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2)
레필리아 레소드-92화(92/398)
레필리아 레소드 92화
외전 흔적(1)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치 않고 일한 손을 가진 남자.
금발의 소녀는 그 남자의 손을 떠올렸다. 굳은살이 가득한 투박한 손이 자신을 쓰다듬을 때면 행복했다.
밤늦게 술을 먹고 들어오는 아빠가 턱수염 난 볼을 비볐을 때를 떠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핀잔하는 엄마의 얼굴.
술 냄새가 나지만 소녀는 피하지 않았다. 왠지 아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적과 지인들이 전부 모였다.
소녀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아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변 이웃의 도움으로 나무 관속에 안치되었다.
어두컴컴한 흙구덩이 안으로 들어가는 아빠를 보면서 소녀는 다시 오열했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소녀는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치마는 땅바닥의 흙으로 인해 지저분해졌다. 새빨갛게 부어오른 뺨 위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항상 감싸 안아 주던 엄마는 혼절했다. 소녀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었다. 다정하게 안아 주던 아빠는 이제 만날 수 없다.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었다. 눈물샘이 고장 날 정도로 울어대던 소녀는 머리 위로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온통 적셔진 붉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검은 머리카락의 꼬마가 서 있었다. 평소에 짓궂은 장난들을 걸어오며 괴롭히던 남자아이.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까치집을 지은 머리는 지저분했다.
항상 괴롭히던 꼬마가 왜 자신의 곁에 있는가 싶은데 녀석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로 있었다.
자신보다도 더 작은 악동. 아니, 실제로 나이도 두 살이 어렸다.
항상 시비를 걸던 옆집 아이가 무던히도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 위에 손을 올린 꼬마에게 불쾌감은 없었다.
평소 같으면 머리가 헝클어진다고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흐르는 장례식장.
소녀는 자신보다도 작은 꼬마를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다.
소녀의 나이 여덟 살, 꼬마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슬픔은 옅어졌다.
아빠가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그녀가 상처가 아물 때쯤. 새 아버지가 생겼다.
어색하게 말하던 엄마에게서 소개받은 남자는 모녀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주었다.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소년의 장난기가 줄어들었다.
잡아먹을 듯이 시비를 걸어대지 않았다. 징그러운 벌레들을 들이밀던 것도 이제는 하지 않았다.
물론 소녀가 아끼는 인형들의 팔, 다리를 바꾸어 다는 일은 여전했다.
치마를 들치는 행위도 여전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빈도는 현격히 줄었다.
그렇다고 편안하지는 않았다. 짓궂은 패거리는 또 있었다.
그들은 남다르게 예쁘장한 소녀를 삐뚤어진 애정으로 괴롭혔다.
그 정도가 질적으로 좋지 않고, 심한지라 소녀는 집 밖을 나서는 것도 싫어하게 되었다.
소녀는 창문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다가 그들이 있으면 얼른 숨었다.
관심을 폭력성으로 보여주는 악동들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없어질수록 원조 악동이었던 옆집 소년의 얼굴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느 날엔가 금발의 소녀는 창틀 바깥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소년에게 맛있는 것을 대접했다. 그리고 다친 상처들을 치료하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싸웠구나?”
오늘도 어딘가에서 신나게 싸움을 하고 온 소년은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원래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니깐.”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치켜 올려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소녀의 어머니는 살포시 웃으며 그를 쓰다듬었다.
“항상 우리 에렌을 지켜줘서 고맙구나.”
“흥, 누가 그런 녀석을.”
조그만 녀석이 코웃음을 치면서 팔짱을 껴 보인다. 상처 때문에 온몸이 따가울 텐데도 제법 잘 참아내고 있었다.
“에렌을 지켜주는 건 고맙지만, 아르빈트 부인은 가슴이 아플 거란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거만하게 턱을 치키며 답변했다.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훌륭한 기사가 되려면 이 정도 수련은 당연해.”
여성은 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딸인 에레사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키도 작은 아이였다. 그러한 꼬마가 말하는 것이 너무나 당돌했다.
소년은 볼을 긁적이더니 딴전을 피우는 척, 들릴 듯 말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에레사를 괴롭힐 수 있는 것은 나만의 권리이기도 하고…….”
“그래, 앞으로도 우리 에렌이랑 친하게 지내렴.”
“친한 게 아니라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년은 소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소녀도 이제는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듯, 소년과 항상 함께하였다.
세월이 흘렀다.
소녀는 숙녀가 되었고, 페이서스 카에르에 다니게 되었다.
소녀의 나이가 열여덟을 넘어 성인식을 앞두게 되었다. 더 이상 소녀를 괴롭히는 악동들은 없었다. 오히려 아름다워진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녀는 성적도 우수할뿐더러 성품도 좋았다. 덕분에 교사와 학생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자라온 소년은 정반대였다. 그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무시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출신이 문제였다.
대륙에 이름 높은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
거기에 카에르와 카이샤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형의 존재.
사람들은 누구나 소년에게 기대했다. 그리고 정작 본 모습을 알게 되면 비웃거나 무시했다.
소년은 검술에 재능이 없었다. 공부에도 소질이 없었다.
처참한 성적으로 인해 카에르를 졸업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며, 주변의 친구들과도 툭 하면 싸우는 등. 대인 관계 또한 좋지 못했다.
