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82)
레필리아 레소드-82화(82/398)
레필리아 레소드 82화
폭주(6)
진퇴양난이었다.
“괴물들이 증식하고 있습니다!”
“괴물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안과 밖으로 비명과 외침이 교차하였다.
내성 안으로 삼자갈나무의 씨앗이 뿌리를 박기 시작했다.
뿌리는 순식간에 벽이고 땅이고 퍼져 나갔다. 건물이라도 상관없었다.
순식간에 씨앗은 꽃을 피웠다. 누런색으로 빛나는 꽃을 보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사람의 몸뚱이만 한 누런 꽃이 마치 문 입구처럼 활짝 열렸다. 드러난 꽃술의 중심으로 날카로운 어금니가 탐욕스럽게 침을 흘렸다.
누런 꽃은 긴 잎사귀를 팔이라도 되는 것처럼 뻗어냈다.
“으아악!”
긴 잎사귀는 도망치는 사람들을 돌돌 말아 꽃봉오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우득, 우득거리는 탐욕스러운 소리가 사람의 비명과 어우러졌다.
누런 꽃잎이 붉은 핏빛으로 염색되었다. 발버둥 치던 남자의 팔도 그때쯤 힘없이 늘어졌다.
“모리스, 가디언을 도와라.”
“네? 하지만…….”
“시민이 먼저다.”
파에트는 망설이는 모리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기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든다. 하지만 죽을 각오 대신, 살기 위해 검을 든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모리스는 파에트의 고집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파에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사가 시민을 지킬 의무를 우선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기사가 아닌 살육자이자, 깡패집단에 불과하다.
모리스를 따라서 십여 명의 기사들이 가디언을 지원하기 위해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에 있는 삼자갈나무도 재차 활동을 시작했다.
내성 안의 상황은 매우 급해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기사들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삼자갈나무의 폭식 행위를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간다, 내 뒤를 따르는 이상 허락 없이 죽을 수는 없다.”
파에트는 자신의 주변을 지키고 서 있는 서른 명의 기사에게 외쳤다.
“죽긴 왜 죽수, 사슴 주점 마담 궁둥이를 문질러 보지도 못했구먼.”
“대장 무릎 위에 계집 앉혀놓는 꼴 보지 않는 이상 눈을 못 감제.”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말인가?”
파에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파에트는 걱정스러웠다. 자신은 지금 지쳐 있었다. 부하들을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몇 년 동안 산전수전을 같이 겪었던 사이. 즉 가족과도 같은 관계였다.
“우리가 지켜줄 테니 졸지 말고 앞장서쇼, 대장.”
“그럼 덕 좀 볼까?”
후우, 파에트는 숨을 다시 한번 고르게 내쉬었다.
칠검 기사단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쟁터라는 곳은 목숨을 버리는 장소였다.
귀족에게는 영광을, 무장에게는 승리를, 병사들에게는 죽음을 얻는 곳.
지금의 칠검 기사단원들은 전쟁터에서 만난 더미(Dummy)들이었다.
도시에서 중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탈자들. 감옥 속에서 썩는 고기 조각이 되느니 전쟁터에서 더미로서 죽을 것을 강요당한 자들.
불한당처럼 살아오며 사회에 격리되었다.
가정을 스스로 파괴한 이들은 과거를 후회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가장 효과적일 때, 가장 효과적인 유혹이 들어왔다.
인간쓰레기에서 탈피할 기회를 주겠다.
전쟁터에서 영광되게 죽는다면 그동안의 죄를 사면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국가 보상이 주어진다.
그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달콤한 유혹이었다.
어차피 사형당할 몸이었다.
평생 돌보지 않았던 가족을 죽음으로써 지킬 수 있다는 싸구려 감성은 효과적이었다.
겨우 단돈 100골드의 보상금을 위하여 죽음으로 내몰아진 자 더미는 죽음을 강요당했다.
