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74)
레필리아 레소드-74화(74/398)
레필리아 레소드 74화
운명의 수레바퀴(4)
스윽.
리즈가 양손으로 채찍을 감싸 쥔 순간, 그것은 거대한 창이 되었다.
리즈의 거대한 창이 라에룬의 날개를 짓이겨 버렸다.
허공중으로 깃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압!”
아르미안은 검의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밀어 넣으며 기합과 함께 한 발 걸어 나갔다.
검은 기류들은 옅어졌다.
라에룬의 어깨가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
푸욱!
라에룬의 어깨에서 핏방울이 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나는 라에룬의 비명, 그리고 또 하나는 얼굴을 감싸 안은 에레사의 비명이었다.
“으, 으으…….”
라에룬은 비릿한 비음을 내뱉으며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 아르미안을 가격하였다.
아르미안은 오른손으론 검을 밀어 넣고, 왼손으로 라에룬의 손을 붙들고서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대체 뭐야 네년은!”
라에룬은 생각지도 못한 걸림돌에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아르미안은 라에룬에게 대답하는 대신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그시 감아 보였다. 그러고는 붉은 입술을 열면서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라에룬은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는 것을 느껴왔다. 어깨에서 적셔져 오는 피는 고통보다 따뜻함을 전달하며 나른함을 느끼게 하였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설마 이건.’
라에룬의 머리는 저절로 숙어지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땅바닥에는 상대와 자신을 중심으로 녹색의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이 연성 되어 있었다.
‘디스펠(Dispel).’
녹색의 빛이 어지럽게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라에룬은 눈꺼풀이 점차 감기기 시작했다.
위기감보다는 나른함이, 나른함보단 피곤함이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라에룬은 그대로 고개를 떨구며 기절했다.
아르미안은 쓰러지는 리에르를 품에 안았다. 이제 라에룬의 기운은 사라졌다.
그녀는 리에르를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드러눕혔다.
“오랜만인데 잘도 움직이는군.”
“그럼, 내가 누군데.”
리즈의 말에 아르미안이 코를 찡긋하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리에르를 무릎베개한 상태에서 조용히 주문을 읊조렸다.
리즈가 공급해 준 마력 덕분에 아르미안은 마나 사용의 제약이 없었다.
아르미안의 고운 손이 리에르의 어깨를 감쌌다.
희미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따뜻한 온기를 품은 빛의 연소점들은 아르미안의 손에 빨려 들어가듯이 움직였다.
아르미안의 손을 통해 리에르의 상처 부위에 빛이 스며들었다.
금빛의 꽃이 피어올랐다. 곧 꽃은 급격하게 시들어 꽃잎을 떨궜다.
리에르는 눈에 보일 정도로 상처가 아물고 혈색이 돌아왔다.
“녀석은?”
“리엘? 아니면 그 아저씨?”
“둘 다.”
“리엘은 일단 상처 치료했으니 곧 일어날 거고. 그 아저씨는 디스펠로 추방당했어. 이제 다신 못 오겠지.”
아르미안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리즈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라에룬은 폭룡마저 봉인한 명성 높은 마도사였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특기였던 봉인 기술에 당했다.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아르미안의 봉마(封魔) 주문은 최악이지.’
리즈 자신도 아르미안에게 봉마 주문으로 일격을 맞았었다.
덕분에 그는 수십 년간 잠들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간단하게 끝났다.’
수십 년간 자신의 야망을 위해 집착을 감추고 살아왔던 존재였다. 그리 쉽게 사라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리에르는 곤한 모습으로 아르미안의 무릎에 누워 있었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서 볼썽사나웠지만, 아르미안의 치유 마법에 의해 창백해졌던 안색에 핏기가 도는 것이 보였다.
리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아르미안과 단둘이서 대륙 각지를 여행했던 기억. 거대한 저택에서 사육되어 지내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다.
모두가 표정이 없는 인형처럼 생활했던 저택의 생활. 그리고 사료처럼 느껴지는 건조한 빵.
밖은 달랐다.
호밀밭의 풀이 손을 내밀며 넘실거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금 어린 호숫가가 눈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와 함께했기에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봉인 당한 리즈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고독 속에서 혼자 있으면서 무엇이 행복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곳에서 그는 지독한 목마름과 싸워왔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광기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미안은 웃으면서 리즈를 올려보았다.
리즈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가 자신의 붉은 망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망토 좀 잘라가도 되지?”
“왜?”
“상처를 막아주려면 붕대를 해줘야 할 것 아냐.”
아르미안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리즈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망토의 소재가 뭔지 알고 있나?”
“응? 글쎄, 좋아 보이긴 하는데.”
리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비홀더(Beholder)라는 커다란 구체 몬스터가 있다.
이 녀석은 드래곤 급은 아니지만 어쩔 땐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서운 녀석이다.
덩치의 절반을 차지하는 외눈은 마주친 모험가들을 침묵하게 한다.
서로 간의 대화가 안 될뿐더러, 입을 열어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선 천적과도 같았다.
몸체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입은 강철 갑옷도 부서뜨릴 수 있는 단도 형태의 이빨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비홀더를 만나면 갑옷 끈을 풀고 도망치라는 말이 있겠는가.
강력한 이빨 앞에선 아무리 제련이 잘 된 강철 갑옷이라 해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부유 상태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지형지물의 장해를 받지 않는다.
또한, 머리 위로 열 개의 촉수들이 있고 그 촉수 하나하나마다 강력한 저주들을 품고 있어서 상대하지 말아야 할 몬스터 중에 손꼽힌다.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이니 이 녀석의 가죽으로 만든 제품은 얼마나 고가에 팔리겠는가?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마법을 반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홀더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는 리즈가 아끼는 물건이었다.
