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72)
레필리아 레소드-72화(72/398)
레필리아 레소드 72화
운명의 수레바퀴(2)
팟!
강렬한 마법의 기운이 라에룬의 발 앞에 떨어졌다. 붉은 연기가 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른다.
“지금 저와 전투 중이란 사실을 잊은 건가요?”
“숙녀님이 계신데 괴물들끼리 싸워서야 쓰겠는가?”
“안심하십시오, 당신을 제거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요.”
“하하, 자넨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군.”
라에룬의 여유에 리즈의 그림 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의 친우를 배신하고 힘에 대한 집착만으로 18년간을 기다린 독사 같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허세를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수세에 몰리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 리즈의 손끝이 망설였다. 그 사이 라에룬은 에레사에게 걸어갔다.
리에르가 전투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티미는 신음을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뒤로 기어갔다.
공포에 굴복한 그의 사타구니는 어느새 지린내를 풍겨오고 있었다.
에레사는 티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리에르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건…….”
에레사는 찢긴 옷가지 사이로 드러난 흰 살결을 여몄다.
리에르는 말없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갑자기 어른스러운 리에르의 모습을 보면서 에레사는 당황스러워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뭐라고 어색한 말이라도 내뱉으려던 그녀의 눈가는 순간, 동그랗게 그려졌다.
리에르의 등 뒤로 붉은 날개 깃털들이 타닥타닥, 소리 내며 빛을 뿜고 있었다.
수많은 깃털은 하나, 하나가 모여 기묘한 일체감으로 날개의 형태를 그려내고 있었다.
“리엘……?”
평범한 리에르의 등 뒤에 빛의 날개가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에레사는 당혹스러웠다.
“시간을 끌려는 마지막 수작은 끝났나요.”
낯선 목소리에 에레사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리에르처럼 등 뒤에 날개를 뿜어내는 미남자가 보였다.
리즈는 마치 협주곡이라도 시작하는 듯이 가볍게 손을 말아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끝에 연결된 붉은색의 거대한 채찍이 꿈틀거렸다.
“자네는 내가 네버 에이지의 결계 역할을 하는 걸 아는가?”
“네, 잘 알고 있죠.”
“폭룡 네버 에이지에게 사슬을 옭아 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 같나?”
“제법 희생되었겠군요.”
붉은 채찍이 라에룬을 향해 날아왔다.
라에룬은 석벽을 세워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석벽이 깨부숴졌다.
여기저기 돌파편이 날아다녔다.
“칠십 년 전. 폭룡을 봉인하기 위해 12만의 군병들이 희생했네. 폭룡 네버 에이지를 봉인하기 위해 수많은 장병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지.”
“그렇습니까?”
라에룬은 리즈의 감정 변화 없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풋, 웃어 보였다.
“나의 윗선들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결계는 내가 죽음으로서 사라지게 된다네. 이 대륙은 사슬에서 풀려난 폭룡의 식탁이 되겠지.”
“그래서 당신을 죽이지 말라?”
리즈는 라에룬의 허세를 조롱했다.
라에룬은 리즈가 자신에게 차가운 비웃음을 날리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의 경중을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꼭 이 아이만이 자네의 동료가 될 거란 생각은 버리게.”
“결국엔 헛소리.”
리즈는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튕긴 손가락이 신호가 되어 붉은 채찍은 라에룬을 향해 감아 들었다.
라에룬은 채찍을 피해 몸을 숙였다. 그의 머리 위로 붕,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벽면은 채찍에 닿아 치지직,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두부처럼 으깨졌다.
부서진 돌덩어리들이 날아들자 에레사는 몸을 감싸며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나를 죽이려면 더 과감하게 공격했을 건데. 이상하군.”
“천하의 대마법사가 혓바닥만 굴리는군요.”
“머리만 공격해 오는 것은 이 아가씨가 신경 쓰이는가 보군?”
“머더러인 제가요?”
리즈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는 잘 알고 있는 거로군. 이 소녀로 인해 포스는 둘 중에 하나로 갈라진다는 것을.”
마지막 라에룬의 말을 듣고서 리즈는 잠깐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라에룬의 한 수였다.
“2대 포스 머더러 리즈는 사생아처럼 나고 자라났으며 유일하게 마음을 건네주었던 소중한 여성이 죽음으로서 포스로 각성했다더군.”
“재미있는 견해군요.”
“1대 포스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각성한 타입이지. 나는 그것을 정상 각성이라고 표현하네.”
첫 번째 포스 사용자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각성했다. 하지만 두 번째 포스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각성했다.
두 포스 사용자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나는 각성이란 행위를 알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네. 처음 자신의 껍질을 벗었을 때, 진정한 모습이 되고, 그때의 가치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어때 아주 맞진 않아도, 아주 틀리진 않을 것 같은데.”
리즈의 얼굴에 뚜렷한 감정 변화는 보이질 않았다.
입가에 항상 짓던 부드러운 미소 대신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정도의 변화라면 라에룬 정도 되는 남자에게 속내를 읽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답변 고맙네.”
라에룬 그 자신이 포스의 힘을 소유하려 했던 만큼, 전대 포스들의 일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히 알고 있었다.
리즈가 깜짝 놀랄 정도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의 방출, 그리고 감정 조절을 할 수 없겠지.”
“말이 너무 많군요.”
리즈가 손가락을 허공에 튕겼다. 시뻘건 채찍이 살아 있는 뱀처럼 어지럽게 쏟아졌다.
라에룬은 에레사를 옆으로 끌어안았다. 에레사는 깜짝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리즈는 그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손을 털었다.
팟!
