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84)
레필리아 레소드-84화(84/398)
레필리아 레소드 84화
폭주(8)
파에트는 선회해서 다시 듀라한을 향해 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파에트는 검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투둑, 툭!
파에트가 사용하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서로의 몸을 붙잡지 않았다.
아까부터 무리했던 결과였다. 파에트는 갑자기 맨손인 상태가 되었다.
“한동안, 네 머리통을 달고 다니겠다.”
듀라한의 차가운 음성이 파에트의 몸을 휘감는 듯했다.
놈의 거대한 대검이 레이피어처럼 가볍게 반원을 그렸다.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파에트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푸쉭! 으드득!
그때 시커먼 안개가 듀라한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것은 갑자기 듀라한의 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크윽! 감히 대결의 순간을 방해하다니!”
듀라한은 노기를 품으면서 검은 안개를 떼어냈다.
파에트에게도 시커먼 안개가 달려들었다. 그는 놈의 거대한 아가리에서 회피했다.
갑작스러운 이변에 몬스터도 사람도 당황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파에트를 지키기 위해 몬스터를 밀어내면서 전진했다.
“키에에엑!”
트리글로다이트는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검은 청년, 아니, 리에르는 루비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자신의 손등 위에 묻은 피를 핥았다.
그의 등 뒤로는 살아 있는 생명을 굴복시키는 칠흑의 날개가 깃털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의 앞쪽으로는 살아 있는 생명을 모두 먹어치우는 검은 안개가 꿈틀거렸다.
트리글로다이트들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들은 감히 대항할 생각도, 감히 도망칠 생각도 못 했다.
아까 자신들의 두목을 쓰러뜨린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였다.
리에르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반항하지 못하는 트리글로다이트의 목이 척추와 함께 뽑혔다.
츄악!
남은 녀석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나자빠졌다. 리에르가 만들어낸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포악했다.
그것들은 포식자처럼 게걸스럽게 트리글로다이트들을 먹어치웠다.
“리엘?”
유트는 리에르의 모습을 발견하고 굳어 버렸다.
안 그래도 찾고 있던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리에르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리엘이라고?”
파에트도 유트의 말에 반응했다. 그는 검은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파에트가 알고 있는 리에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동생의 얼굴에는 살기가 넘쳤다.
마치 온기 따위는 없는 듯한 초점 없는 시선이 불안감을 유발했다.
리에르의 입이 미소를 흉내 냈다.
피가 튀는 현장이 눈앞에 있었다. 목숨을 갈구하는 광기가 얼어붙듯이 유혹한다.
벌써 수도 없는 전투가 있었다.
아니, 학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목숨을 강탈하는 묘미는 미칠 듯한 목마름을 가시게 한다.
목마름이 가시는 것은 잠시였다. 눈앞에서 피가 튀는 것을 보지 않으면 식도가 타들어 갈 듯이 갈증이 일었다.
리에르의 등 뒤에 거대한 날개가 깃털을 흩날리며 펄럭였다.
풀밭이 리에르를 중심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칠흑의 안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삼자갈나무는 칠흑의 날개를 목격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파에트와 유트도 겨우 쉴 틈이 생기자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안에 있는 몬스터들은 전부 리에르를 보고 있었다.
“리엘!”
유트는 리에르의 주변으로 몬스터가 에워싼 것을 보고 당장 뛰쳐 나갔다. 그때 파에트가 유트를 막아섰다.
“파엘 형?”
유트는 자신을 제지하는 파에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누구보다 리에르를 반가워할 사람은 파에트였다.
하지만 파에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저런 게 정말로 리엘이라고?”
“무슨 소리예요?”
유트는 파에트가 리에르를 못 알아보나 의심했다.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게 아니야. 내가 왜 내 동생을 보고 도망가고 싶어지는지를 묻는 거야.”
유트는 파에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파에트는 상황에 맞지도 않는 농담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실전에서 겪어온 본능이,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유트는 그제야 리에르의 등 뒤에 이상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칠흑으로 색칠이 된 듯한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나무 열매들은 하나, 둘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나무 열매는 기사를 죽일 기회를 포기했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터무니없는 것이 나타났다고.
위기감을 느끼자 나무 열매와 삼자갈나무들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현재 상황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적들이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자신들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기사들에게는 완전히 시선을 뗀 상태였다.
핏빛에 적셔진 검은 청년. 그 존재를 발견하는 순간 기사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순간 유트의 머릿속으로 티미가 했던 헛소리들이 떠올랐다.
-내 애인인 에레사도 이미 녀석에게 죽었으니깐.
티미가 공포로 미쳐서 마음대로 지껄인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유트는 티미의 헛소리를 다시 한번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부정한다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리에르에게 느껴지는 살기는 범상치 않았다.
리에르는 삼자갈나무나 기사들에게 별 감흥도 없는 듯 무심하게 걸어왔다.
기사들은 삼자갈나무 쪽으로 다가가는 검은 청년을 보고서 도망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리에르는 귀가 먹은 것처럼 들은 체도 안 하고 삼자갈나무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삼자갈나무였다.
느릿한 몸뚱이와는 다르게 잎사귀가 무성한 나뭇가지는 매우 빠르고 정교하게 날아들었다.
리에르는 날아드는 공격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흘낏 바라보았다.
성난 나뭇가지는 날아들다가 갑자기 부러져 나갔다.
투둑, 투두둑!
삼자갈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저절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무 열매들은 땅에서 튕기듯이 뛰어올라 리에르를 덮쳤다.