찌이익.
비홀더의 망토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오자 리즈는 흠칫하며 내려다보았다.
리즈의 시선이 닿은 곳엔 아르미안이 한창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보였다. 비홀더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그의 망토 밑단은 이미 찢겨져 나갔다.
“이거 손으로 안 찢어져서……. 뭐가 이렇게 질겨?”
아르미안은 낑낑대면서 잘라낸 망토 밑단으로 리에르의 가슴을 감기 시작했다.
“아르미……. 당신은 그게 어떤 망토인지 알아?”
“어차피 리즈가 리엘 다치게 한 거잖아. 그것보단 붕대 감기 힘드니까 리엘 몸 좀 들어줘.”
‘원래 이런 여자였던가.’
리즈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리에르의 등을 들어 붕대로 변해 버린 망토가 감기는 것을 구경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투로 인한 긴장감에 빠져 있었다.
리즈는 아르미안과 평범하게 대하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봉인에서 깨어난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리즈는 자멸하듯 악으로 물들어가기만 하였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그를 막기 위해 아르미안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 격전.
그녀는 리즈를 막았지만, 자신도 힘을 잃어 봉인 당했다.
“예전 일에 관해서 묻지는 않는 건가?”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한 리즈는 아르미안이 원하던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원했던 정의로운 영웅의 길.
자신은 그와 반대되는 길을 걸었다.
아르미안은 리에르의 가슴에 붕대 매듭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리즈를 올려다보았다.
“물으면 대답해 주려고?”
“글쎄.”
리즈의 루비 빛 눈동자와 에레사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하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서로서로 들여다본다.
리즈는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아르미안도 그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이제 단순한 과거인지, 현재 진행형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르미안은 픽, 웃어 보였다. 그리고 리에르의 가슴에 맺어진 붕대를 퉁퉁, 두들기면서 들릴 듯 말듯 속삭인다.
“처음부터 리에르를 해하려고 한 게 아니었지?”
“같은 포스이기에 성향을 알아봐야만 했지.”
“같은 포스로서, 선배로서 비정상 각성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려고 한 거야?”
“…….”
잠시간의 침묵. 리즈는 후,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미안의 두드림에 리에르는 으으,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기 시작하였다. 슬슬 정신이 들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무언의 움직임이었다.
“후회했던 거야?”
“아니. 이미 끝난 일이야.”
리즈의 루비 빛 눈동자가 맑았다. 광기로 전염되지 않은 그의 눈빛은 리에르를 지그시 바라본다.
“다만 또다시 나와 같은 괴물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역시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려.”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풉,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지낸 자신이 다시금 인간처럼 웃게 될 줄은 몰랐다.
그동안 그가 보였던 미소는 그저 사냥감을 유혹하는 미끼, 그저 살아 있는 척 표정을 바꾼 것에 불과했었다.
“리엘…….”
금발 머리카락의 여성이 신음을 내뱉는 리에르에게 걸어갔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슴을 졸이고, 마음을 태웠다.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티미와 상처투성이의 리에르.
리에르가 자신의 앞에서 죽어갈 때는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그가 죽지 않았다.
그런 그를 치료해 주는 두 남녀가 보였다.
에레사는 두려움을 밀어내고서 리에르를 찾아갔다.
덜덜 떨려오던 두 다리도 이제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는 그녀의 뒤에서 검은빛의 아지랑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검은빛을 띤 아지랑이가 몸을 뒤틀듯이 일렁거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는지 몰랐다.
아지랑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탄식을 쏟아냈다.
라에룬, 그는 자신의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욕심을 부려 리에르에게 숨어들었다. 그리고 포스를 다루기 좋은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려왔고, 그 순간이 되어서 리즈와 맞붙게 되었다.
그것까진 좋았다.
설마 봉마 주문 같은 고대 마법을 사용하는 인간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에룬은 오랜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해 왔다. 그리고 오랜 정성을 들인 과실을 따는 순간에 결정적인 방해를 받고 말았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는 말로는 울분을 풀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18년의 세월을 기다렸고, 자신의 육신을 바쳐가면서 진행해온 일이었다.
라에룬은 리에르의 몸에서 추방당한 지금은 영혼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젠 정령이라는 존재가 되어 아스트랄계(Astral)로 소환될 것이 분명했다.
라에룬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검은색 가스는 자신을 추방한 존재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붉은색 날개를 접어둔 붉은 미남자와 녹색 여성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복 마법의 효과를 받은 리에르는 쿨럭, 거리는 기침과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뜨고 있었다.
라에룬은 자신이 준비해 왔던 계획이 리즈의 계획과 맞물려 한 조각의 희망도 남기지 못했단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라에룬은 이대로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억울했다.
자신의 친우이자, 라이벌. 그리고 증오스러운 연적이자 자신의 앞길을 항상 가로막았던 로이스타와 그의 아들이 겹쳐지는 듯이 느껴졌다.
증오하노라, 아르빈트의 피.
반역하노라, 아버지의 뜻.
거절하노라, 더러운 운명.
라에룬은 자신의 계획을 무참하게 무너뜨린 세 명의 존재에게 들리지 않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세 사람 이외의 인물이 들어왔다.
금발 머리카락의 아리따운 여성이 리에르에게 향했다.
리에르 아르빈트의 첫사랑이자, 소꿉친구.
중년의 사랑이 촛불처럼 온화하고 꺼지기도 쉽다면 젊은 날의 사랑은 장작불처럼 산산이 불태운다.
자신의 몸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