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78)
레필리아 레소드-78화(78/398)
레필리아 레소드 78화
폭주(2)
마법진의 테두리에서 고대의 룬어가 저절로 그려졌다. 사방에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투둑.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증발하였다.
검은 청년은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시체가 없으니 걷는 데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어 좋았다.
그는 끝없이 한가지만을 떠올렸다.
에레사를 찾아야 했다. 이곳은 너무나 위험했다.
-이미 에렌은 고기가 되었어.
무언가가 귓가에 속삭인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던 그녀를 떠올렸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에렌은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사랑스러운 여성이었다. 항상 봄 햇볕처럼 따뜻한 미소를 짓던 그녀가 그렇게 일어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찾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몸을 움직였다. 힘들었다. 몸이 너무나 무겁다.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는 취한 것처럼 몽롱하게 앞으로, 또 앞으로 걸었다.
그때 검은 청년은 시선을 굴렸다.
생명 반응이 느껴졌다. 그는 무너진 건물 더미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이 어째서 이런 것을 느끼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왜 자신의 등 뒤로 날개가 빛을 뿜어내는지도 몰랐다.
그때 검은 청년은 또 다른 생명 반응들을 보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트리글로다이트라고 불리는 도마뱀 인간들이 사람의 사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당연히 검은 청년이 찾고 있는 에레사는 아니었다.
검은 청년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트리글로다이트들은 새로운 먹이를 보고 세로줄눈을 번뜩였다.
아직 다 먹어치우지 못했는지 갸름한 여성의 손목을 입에 오물거리는 녀석이 보였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나이가 어린 쪽이 야들야들하고 먹기가 좋다. 수컷보다 근육량이 적은 암컷이 더 맛이 좋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트리글로다이트들에게 잡아먹힌 묘령의 여인 역시 에레사는 아니었다.
청년은 알고 있었다. 에레사가 죽을 리가 없었다.
이상한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며 검은 청년은 트리글로다이트들을 향해 걸어나갔다.
검은 청년의 접혔던 날개가 위협하듯 양쪽으로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아우라에 트리글로다이트가 몸을 떨었다.
이성보단 본능으로 살아오는 녀석들이었다.
검은 청년이 완벽한 포식자임을 인지하고 반항할 생각조차 잃었다.
그들을 위협하듯 날개를 펄럭인 검은 청년은 주변의 마나가 빨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계속 써도 차오르는 강력한 힘. 그것은 방전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보였다.
트리글로다이트들이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상대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자신들의 군주와 같았다.
폭룡 네버 에이지, 그의 아들 중의 하나인 용기사.
그들은 그의 종으로서 이곳에 왔지만, 어느새 주인의 기운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인간이 이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검은 청년은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상대의 감정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분명 말 한마디 통하지 않을 이종족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피식.
검은 청년의 입술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흉내 냈다.
검은 청년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면 트리글로다이트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검은 청년의 손을 들자 트리글로다이트들의 눈빛이 겁에 질린 듯 균열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한 녀석이 공포를 이겨냈다. 놈은 자신이 들고 있는 녹슨 무기를 힘껏 투창했다.
쇄에엑!
창을 던지는 데에 선수인 트리글로다이트가 검은 청년의 가슴팍을 노렸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그리고 약육강식의 법칙대로 자신이 잡은 생명에 대해서 식사를 취한다.
강자와 약자의 논리만이 진리였다. 그리고 도마뱀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그 법칙을 깨뜨리려 했다.
검은 청년은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고 속삭였다.
검은 청년을 향해 날아오던 창은 세월이 흘러 바스라지듯이 허공중에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신호로 트리글로다이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들이 우습게 보던 번식력만 강한 종족. 인간을 보고 도망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년은 도망치는 트리글로다이트들을 바라보더니 주머니에 꽂아놓았던 손을 꺼냈다.
청년을 중심으로 둥글게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검은 안개들이 피워 올랐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검은 안개는 소리 없는 하울링을 길게 뻗어냈다.
쿡, 푸직, 푸쉭!
베이고 도려내고 터지는 소리들이 정적에 잠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트리글로다이트들은 자신들이 죽였던 나약한 인간들과 똑같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죽어갔다.
검은 안개는 질퍽한 시체조차 남김없이 꾸역꾸역 먹어치워 버리기 시작했다.
피식.
검은 청년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검은 청년의 입가가 찢어질 듯이 벌리어졌다.
검은 청년은 애초에 느꼈었던 인간을 확인하기 위해 걸어갔다.
에레사를 찾아 이 위험한 도시를 떠나야 했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다.
건물의 잔재 속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끼는 목소리는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었다.
에레사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청년은 신중함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너진 벽면 사이에 깔린 중년 여성의 시체. 그녀의 배 밑으로 어린 소녀가 울고 있었다.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던 어미의 손이 나뭇가지처럼 굳어진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절실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던 어미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었다.
검은 청년은 천천히 불쌍한 소녀에게 걸어나갔다. 공포로 얼룩진 소녀의 눈동자로 검은 청년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기적을 보았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
주변이 온통 괴물투성이였다. 사람은 시체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검술 대회의 우승자가 서 있었다.
어린 소녀는 자신을 구원해 줄 검은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눈물을 토해내었다.
모친과 자신을 깔아뭉갠 무거운 벽면을 치워주길 바라는 듯 보였다.
검은 청년은 죽어버린 여성과 어린 소녀 쪽으로 다가가며 안타까운 듯이 볼을 쓰다듬었다.
무너진 건물의 먼지로 인해 그을음이 잔뜩 생긴 통통한 볼을 눈물로 씻는 소녀. 안타까운 소녀에게 검은 청년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역시 아냐.”