같은 진영의 병사들에게조차 무시당하고 제대로 된 식사마저 보장받지 못하는 더미는 싸움터에서 살기 위해 싸웠다.
영광을 얻기 위해, 무훈을 세우기 위하여 멋진 백마를 타고서 고고하게 검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기사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맨손으로 전쟁터의 앞에 나섰다.
무기조차 쥐지 못한 채 상대에게 내몰려졌다. 살기 위하여 적을 향해 달려든다. 동료의 시체를 발판삼아 상대를 물어뜯고 달라붙는다.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서라도 싸워야 했다.
도망치는 것은 용서되지 않았다.
한 번 도주한 더미는 무조건 즉결처분이다.
병사 이하로 취급당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자유를 억압하는 발목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들의 발목에 자유를 차지하는 것은 전쟁터에 나갔을 때와 죽었을 때뿐이었다.
적에게 달려들지 않으면 뒤에 있는 아군의 창을 맞을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보장된 작은 권리. 즉, 가족들에게 보상금도 지원이 되질 않았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그들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날이 왔다.
검푸른 머리카락의 앳된 청년이 이들의 앞에 섰다.
검푸른 머리칼의 청년은 더미와 같이 식사했고, 같이 지냈다.
더미들은 귀족 집 자제의 오지랖에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전쟁터에 서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 선의는 독이었다.
어느 날 전쟁터에서 검푸른 머리칼의 청년은 믿기지 못할 것을 보게 되었다.
검술도, 훈련도 안 된 더미가 맨손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배를 비집고 들어오는 창을 붙잡고서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귀를 깨물고 박치기를 해온다.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싸우는 더미들을 보고 청년이 움직였다.
청년은 단신으로 자신의 동료 몇만 이끌고 지원을 갔다.
더미를 위해 지원을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령관의 명령을 위반하며 움직인 청년은 뛰어난 무용으로 전장을 휘어잡았다.
분위기 자체를 바꿔놓은 청년을 보고 더미들은 넋을 잃었다.
진정한 무(武)가 앞에 있었다.
단신으로 소수의 적을 이끌고 상대의 진형을 무너뜨린다. 마치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이후로 청년은 더미와 함께 전투를 나갔다. 그리고 더미가 죽는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청년은 아렌의 혜성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더미는 전쟁이 종료된 이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살아 돌아간다는 생소한 미래였다.
더미들은 인제 와서 돌아가도 누구 하나 기뻐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은 이미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더미들은 청년이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더미들은 비천한 신분으로 기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더미들은 생과 사에서 훈련해 왔기에 검술을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은 빠르게 강해졌다.
죽어야 하는 자가 기사로 바뀐 이 일화는 유랑 시인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의 귀족들이 파에트 아르빈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죽을 때는 이 남자를 위해서.
서른 명의 더미, 아니, 칠검 기사단원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서로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항상 죽음 앞에 내몰렸던 인간으로서의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
파에트는 항상 그랬듯이 가장 앞에 서서 말을 달렸다.
“이럇, 하아! 하앗!”
엎드린 삼자갈나무가 다시 한번 씨앗을 뿌리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나무의 앞을 지키고 있는 열매들은 인간들을 보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 황금 박쥐 주점의 메리 양에게 고백했어야 했는데.”
“지랄. 그 빨통 큰 년은 내 거야.”
“까불다 혀 깨물지 말라고!”
“임히 깨물어똬!”
가장 선두에 선 파에트가 검을 고쳐 잡는 것이 보였다. 이제 격돌의 순간이었다.
“차지!”
서른 명의 더미가 손에 쥔 창 끈을 단단히 부여잡고 몸을 숙여 충격에 대비했다.
쾅!
나무 열매가 볼링핀처럼 튕겨 나갔다.
놈들의 지저분한 육편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그 돌진력은 멈추지 않고서 나무가 있는 곳까지 밀고 들어갔다.
길을 열어준 부하들 덕분에 파에트와 몇몇 검 기사가 사정없이 주변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나무 열매들을 베어도, 베어도, 끝도 없이 덤벼들었다.
