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86)
레필리아 레소드-86화(86/398)
레필리아 레소드 86화
흑막(2)
리에르는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의 날개가 잘려 나갔다.
파에트의 검이 길게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들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이상을 휘둘렀던 검이었다.
천재.
그런 이름으로 불려도 파에트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잘난 척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그가 경쟁 상대로 생각했던 것은 대륙 최강의 기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로이스타를 뛰어넘고 싶었다.
천재적인 재능과 끝없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발검이 빛의 날개를 산화시켰다. 검은 장막마저 검에 닿자 녹듯이 공간을 내어주었다.
리에르의 루비색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유희에 불과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너무나 강했다.
그의 날카로운 발톱이 자신의 영역을 깨뜨리고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최후. 그것을 머릿속에 그렸다.
파에트는 리에르와 눈을 마주쳤다.
공포에 젖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파에트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놓았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간 검은 엉뚱한 곡선으로 던져졌다.
“크흡!”
파에트는 손목이 접질려진 느낌을 받았다. 뒤로 물러선 그를 바라보고 리에르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엘…….”
파에트는 작은 희망에 기대어 입술을 열었다.
그 순간 리에르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검은 장막이 일시에 복구되더니 날개가 사납게 깃을 부풀렸다.
검은 장막은 창으로 변해서 쏟아졌다.
파에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기류를 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스무 살 중반의 나이에 대장이 된 천재 기사.
그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지키지 못했다. 곧 그의 몸에 검은 창이 관통하며 핏물을 뽑아냈다.
파에트는 이미 모든 힘을 사용했다. 리에르의 반격을 피할 힘조차 없었다.
그는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 무릎이 저절로 꿇어졌다. 점점 땅이 그의 얼굴을 향해 솟아올랐다.
쿵!
파에트는 그대로 차가운 대지 위로 쓰러졌다.
“이 개자식아아!”
파에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기사들은 검과 창을 들고 질주했다. 그들이 덤비지 않았던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대장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파에트가 차마 동생을 베지 못하고 죽어주는 것을 보았다.
기사들은 대장의 복수를 위해 달리고, 달렸다.
날개가 잘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스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리에르는 코웃음을 치면서 땅바닥에 발을 굴렀다. 수인을 맺는 리에르의 앞으로 검은 안개들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죽음을 부르는 사신처럼 검은 안개는 탐욕스러운 맹수로 화해 기사들을 반겼다.
창과 검이 번뜩이며 피가 튀고 비명이 대지를 두드렸다.
검은 안개에 찢겨 나가고 삼켜지는 기사들은 무력하기 그지없었지만 멈춰 서지는 않았다.
그것이 기회가 되었는지 몇몇 기사들이 검은 안개를 뚫고 리에르의 코앞까지 와서 검을 높이 들었다.
리에르는 비아냥하는 얼굴로 죽음을 각오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명을 걸어 내려치는 검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까딱거렸다.
푸욱.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검을 내려치던 남자는 머리와 몸이 생이별하며 뒤로 넘어간다.
동료의 시체를 넘어 다른 기사의 창이 리에르의 배를 찌르고 들어왔다.
팅!
검은 장막이 생성되며 힘없이 무기가 튕겨 나갔다.
기사는 이를 으드득, 사리물었다. 죽음을 불사해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서걱.
포스의 마나 앞에서 강철의 갑옷은 의미가 없었다. 나가떨어지는 시체의 뒤로 피투성이 기사들이 서 있었다. 너무나도 분하고, 너무나도 미력하여 뺨 위로 눈물이 타고 흘렀다.
리에르가 손을 허공 위로 휘젓자 검은 안개들은 삽시간에 주변을 피로 물들었고, 시체만이 대지 위를 두드렸다.
생명을 모조리 조각내 버린 리에르는 내성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천천히 죽어가는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는 파에트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칠 것 같은 쾌락.
달콤하고도 자극적인 흥분에 리에르는 길길이 날뛰고 싶었다.
손끝까지 쩌릿쩌릿한 스릴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충동이었다.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창을 들었고, 검을 들었다. 비록 장막을 넘지는 못했으나, 생명을 불어넣은 검은 리에르에게 생채기는 남겼다.
‘얼마나 강한 것이 이 앞에 있을까?’
리에르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이 앞에 있을까?’
리에르는 너무나 설레고 흥분된 나머지 전신을 떨었다.
그 기쁨은 오래 남지 않았다.
리에르의 루비색 눈동자는 금방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훑었다. 묻어져 나온 액체는 눈물이었다.
스스로 왜 눈물을 흘리는지 몰랐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던 은회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검을 거둔 검푸른 청년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에 걸음을 멈췄다.
리에르는 아리따운 금발 머리카락의 여성을 기억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의 설렘을 불러일으키고, 만족감을 채워주는 여성이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이내 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 뒤로 보이는 증오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티미, 죽……인다.”
티미의 숨결이 느껴졌다. 바로 저 건물 안이었다.
리에르는 내성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숨 쉬고 있었다.
도시를 지켜야 했다.
에레사를 괴롭힌 녀석을 죽이고,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내성에 자리 잡은 괴물들을 전부 죽여야 했다.
