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75)
레필리아 레소드-75화(75/398)
레필리아 레소드 75화
운명의 수레바퀴(5)
라에룬의 시야 안으로 티미 아크우드가 보였다. 그에게는 동질감을 느꼈다.
로이스타에게 여자를 빼앗기고 재능에서도 밀려버린 과거가 떠오른다.
이를 비웃듯 리에르도 티미에게서 여자를 빼앗고, 재능을 뛰어넘었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 순간 라에룬에게 번개처럼 스치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차지할 수 없고, 어차피 틀려 버린 일이라면 그 모든 것을 망쳐 버리면 되지 않는가?
리에르에게 다가가는 에레사, 그리고 구석에서 어쩔 줄 몰라 눈만 굴리는 티미.
두 사람을 보면서 라에룬은 드러나지 않는 광소를 터트렸다.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라에룬은 티미에게 다가섰다.
자신의 여자가 연적에게 다가가는데도 눈알만 굴리는 남자.
자신이 한 행적이 전 연인의 입을 통해, 연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그.
실력은 있으나 운이 따라 주지 않아,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타고난 남자.
영혼 상태의 라에룬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그 형태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스멀스멀, 자신과 닮은 그 남자를 향했다.
라에룬이라 불렸던 가스는 몸을 넓게 펼쳐내며 상대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사람의 육체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종교계에서는 자신들이 믿는 신의 곁으로 돌아간다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마나를 지키는 수호자들에게 있어 죽음은 또 다른 태어남으로도 표현했다.
신체의 정지, 즉 사후에는 육체에 남은 마나 물질은 정신 집약체로 구성된다.
정신 집약체. 즉, 정령은 계약이 없다면 아스트랄계로 사라지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기 때문일까?
라에룬은 티미와 주파수가 잘 맞는 것을 확인했다.
그를 구성하는 검은 안개가 티미의 입과 코를 통해서 스며들어 갔다.
곧 티미의 몸은 라에룬에게 잠식당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일을 주마.’
라에룬은 자신의 계획이 수포가 된 것에 대한 분노와 원통함에 사로잡혔다.
티미와 하나로 혼합이 된 라에룬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평소 리에르의 몸속 세포처럼 있었던 라에룬에게는 움직임이 크게 어색하진 않았다.
라에룬이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자 사타구니에서 축축한 느낌이 났다. 자신의 몸은 아니지만, 라에룬은 절로 표정이 구겨졌다.
‘한심한 놈.’
평범한 인간이 괴물들의 혈투를 지켜보았으니, 당연한 생리 현상일지 몰랐다. 하지만 남의 소변을 묻히고 다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에레사의 뒤를 따르던 티미, 아니, 라에룬은 허리춤에 차여진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으…….”
리에르는 힘겹게 눈을 떴다.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머리카락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점점 시야에 익숙해지며 초점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 볼까 무서운 리즈의 가식적인 미소.
그의 곁에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는 아르미안이 뺨을 쓰다듬었다.
“몸은 어떤가요, 리에르 군?”
“내가 치료했으니 물으나 마나지.”
리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에르는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길바닥에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통증이었다.
“아구, 나 죽어.”
리에르의 엄살에 아르미안의 입술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아픈 치료가 무엇인지 알려줄까?”
“아니, 뭐…….”
리에르는 그녀가 검으로 있을 때나, 사람의 형태로 있을 때나 성깔이 있는 것은 똑같다고 느꼈다.
리에르는 잠시간의 끊긴 듯한 기억들, 그리고 온몸을 두드린 듯한 통증에 인상을 구기면서 물었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건 리에르 군이 아르미의 무릎에서 일어났을 때 이야기하죠.”
리에르는 리즈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가 뾰로통한 것처럼 보였다.
리에르는 그의 친절 아닌 친절 덕분에 아르미안의 무릎에서 벗어났다. 부드러운 감촉은 기분 좋았으나, 그대로 있었다간 리즈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리에르는 생전 처음으로 무릎베개를 한 덕분에 쑥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감동보다는 상처의 통증이 더 크게 느껴졌다.
리에르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쪽의 무릎을 빌린 것도 아닌데 왜 불쾌해하세요?”
“한때는 나만이 베던 무릎이었지.”
리에르는 마른기침을 한 번 뱉어낸다.
“쿨럭…….”
리에르는 분명히 용기사를 피해 도망가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의 일들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르미안은 검에서 벗어나 인간 형태로 있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리에르의 표정에 리즈는 흠, 하는 숨소릴 내뱉었다. 그러고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입술을 열어 보였다.
“리에르 군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리에르는 리즈가 설명을 해주려는 모습을 보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리에르에게 있어선, 어떻게 보면 엘빈보다 더 싫은 부류 중의 하나였다.
리즈와 담소를 나누기 싫다는 리에르에 대한 신의 축복일까? 리에르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반가운,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에렌!”
“리엘…….”
에레사는 다치고 머리가 헝클어진 얼굴로도 리에르에게 웃음 지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몸 상태보다 리에르에 대한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에레사. 그녀는 좋아하는 남자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눈물을 한줄기 그려냈다.
그 모습은 리에르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마법이었다.
리에르는 감히 단정 지을 수가 있었다. 자신이 아닌, 그 누구라도 에레사를 보면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고.
그 순간 에레사를 보는 리에르의 두 동공이 크게 열렸다.
“리엘, 괜…….”
리에르에게 말을 하고 있던 에레사의 얼굴이 머리카락을 허공에 흩날리며 뒤로 젖혀진다.