푹.
검은 안개가 춤추는 듯하더니 소녀의 울음소리가 그쳤다.
이윽고 검은 안개는 야생 짐승의 턱주가리처럼 무언가를 씹어 삼켜대기 시작하였다.
* * *
몬스터들은 도시를 습격하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뽑아냈다.
삶과 터전.
사랑하는 가족.
정든 지인들.
살아남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갑작스레 찾아온 비극을 견디지 못했다. 북적이던 아레스트의 항구 도시, 페이서스는 죽음으로 만연했다.
이미 항구 도시의 외벽부터 광장까지는 몬스터들로 점령되었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창과 검을 쥔 사람들이 있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는 모두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 같았다면 이미 쉽게 전복되고 말았을 터였다. 하지만 페이서스가 몬스터 대군에게 저항할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가디언이 있었다.
해적의 존재 때문에 역설적으로 뛰어난 병사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두 번째로는 고등 교육기관인 카에르와 카이샤가 존재했다.
검제의 고향. 그리고 바람의 기사가 이야기를 남기고 간 도시. 자연스럽게 검을 수련하고 검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청해서 무기를 들었다.
앉아서 죽느니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칠검 기사단이 합류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페이서스의 영주가 화려한 성을 가지지 않았다. 체면과 품격을 중요시하는 귀족이 볼 때는 우스꽝스러웠다.
염색이 잘 된 붉은 양탄자가 수 놓인 것도 아니요, 호화찬란한 금빛으로 칠을 한 것도 아니다.
3대에 걸쳐 페이서스를 다스리는 펠켄은 자신의 성을 호사함보단 견고함으로 치장하였다.
혹시 모를 재난을 대비하여 시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대피소를 만들고, 가디언이 편히 쉴 수 있는 군용 숙소, 그리고 한 달 이상은 먹고살 수 있는 건조 식량을 갖춰 유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의 외벽마다 석궁을 쏘아 보낼 수 있는 창문이 갖춰져 있어, 마치 공성전이라도 가능할 듯 보였다.
유일한 희망. 그것은 성안으로 도망 오면 목숨을 지킬 수 있으리란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생각을 깨뜨리는 듯, 와이번 두 마리가 나타났다.
와이번의 몸이 거대하진 않지만, 피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날개를 펼치니 위용이 대단했다.
두 마리의 와이번이 언제든 산성 액을 쏘아 올리기 위해 비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시민들은 대번 공황에 빠져들었다.
가디언도 사람이었다. 아무리 훈련을 받은 장병이라고는 하나, 갑자기 쳐들어온 몬스터에 공포로 얼룩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디언은 계속 두려워하지만은 않았다.
지켜야 할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인으로 바뀌었다.
“투석차를 준비하라! 각 조장 대열을 맞춰라!”
도시가 위기에 빠지자, 성주는 직접 가디언을 움직였다.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성주 덕분에 가디언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간밤에 와이프에게 시달렸나? 힘을 쓰는 거야, 마는 거야!”
성주는 투척을 준비하는 가디언을 득달같이 독려했다.
“쏴라! 화살값이 비싸다고 걱정하는 거냐? 내가 책임질 테니 다 쏟아부어라!”
화살이 와이번의 피막을 찢고, 찢었다.
“갑자기 동물 애호가라도 됐나? 저놈 대가리를 깨려니 가슴 아프냐?”
최대 장력까지 돌아간 발리스타에서 투창이 시작되었다.
쉬이익! 쉬익!
와이번은 선회하는 도중에 투척물에 맞고서 비명을 지르며 낙하했다.
추락한 와이번이 고통스럽게 몸을 뒹굴었다. 날개가 찢겨서 당장 다시 날려 해도 날 수가 없었다.
가디언은 시민들을 공포에 빠뜨렸던 와이번 둘을 제압하며 환호를 받아냈다.
사람들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다시 문을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와이번을 처리하자, 이번엔 삼자갈나무와 트리글로다이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삼자갈나무의 개체는 언뜻 봐도 40그루 정도 되었으며, 창을 낀 트리글로다이트의 숫자만 200 이상은 되어 보였다.
와이번은 기세 좋게 쓰러뜨렸지만, 이번에 오는 병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목이 없는 기사였다.
긴 창을 쥔 기사는 안구가 없는 유령마의 위에서 인간들의 내성을 바라보았다.
성주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트리글로다이트와 삼자갈나무가 마치 훈련된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서 기다리고 있다.
마치 군대와 같았다.
인간이 유일하게 몬스터에게 유리한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협력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적은 협력이 되고 있었다.
“너희는 모두 죽는다.”
어디서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목 없는 기사에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희의 사랑하는 가족은 우리의 고기가 될 것이다.”
마치 얼음으로 빚어져 나온 목소리 같았다.
차갑고 냉엄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등에서 소름이 돋아나는 음성이었다.
“편하게 죽거라. 너희에게 희망은 없느니.”
목 없는 기사의 옆으로 트리글로다이트 하나가 머리통을 내밀었다.
기사는 머리를 받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목 위에 장착했다.
기사가 단 머리는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여성이었다.
그것이 기사의 목 위에 장착되자 눈을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머리통은 주기적으로 바꾸는 것이 좋군.”
기사는 어울리지도 않게 긴 머리카락의 여성의 얼굴로 웃어 보였다.
“다시는 머리를 달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마!”
성주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저놈의 머리통이 더 마음에 드는군. 머리를 내게 가져오라.”
듀라한은 자신의 목 위에 있는 여성의 머리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트리글로다이트들은 주인의 명령을 받고 창을 앞에 끼고서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