“에렌은 얼굴도 예쁘고, 인기도 좋은데 왜 남자 친구를 안 만들어?”
어느 날 같은 클래스의 친구가 넌지시 물어왔다.
한창 청춘을 만끽할 나이의 18세.
귀족이라면 이미 사교계에 화려한 진출을 했을 것이며, 왕족이라면 국정에 나설 나이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성 교제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였으며, 실제로 클래스 내에 커플을 이룬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나 되었다.
공부하기 위한 카에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연애도 공부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에레사의 친구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에레사가 남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 대단히 의아하게 느껴졌다.
카에르 내에서 미인으로 손꼽히는 그녀를 눈여겨보는 동급생은 많았다. 물론 상급생에서 하급생까지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공부와 실력까지 출중한 그녀는 동성에게도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항상 듣는 말인지라 금발의 미소녀, 에레사는 빙긋 웃어 보이고 말았다.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교제의 물결.
에레사는 굳이 연인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끼질 않았다.
“이 계집애야, 자꾸 나한테 너 좀 소개해 달라는 남자애들이 많아서 곤란하다고.”
친구는 에레사를 친구로 둔 덕분에 귀찮게 구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 귀찮게 구는 것이 자신에 관한 관심이었다면 고마웠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성은 대다수 에레사에게 접근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에레사는 옅게 웃으며 친구에게 넌지시 물었다.
“남자 친구가 있으면 뭐가 좋은데?”
에레사의 물음에 친구는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끔벅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아니, 솔직히 남자 친구 있으면 같이 놀러 다니기도 좋고, 외로울 필요도 없고…….”
친구의 대답에 에레사는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어디를 놀러 간다든지 한가할 때에는 소꿉친구인 리에르와 함께했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같이 다니면 심심할 필요가 없었다.
“소꿉친구와 다를 바 없네.”
“소꿉친구랑 같니, 맹추야? 너 그 리메른가 뭔가 하는 애랑 아직도 같이 다녀?”
“리. 에. 르. 야.”
리에르의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는 에레사를 보면서 친구는 이마 언저리를 짚어 보였다. 그러고는 잔소리를 시작했다.
“얘, 네가 뭐가 모자라서 하자 있는 애랑 같이 다니니? 그러다가 너 코 꿰인다?”
친구의 말에 에레사는 고운 미간이 찌푸렸다.
리에르는 성별을 떠나서 그녀에게 가장 친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듣기 거북했다.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친구는 계속 입에 침을 튀기며 설교하기 시작했다.
“아니, 카에르 내에서도 잘생기고, 집안 좋고, 실력 좋은 애들도 많은데 아무리 소꿉친구라지만 카에르 낙제생 라메르가 뭐니?”
“리. 에. 르. 야.”
에레사는 리에르의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비방하듯 말하는 친구가 못내 불만스러웠다. 그런 에레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조잘거리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 애 얼굴도 못생기고.”
“잘 뜯어보면 잘생긴 얼굴이야. 애가 잘 안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파엘 오빠랑 같은 얼굴이잖아.”
“그래……. 걔 머리도 나쁘잖아.”
“아냐, 어렸을 적부터 나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골탕 먹이는 걸 들으면 깜짝 놀랄걸? 잔머리를 얼마나 잘 굴리는데? 걔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그래. 걔 검술 실력도 형편없다면서? 유머도 없고.”
“아냐, 수련을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싸움은 잘해. 혼자서 여러 명과 싸워 이긴 적도 있는걸? 그리고 애가 툭툭 말을 내던지긴 하지만 대화하다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데.”
에레사가 하는 말을 듣다가 친구는 머리가 아파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리메루랑 사귀지그래?”
이번에도 친구는 이름을 잘못 불렀지만, 그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에레사는 당혹감을 느꼈다.
“우, 우린 그냥 소꿉친구일 뿐이고…… 그냥 옆집 사니깐…….”
“너 말이랑 행동이랑 안 맞는 거 아니?”
친구는 에레사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창틀의 바깥 사이로 무언가를 보고선 픽, 웃어 보였다.
“쟤도 귀족은 못되나 보다.”
친구의 말에 에레사는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바깥으로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가 또 불만인지 소년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은회색 머리카락의 미소년이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또 검술을 연습하다가 된통 당했나 보다.’
에레사는 리에르가 하는 행동만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연신 입가를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에레사를 보며 친구는 기가 막힌단 소릴 내어 보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옆에 있는 꽃미남이 훨씬 나아 보이는데.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어. 취향이란 것도 중요하긴 하다만. 저런 지저분한 꼬마가 뭐가 좋다는 건지.”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에레사를 보았다.
이미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그녀를 보고서 저절로 한숨을 다시 토해냈다.
“아무리 제 눈에 콩깍지라곤 하지만.”
유트가 잔소리하든 말든 무시하는 리에르. 곧 뒤따라오던 유이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화를 내는 모습이 보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말리는 유트. 그들을 보면서 에레사는 작게 폭소했다. 누가 뭐라 해도 리에르는 에레사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에레사는 또한 생각했다. 분명 성장하면 리에르는 그 누구보다 빛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비록 지금은 파에트나 유트에게 밀려 있지만, 리에르는 리에르이기에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