갑자기 허공에서 붉은 채찍이 액체로 변하며 비산했다. 그것을 보고 라에룬은 확신에 찬 눈동자로 웃어 보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자네는 이 아이를 정상 각성시키려 했는가?”
“…….”
“이 아가씨가 죽으면 곤란한가?”
“혓바닥으로 대마법사가 된 건 아니겠지요?”
“냉정한 판단력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자네는 이 아이를 폭주시키고 싶지 않은 거야. 믿어지지 않는군. 그 머더러 리즈가 자신의 후배를 이리 끔찍하게 생각할 줄이야.”
라에룬이 광기에 찬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리즈는 정말로 라에룬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에레사가 방패막이가 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리에르는 포스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라에룬이 운용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각성은 아직 하지도 않았다. 즉, 리에르는 아직 알껍데기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리즈는 망설였다. 라에룬은 그사이 빠르게 마나 수식을 다시 정렬했다.
레필리아 레소드의 마나 흡수식과는 다르지만, 라에룬 가의 비전은 포스라는 힘을 분해하고 있었다.
그 잠시간의 시간, 몸을 움직여준 덕분에 몸 안에 피가 활발히 돌기 시작했다.
마법의 원소 기호가 구체적으로 바뀐다. 서식이 잡히고 정렬이 끝나자 순식간에 힘이 정리되었다.
“대체…… 리엘, 지금 이 상황이…….”
에레사는 이상한 분위기를 보고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리에르의 등 뒤로 펄럭이는 화려한 날개는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에레사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리에르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너무 낯설었다.
리즈는 라에룬을 향해 빈정거렸다.
“그래서 결론은 인질입니까, 살아 있는 영웅이라던 라에룬이?”
“뭐라고 비아냥거린들 내가 잡은 칼자루를 놓을 생각이 없네.”
‘치졸하군.’
리즈는 싸늘한 표정으로 라에룬을 노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알에서 깨어나기 이전의 포스는 각성할 때의 감정이 이후의 가치관을 결정짓는다.
감정의 결핍으로 유년을 보내왔던 리즈 그는 격렬한 분노로 각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포스 칭호는 머더러(Murderer)가 되었다.
라에룬의 등 뒤로 붉은 날개가 잔잔한 빛을 뿜으며 허공중으로 깃털을 흩날렸다. 고위급 마법사답게 라에룬의 마나 해석력은 대단했다.
마나를 깨우치는 모습은 리즈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완벽한 힘을 가지고 둘이 싸우게 된다면 상성상으로 리즈가 불리했다.
‘방법이 없나.’
라에룬은 바로 뒤에 겁먹은 얼굴의 에레사를 두고 있었다. 만약 라에룬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공격한다면 에레사 또한 무사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라에룬을 일격에 죽이려 한다면 리에르의 목숨마저 위험해진다.
-리즈.
그때 아르미안이 리즈에게 말을 걸었다.
리즈는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르미안을 바라보았다.
-나를 사용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같은 주파수 영역 대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내가 잠들어 있는 리에르를 깨울 수 있어.
-나쁘지 않군.
오랜만에 두 사람이 대화했다.
아르미안은 지금의 리즈는 광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으로 보였다.
-대신 마력을 나눠줘.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리즈의 말에 아르미안이 재차 입을 열었다.
-리에르를 도우려면 그 방법뿐이야.
리즈가 한숨을 쉬었다.
라에룬은 리즈가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는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곧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천하의 포스라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얼간이들을 상대한다면 모를까 고위급 마법사인 라에룬에게서 에레사를 지킨단 것은 어려웠다.
에레사와 리에르, 두 사람을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계획을 접어둔다는 의미였다.
리즈의 프라이드가 무너진다. 라에룬은 이미 프라이드 따위는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리에르의 정신이 끊긴 상황이라 몸의 주도권을 라에룬이 쥐고 있었다. 하지만 리에르가 정신이 든다면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포스를 각성시켜서 주도권을 안정시켜야만 했다.
주도권을 완벽히 가져가기 전에 폭주가 일어난다면 라에룬도 몸을 가질 수 없었다.
폭주만은 그도 피해야 했다.
라에룬은 포스를 해석에 열중이었다.
리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에룬은 흠칫 놀라며 그를 주의 깊게 바라봤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되는데.’
라에룬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저벅, 저벅.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리즈는 용기사의 시체 앞에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장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리즈는 거기서 검을 집었다. 말끔한 검신을 가진 롱소드였다.
라에룬은 그 검이 리에르가 사용하던 검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얼마 만에 쥐어보는 감각인지 모르겠군.
-설마 검술 사용법을 잊어먹었다는 것은 아니겠지?
아르미안의 말에 리즈가 피식 웃어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촉과 적당한 무게감이었다.
-얼마 만에 함께 싸워보는 건지.
-지금도 늦지 않았어.
-아니, 충분히 늦었다.
리즈는 검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피로 얼룩진 손.
그녀가 손안에서 사라지던 시절,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던가.
이름도, 얼굴도, 출신도 아무것도 모른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넘쳐흐르는 광기와 살욕에 미쳤었다.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쾌락뿐이라고 여겼었다.
페이서스에 도착한 이후, 리즈의 인생에서는 매우 드물게 살인을 하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피를 만지지 않는 두 손은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얇은 살갗을 도려내고 그 안의 연분홍으로 반짝이는 유실물들을 보지 않는 두 눈은 멀어버릴 것처럼 건조했다.
-당신, 설마.
리즈의 신체와 접촉해 있는 아르미안은 상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격렬한 폭풍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루비 빛 눈동자는 피로하고 지쳐 보였다.
-자, 오랜만의 파트너 쉽이다.
리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광기를 내리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