목적이 떠오르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리에르는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걸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는 광소를 터트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리에르는 다시 걸음을 시작했다. 그의 곁을 따르는 시커먼 안개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아무리 포스의 존재라지만 육체는 인간이었다.
마력의 날개도 잘려 나갔고, 한계까지 도달해서 숨이 턱까지 치달았다.
리에르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었다. 이내 그의 눈앞을 가로막은 내성 문이 일그러지며 부서졌다.
그는 입을 귀 끝까지 벌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 * *
“리엘…….”
유트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등 뒤의 상처로 인해 땅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피로 인해 젖어버린 땅바닥은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 대신에 몽롱할 정도로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미쳐 버린 친구를 막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자신의 처지를 용서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잠식되어 가는 죽음은 그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자비도 주지 않는다.
파에트도 죽었다. 그의 기사들도 죽었다.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죽을 거라면 10년 전 그때, 어머니의 품에서 죽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차갑게 식어가는 몸에서 빠져나가는 뜨거운 기운은 유트에게 포기하라고,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아, 일이 벌어졌네. 젠장.”
그때 낯선 여성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시간에 온 것 같은데, 뭐가 틀어진 거지.”
이런 살육의 장소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발랄한 목소리였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유트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유트는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신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
발을 동동 구르며 신경질적으로 혼잣말하던 여성은 유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관심이 생긴 듯 폴짝거리며 뛰어왔다.
가물가물한 눈의 시야 속으로 예쁘장하지만, 심술이 가득해 보이는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자꾸만 닫혀가는 눈꺼풀 속에서 유트는 힘겹게 숨을 헐떡여 보였다. 그런 유트를 내려다보던 파란 머리칼의 여성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왕가의 핏줄을 보다니.”
유트는 입을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었다. 무게추가 달린듯한 입술이 때지지 않았다.
“베리타스(Veritas) 왕가의 생존자니?”
생전 처음 보는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상대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유트는 충격을 받은 듯이 동공을 열어 보였다.
한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는 여성.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들일 가능성이 컸다.
유트는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흔들어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풋, 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심해. 나는 그들이 아니니까.”
푸른 여성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유트의 미간을 꾹꾹 찍어 눌렀다. 그러고는 쭈그리고 앉아 품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다!”
그녀는 조그만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치 끈적이는 피를 모아둔 것 같은 작은 시약병을 들어 보이며 그녀는 미소했다.
“비싼 거니까 약효는 좋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린 푸른 여성은 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면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고는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려 보였다.
굳이 냄새를 맡지 않아도 고약한 비린내가 유트에게도 전해졌다.
“난 엘 파실드의 부탁을 받고 왔어.”
엘 파실드.
첫 번째 포스 각성자로서 백색의 위정자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푸른 머리칼의 여성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을 지었다. 곧 그녀는 유트의 코를 엄지와 검지로 집고서 억지로 약을 먹였다.
유트는 구역질이 나왔다. 마치 입안을 하수구로 만드는 듯한 고약한 냄새를 느꼈다.
“얘, 가만 좀 있어.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그렇게 중얼거린 여성은 유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유트는 자신을 애처럼 부리는 여성의 행동에 잠시 얼이 빠져 버렸다. 이 도시에서 항상 점잖고 어른스러웠던 그를 애 취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패왕의 핏줄이란 것을 알고도 서슴없이 행동했다.
그녀는 유트의 몸을 벌렁 뒤집었다. 당황스럽지만 고통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유트로선 반항할 수도 없었다.
푸른 여성은 유트의 등에 난 상처 위로 시약을 붓기 시작했다.
치이익.
상처 부위에서 뜨거운 김과 함께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유트는 비릿한 신음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베리타스의 핏줄이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이야?”
천진난만한 그녀의 말을 듣고서 유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목숨을 위협하던 상처다. 그것을 겨우 엄살로 치부하는 사람이 정상일 리 없었다.
“당신은…….”
유트는 통증이 순식간에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한 죽음이 목을 옥죄이고 있었으나, 착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시약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효과만큼은 대단했다.
물론 다시 먹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린내 덕분에 아직도 혀가 얼얼했다.
“이 남자도 아직 살아 있네?”
파란 머리의 여성은 쭈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고 있었다.
유트는 무기를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바로 전에만 해도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던 기사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인간이었던 고깃덩어리들만이 창자를 비집고 땅바닥을 메워놓고 있을 뿐.
열여덟에 불과한 유트는 질릴 만큼 많은 시체를 보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경험을 했어도 시체는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포스가 지나간 자리에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니.”
유트는 푸른 여성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트는 그녀가 시약병의 코르크 마개를 여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게 피할 정도로 무서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파에트의 입가에 시약을 흘려보내는 것을 보았다.
“설마……!”
유트는 그제야 그녀가 한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던 파에트의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돌았다.
유트는 파에트를 향하여 뛰다시피 걸었다. 온전치 못한 몸이기 때문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알싸한 통증이 전달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에트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는 사람이니?”
그녀의 말에 유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땅을 짚고 일어났다.
“그럼 아까 내가 너한테 해줬던 것처럼 상처 부위에 골고루 이걸 뿌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