순찰을 다녀오겠다.”
파에트는 혼자 몸을 움직였다. 그 역시 피로함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나, 가족들의 걱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파에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20대 후반의 단발머리 기사가 따라나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맙군. 하나 모리스가 하는 이야기들은 자네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다.”
“이미 출동하기 전에 숙지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했을 건데?”
“선배들이 출동 전에는 철야를 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젊은 기사의 말에 파에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그렇게 공부를 좋아할 리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골탕 먹이기 위한 농에 불과했다.
“이름이 뭐였지?”
“윌러입니다, 대장님.”
“좋네.”
파에트의 말에 윌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답했다.
험악한 인상의 모리스는 생긴 것답지 않게 굉장히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전투가 벌어질 지형을 설정하고, 적들의 정보에 대해서 미리 숙지하여 부하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었다.
파에트는 꼼꼼한 스타일은 되지 못했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뛰어난 실력은 지녔지만, 업무 정돈 같은 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슨 문서들을 보더라도 그게 그거 같고, 졸음이 쏟아졌다.
부하들은 파에트가 잘생기고 실력 좋고, 집안 좋아서 신은 불공평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파에트는 모리스 같은 사람을 보면 각자에게는 주어진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떨 땐 그들의 특출난 재능이 부럽기까지 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재능들.
파에트는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 리에르를 떠올렸다.
아버지를 동경하여 검술을 시작한 것까지는 파에트와 같았으나 빛을 발하지 못했다.
월등하게 실력이 향상되는 자신에 비해 리에르는 1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기초적인 검술에만 머물렀다.
반사 신경도 늦었고, 검술에 대한 이해도 늦어서 아버지의 신검을 사사하지 못한 불운한 동생.
리에르는 부친에게 미움받는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파에트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가 표현에 서툴 뿐이지, 항상 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자신의 길을 찾았을까?’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더욱 만나고 싶고, 궁금했다.
어떻게 된 녀석이 형에게 찾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편지 하나 보내지 않는지 야박하기도 했다.
파에트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탓인지 잠시 사색에 잠겨 있었다.
“대장님 습격받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그사이 함께 따라온 윌러는 시체에서 나오는 혈액을 엄지와 검지로 비비고 있었다. 점액에 따라 살해당한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저런 것들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남아나질 못하겠지.”
도시 광장의 한쪽 구석에 몸통이 잘린 와이번의 시체가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쏟아져 나온 피의 양도 상당했다.
와이번의 시체를 본 파에트의 눈은 이색을 띠었다.
녀석의 몸통 절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에 와이번을 베었다고?’
와이번은 누군가에게 목이 베여 즉사했다. 단단한 뼈와 비늘도 종이처럼 잘려져 있었다.
엄청난 완력과 좋은 무기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와이번은 자신을 베어달라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지 않다. 놈과 전투하면서 이 정도의 실력을 보였다는 것은 대단했다.
‘혹시 그 자인가……?’
파에트는 얼마 전에 페이서스의 위험을 알리고 사라진 미남자를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었다.
파에트는 그가 과연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별은 되지 않았다.
“대장님, 저쪽에도 와이번의 시체가……!”
윌러는 부지런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파에트는 절단된 와이번의 시체에서 눈을 떼었다.
도시의 광장에는 사람들 사체 이외에도 와이번, 그리고 트리글로다이트들이 죽어 있었다.
트리글로다이트들은 창격에 꿰뚫린 모습으로 보았을 때 페이서스 가디언의 실력으로 보였다. 삼자갈나무의 열매들도 곤죽이 되어 터져 있었고 불타 버린 녀석들도 보이는 걸 보니 도시의 중심에서부턴 제대로 방어를 하는 듯 보였다.
길가에 널린 몬스터들 시체만큼이나 죽은 가디언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에트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같은 영지의 군인으로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그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 몬스터들은 가디언들이라고 하지만……. 와이번 같은 대형 몬스터는 누가 잡았을까요?”
윌러는 와이번이라는 끔찍한 몬스터보다 그것을 잡은 상대가 더욱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다.
깔끔하게 두 조각으로 잘린 와이번, 게다가 두 번째 녀석은 날개가 전부 찢겨나간 채 머리가 베여 있었다.
죽은 몬스터의 사체를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파에트 그 자신이 이곳에서 살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전투가 일어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렇단 것은 지금도 도시 사람들을 학살하고, 방어하는 싸움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네.”
파에트는 윌러와 함께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나마 많은 수의 몬스터가 죽어 있는 것을 보면 페이서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도시 입구에서부터 무방비하게 죽어 있는 시체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기사단이 그들을 구해줘야 할 시간이었기에 지체할 수가 없다.
“가자, 윌러.”
파에트는 다시 아군이 있는 자리로 되돌아갔다.
* * *
“여기는…….”
에레사는 몽롱해진 두 눈가를 깨우기 위해서 이마를 짚고서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녀의 옆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혔다.
퉁퉁 붓고 찢어진 입술 언저리에 통증이 전달됐다.
에레사는 통증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에레사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티미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엉덩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의 그답지 않았다.
“티미 선…….”
에레사는 티미의 이름을 부르다가 움찔하였다. 흐릿한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에레사는 티미에게 얻어맞은 것을 떠올리고는 흠칫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상하고 믿음직스럽게만 보였던 그에게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은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혀끝으로 느껴지는 입술의 비릿한 피 맛, 말을 하기가 불편할 정도로 부어버린 뺨과 찢긴 블라우스.
에레사는 노출된 부위를 여미며 티미를 노려보았다.
“에, 에렌……. 이 상황이 끝나면 내, 내가 다 설명해 줄게.”
티미는 설득력 없는 말을 내뱉으며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에레사는 그런 티미의 모습이 차갑게 식어 들게 하였다.
리에르의 일 때문에 미안했던 마음마저.
‘이런 남자와 나는 왜 사귀었을까?’
에레사는 스스로 자괴감마저 찾아들었다. 그녀는 문득 그들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리, 리엘…….”
그녀는 리에르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이곳에 왜 그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에르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전신도 너덜너덜한 옷들이 피를 머금고 있었다.
“일어났구나.”
리에르, 아니, 라에룬은 자신을 보며 놀라는 에레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한 걸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