삼자갈나무의 등에서 다시 한번 내성을 향해 씨앗이 발사되었다.
요란한 바람의 마찰음과 함께 폭발음들이 들려온다.
파에트는 이를 사리 물으며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대장! 한번 선회해야 하우!”
“대장!”
파에트는 부하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대답 대신에 바람처럼 속도를 올렸다.
나무 열매는 파에트가 탄 말에게 짓밟히고 부딪쳤다.
개중 몇 놈은 말의 허벅지와 엉덩이에 달라붙어 치악력을 테스트했다.
그 와중에 파에트는 달라붙은 것들을 처리하면서 전진했다. 하지만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오니, 말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파에트는 말이 목을 숙여준 덕분에 충격 없이 낙마했다. 하지만 그를 노리는 열매들이 순식간에 에워싸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기사들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파에트의 행동은 평소에 그가 하는 전투법과 너무나도 달랐다.
신속의 검이라는 이름처럼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하고, 화려한 검무로 상대의 얼을 빼놓는 것이 원래 하던 검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마음만 급한 애송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X발, 선회!”
기사들은 그렇다고 무턱대고 달려가지 않았다.
냉정하게 다시 태세를 가다듬고, 랜스를 바짝 쥐었다.
자신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대장이 쓰러질 일 따윈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앞에서 그런 기적을 선보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전원 착검!”
말의 호흡이 돌아왔다.
“전원 돌격!”
다시 기사들의 전력 질주가 시작되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덕분에 말의 체력도 효과적으로 돌아왔다.
파에트는 최대한 자신에게 모든 시선을 돌렸다.
곧 부하들이 지원할 것을 알기에 버티고, 버텼다.
‘조금만 더.’
파에트는 주변에 원을 그리듯이 검격을 그어 넣었다. 그의 검술은 마치 주변에 결계를 치는 듯이 날카로웠다.
‘조금만 더……!’
삼자갈나무에게 일격을 먹여야 했다.
파에트의 깎아진 듯한 외모를 보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연회에서 배불뚝이 타이즈를 입고서 와인 잔을 부딪치는 귀족들을 싫어했다.
조용한 말투 속에 불꽃 같은 성질을 가졌다.
의외로 다혈질이었고, 의외로 단세포였다.
파에트는 남을 부리는 것보다, 함께 목욕하고, 함께 흙탕물을 뒹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자, 와라!”
파에트는 검을 고쳐 잡으면서 뿌리 박힌 나무처럼 고고하게 섰다.
나무 열매들은 파에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풀벌레처럼 껑충 뛰어들었다.
파에트가 몸을 회전하며 횡으로 크게 검을 그었다.
한꺼번에 네, 다섯 마리가 반죽이 되어 썰려 나갔다.
나무 열매는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들었다.
파에트는 뒤로 물러서면서 차곡차곡 적의 시체를 늘렸다.
파에트가 열매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기사단이 아니었다.
“좀 생긴 대로 처 사쇼!”
불만을 터트리는 기사 한 명의 외침과 함께 랜스 차지가 시작되었다.
나무 열매들을 토막 내는 그들의 몸은 진득한 녹색 피가 땀처럼 흘러내렸다.
파에트에게 달려들 기회가 없는 외곽의 녀석들은 아예 새로운 먹이인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쪽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파에트와 함께 누빈 전장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기사들은 그동안 고생해서 배웠던 검술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손이 닿는 대로 휘두르고 걷어찼다.
하지만 나무 열매들의 머릿수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들의 체력이 빠져나갔다.
거친 입김이 턱까지 닿았다.
진득한 녹색 피를 씻어 내리는 더운 땀이 이마와 목을 적셨다.
삼자갈나무들은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포자 씨앗을 몇 차례 더 내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들 때문에 우선순위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파에트의 다소 단순무식한 전법이 들어맞고 있었다.
삼자갈나무의 송곳 같은 가시가 파에트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