리에르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오른쪽 발을 들어 땅을 굴렀다. 그러자 검은 기류가 피어올랐다. 일단 생성된 기류들은 순식간에 열매들을 종잇장처럼 구겨 버렸다.
살과 뼈가 연녹색 내장들과 함께 돌돌 말아진다.
피의 빗속에서 리에르는 미소를 머금었다.
리에르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남아 있던 검은 기류는 아직 덤벼들지 않은 나무 열매들을 향했다. 서른 명의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힘겹게 막아섰던 나무 열매들이었다.
그런 나무 열매들이 한 청년의 손짓 하나에 전부 산산 조각났다.
기사들은 자신들을 도와준 청년에게 열광하지 않았다.
검은 청년의 눈동자에 비치는 기사들은 나무 열매와 동급으로 보였다.
“지금 무슨 일이…….”
유트는 리에르가 방금 전투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리에르가 이렇게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는지 알지 못했다.
리에르가 하는 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그저 잔혹한 살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사들과 파에트, 그리고 유트는 멍하니 전장을 바라보았다.
리에르는 칠흑의 날개를 흩뿌리면서 삽시간에 삼자갈나무와 열매들을 분해했다.
리에르가 걷는 자리마다 초록색 체액이 허공에 어지러운 낙서를 그려댄다. 지나가는 곳마다 나무 열매들과 삼자갈나무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리에르는 순식간에 백 기 이상의 몬스터를 전부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제야 싸워볼 만한 놈이 등장했는가!”
듀라한은 자신에게 달라붙었던 검은 연기를 전부 소멸시켰다. 그는 암흑의 대검을 높이 들면서 리에르에게 돌격했다.
“리엘!”
유트가 소리쳤다. 하지만 리에르는 여전히 친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푸직!
듀라한은 말 위에서 거꾸러졌다.
그는 낙하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곧 그는 자신의 유령마가 갑자기 땅 위에서 솟아난 석벽으로 인해 목뼈가 부러진 것을 보았다.
‘이미 죽은 유령이 물리 피해를 본다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듀라한은 오랜만에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공중에서 제비를 돌면서 착지했다. 그러고는 대검을 어깨 위로 세우면서 돌격했다.
리에르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바닥에서 룬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대각선으로 솟아올랐다.
듀라한의 갑옷이 부서져 나갔다. 날카로운 비석이 옆구리를 찌르고, 내장을 착취했다.
“오오오!”
듀라한이 리에르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그는 뒤로 힘껏 젖혔던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이이이이!
공기마저 분열시킬 만큼 매서운 놀림이었다.
커다란 무게의 대검이어도, 그 속도는 레이피어만큼이나 재빨랐다.
상대는 너무나 빠른 대검 공격에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듀라한은 자신이 더욱 강해질 것을 믿었다.
자신의 저주받은 암흑 대검이 또 상대의 피를 빨고서 힘을 전달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엔 늦었다.
탱!
그때 듀라한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과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검을 튕겨냈다.
듀라한은 리에르의 손이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피할 새도 없이 상대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들어왔다.
두둑!
상대의 손이 가슴속을 마구 헤집었다. 곧 청년의 손은 원하던 것을 찾아내고서 손을 뺐다.
시커먼 마력으로 꿈틀거리는 심장이 몸 밖에 나와서도 펌프질을 하고 있었다.
검은 청년은 주먹을 폈다. 시커먼 심장이 허공에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곧 청년의 발이 그것을 짓밟았다.
“오오오!”
듀라한은 자신이 불멸에서 필멸로 바뀐 것을 느꼈다.
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을 끝내주는 이가 강하다는 것이 기뻤다.
탓!
청년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가로 저었다.
듀라한은 시커먼 구체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여러 차례의 타격이 전달되었다. 곧 그는 구멍 난 넝마처럼 되어 비틀거리다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인을 잃은 저주받은 대검도 곧 주인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이제 검은 청년 리에르는 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파에트는 동생의 눈과 마주쳤다.
흑요석처럼 맑은 눈을 하고 있던 자신의 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핏빛 눈동자로 바뀌었다.
“대장을……. 피신시킨다.”
몸을 가눌 힘도 없는 기사들은 동료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이가 다 빠진 검을 바닥에 꽂은 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기사들의 등줄기로 오싹함이 밀고 들어왔다. 그것은 한없는 공포와 무력감이었다.
“리엘…….”
유트의 입술이 달싹였다. 유트는 입안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친구의 부름을 들었는지 리에르의 시선이 움직였다.
피로 적셔진 얼굴은 이전과는 이질적으로 달라 보였다. 항상 장난기와 심술을 담고 있던 친구의 얼굴은 이제 낯설고 차가웠다.
자신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리에르를 보면서 유트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들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왜 자신의 친구는 저런 모습으로 있는가?
왜 그의 손에 에고 소드, 아르미안이 보이질 않는가?
왜 친구는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가?
“물러나라, 유트.”
파에트는 냉랭한 목소리로 유트를 자신의 뒤편으로 밀어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랑스러운 동생과 반가운 재회 인사를 해야만 했다.
뜨거운 몸과 차갑게 식어가는 머리.
어떤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파에트의 얼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리에르는 잠시 냉랭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평소의 모습인지라 유트는 안심이 되어 다시 입술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유트는 보게 되었다.
리에르의 입은 귀까지 닿을 정도로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그의 초승달처럼 웃고 있는 눈은 광기의 빛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