찢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보이는 에레사의 뽀얀 살결 속에서 시커먼 검이 튀어나왔다.
푸욱!
리에르는 귓가를 의심했다. 그의 격앙된 두 눈동자는 지금 보이는 현실을 믿지 않았다.
에레사의 가슴에서 붉은 꽃이 폈다. 허공중에 춤추는 혈화는 리에르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옆집 소녀. 그녀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에레사는 눈빛이 흐려지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찮……니…….”
고독은 죽음과도 같았으며, 홀로 남겨진단 것은 지옥이었다.
오랫동안 고독의 시간을 보냈던 아르미안은 리에르에게 구원의 손길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리에르와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면서 가슴의 뿌듯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리에르에게 너무도 사랑하는 소녀가 있었다.
아리따운 그 소녀만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리에르를 보면서 아르미안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욕심이라는 것은 얻을수록 크기가 자라난다. 리즈가 마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리에르도 에레사에게 맹목적이었다.
아르미안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세계는 리에르 단 하나였다.
리에르에게 있어서 단 하나의 세계는 에레사였다.
그렇게 소중한 리에르의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마치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허물어지는 금발 머리의 소녀를 보고 리에르의 얼굴은 경직되었다.
에레사의 백옥 같은 살결에 어울리지도 않는 금속성의 물건이 적색으로 물들었다.
리에르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왜 에레사의 옷이 붉게 물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레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에르를 향해 추락하듯 쓰러졌다.
리에르는 통증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레사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팔을 감싼 리에르의 손에는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가슴에서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보인다. 그것은 데일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에, 에렌……!”
리에르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 대신에 힘겨운 숨소리만 들려왔다.
리에르의 가슴에 안겨진 에레사의 금발 머리. 그것은 붉게 물들어간다.
그녀의 가슴이 핏빛으로 물든다. 힘없이 늘어지는 팔은 실 끊어진 인형과도 같았다.
에레사를 안은 리에르의 몸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에레사의 몸은 얼음처럼 냉기가 흘렀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땅이 붉게 물들었다.
리에르의 두 눈동자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닐까?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는 사이에 모두가 짜고서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는 것이 아닐까?’
리에르가 아르미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리에르에게 했던 것처럼 에레사의 상처 부위에 손을 갖다 댔다.
벌컥, 벌컥.
뜨거운 피가 아르미안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금빛 꽃잎이 에레사의 상처 속에서 잠시 봉오리를 맺었다. 하지만 이내 산산이 사라지고 말았다.
고위 신관이 있었다면 모를까, 아르미안이 사용하는 신성 마법으로는 피가 멈추질 않았다.
아르미안은 리에르를 바라보았다.
리에르는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에레사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을 껴안은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리에르는 아까만 해도 온몸을 감싸 안던 고통이 느껴지질 않았다. 자신이 죽는다 해도 이것보다 고통스럽진 않았을 터였다.
툭, 투둑.
리에르의 구슬 같은 눈물이 에레사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에레사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은 천천히 감겼다.
그녀는 리에르가 피와 눈물이 뒤섞인 채로 우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왜 갑자기 우는 걸까?’
에레사는 리에르의 뺨을 쓰다듬으며 다정한 말을 속삭이려 하였다. 그녀의 가냘픈 손이 힘겹게 올라갔다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떨궈졌다.
가느다란 숨소리조차,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피조차 차갑게 식어버렸다.
리에르가 눈물로 굴절된 시야를 들어 앞을 보았을 때 뒷걸음질하는 티미가 보였다.
그의 손에는 시뻘건 피로 염색된 검이 쥐어져 있었다.
“티미이이이!”
분노로 인해 미쳐버린 리에르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
그의 외침에 티미는 으으,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 난 아냐!”
그의 변명은 리에르를 더욱 미치게 했다. 눈물로 적셔지는 리에르의 두 눈동자는 서서히 루비 빛으로 물들어갔다.
“리엘!”
생명이 식어가는 에레사를 치료하던 아르미안은 불현듯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이제 막 포스의 기운을 사용하게 되어 불안정한 가운데, 리즈와 똑같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리즈와는 항상 함께였기에 연인이라는 단어로 속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자리 잡은 여성이 있었다.
리즈의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그의 하녀, 마리.
그녀의 비참한 죽음으로 리즈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고, 결국엔 폭주하여 세상을 피로 물들였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죽은 여성의 그림자는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남겨져 있었다.
아르미안은 짙게 다가오는 절망의 향기를 느꼈다.
두 번째 겪는 이 기운은 리즈를 머더러로 만들었던 그 사건과 똑같았다.
“으아아!”
티미는 용기를 내서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얼어붙었던 두 다리를 움직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리에르는 티미가 도망치는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아르미안이 리에르의 팔을 붙들고서 놓지 않았다.
“놔!”
리에르는 이미 루비 빛으로 물든 눈동자를 들어 아르미안에게 외쳤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가진 그가 아니었다.
지독한 분노, 숨이 조여들 듯한 살기를 피우면서도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아르미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대로 가면 넌 폭주할 거야. 지금은 가게 둘 수 없어.”
“닥……쳐……!”
번개처럼 날아드는 리에르의 손이 아르미안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공격을 피하지 못해서 바닥에 쓰러졌다.
아르미안에게 손찌검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그를 보고 리즈는 지켜보지 않았다.
리에르와 아르미안의 사이를 가로막은 리즈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리에르 군, 저 녀석은 제가 잡겠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꺼져.”
리에르는 차갑게 늘어진 에레사를 안고, 독기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