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3)
레필리아 레소드-93화(93/398)
레필리아 레소드 93화
외전 흔적(2)
비극이라는 이름의 폭풍우는 가족을 잃게 했다.
머물 곳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반쪽과도 같았던 청년을 찾기로 했다.
에레사는 생각했다.
항상 자신을 알게 모르게 곁에서 지켜주던 소년을 이번에는 자신이 지켜 주리라고.
하지만 마음먹고 떠났던 여행도 힘겨웠다.
보고 싶은 리에르는 만나지 못하고, 사람들의 흉흉한 소문들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적혈의 악마, 대륙의 학살자, 피의 축제.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소꿉친구를 일컫는 칭호였다.
에레사는 어쩌면 리에르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존재가 아닐 거로 생각했다. 불안했지만 그래도 그를 보고 싶었다.
최초의 포스 엘 파실드. 그리고 그의 연인인 맹약의 카르샤. 몇백 년 전에 전해지던 전설 속의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은 이질적이었다.
‘에렌 양, 당신이 아니라면 그는 돌아올 수 없어요.’
백발의 남성. 엘 파실드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던졌다.
에레사가 마음 약해질 때마다 카르샤는 위로와 포옹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그들은 작은 항구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은 그녀가 살았던 페이서스 항구를 축소한 듯한 분위기였다. 에레사는 왠지 모를 향수와 설렘마저 느끼며 옛 추억들을 회상했다.
“꺄아악!”
평화로웠던 마을에 비극이 닥쳐왔다.
“엘…….”
하필이면 엘과 카르샤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 있어 조사차 떠나 있었다. 전투능력이 없다시피 한 에레사만이 이 마을에서 쉬고 있었다.
에레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코스모스 교단. 이들은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 균형을 조정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마을은 흑 갑주를 걸친 기사들의 공격에 힘없이 당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살육이었다.
우아하게 백마 위에서 사람을 꼬챙이로 도려내는 것은 유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 기사님들. 살려주시오. 우리 마을은 아무런 죄가 없소.”
마을의 촌장이 오열했다. 에레사에게도 살갑게 대해주던 인자한 분이었다.
그의 옆집 살던 벌목꾼도 죽었고, 작게 술집을 운영하던 가게 사장도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교도가 죄가 없다니.”
기사는 그렇게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우, 우리 마을은 토속 신앙이 있었을 뿐입니다!”
조상 때부터 대대손손 토속 신앙이 있었기에 코스모스의 교리를 배우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교도는 죄다.”
기사는 촌장의 몸에 검을 내려쳤다.
잔혹한 소리와 함께 촌장의 얼굴이 핏빛 혈선을 중심으로 갈라졌다.
“꺄아아!”
에레사는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엘.’
엘이 있었다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카르샤.’
카르샤 또한 마찬가지.
에레사는 비극을 막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 촌장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향해 기도했다. 하지만 신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코스모스의 기사들은 이교도의 신을 외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비웃듯이 학살을 퍼부었다.
“사, 살려주세요.”
한 여성이 아이를 끌어안고서 눈물을 토해냈다.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아이만이라도…….”
“네 죄가 있는데 어찌 아이에게 죄가 없다 하느냐.”
기사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서 여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사가 무덤덤한 얼굴로 칼을 내려치려 하자 그녀는 손을 모아 절박하게 외쳤다.
“저, 저희도 코스모스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필요 없다.”
촤악!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검에 베여 힘없이 쓰러졌다.
“어, 엄마……!”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가 핏물에 젖어 떨었다.
에레사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에레사는 바닥에 널브러진 돌을 주웠다. 그러고는 입술을 꾹 깨물고 기사를 향해 던졌다.
예전에 카이샤에서도 투척하는 법을 배운 적은 있었다.
쉬익!
에레사가 던진 돌멩이는 기사의 투구에 정통으로 맞았다.
기사의 목이 꺾였다. 그는 머리를 원위치로 돌린 뒤에 돌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나쁜 사람들!”
에레사는 다시 돌을 던졌다.
기사는 이번에는 검을 들어 돌멩이를 튕겨냈다. 그러고는 끈적한 혀로 입술을 핥아 보였다.
“이런 촌구석에 이렇게 반반한 계집이 있을 줄이야.”
그는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이 에레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마치 뱀의 시선에 닿은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에레사는 아이에게 도망가라는 눈빛을 계속 보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시체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오열하는 아이는 기적을 꿈꿨다.
“넌 죽이지 않겠다.”
기사가 에레사를 향해 걸어왔다. 에레사는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검은 구할 수 없었지만 긴 막대기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랫동안 검을 쉬었기에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는 몰랐다.
무엇보다 상대는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프로다. 자신 같은 여자애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에레사는 자신의 소매를 이빨로 물고 찢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돌돌 감았다.
기사는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에레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그는 에레사가 막대기를 집어 든 것을 보고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뭐지, 그건?”
“…….”
“설마 지금 싸우겠다는 건가?”
“…….”
에레사의 고운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싸울 태세를 갖춘 에레사를 보고 기사는 입가를 이죽거리면서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그래, 사냥감이 가만히 죽을 때를 기다리면 재미없지.”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을 흔들 듯이 들었다.
“그 예쁜 눈동자가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군.”
기사는 그대로 에레사에게 달려들었다.
에레사는 뒤로 도망쳤다.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슴처럼 도망치는 건가?”
기사는 신이 난 듯이 추격해 왔다.
에레사는 상대가 갑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상당히 빨리 달리는 것을 봤다. 하지만 오래갈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쉬익!
무언가가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읍!”
에레사는 통증을 느끼며 넘어졌다. 무언가가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릿한 통증을 느끼면서 에레사는 나지막하게 신음을 토해냈다.
“사냥은 원래 심장을 노려야 하지만.”
갑옷을 걸쳤기 때문에 기사는 에레사를 달리기로 따라잡을 수 없다. 그는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어서 귀찮았는지 투구를 벗어 던졌다.
엉망으로 짓눌려 있는 지저분한 갈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에레사는 발목을 집어 보았다. 끈적거리는 핏물이 손에 묻어져 나왔다. 기사는 어느새 도망치는 에레사에게 단검을 집어 던졌었다.
“알았으면 이제 치마나 위로 올려.”
기사는 에레사에게 그렇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에레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기사는 가학심을 느꼈는지 기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에레사가 쥐고 있던 막대기로 기사의 목을 찔렀다.
“컥!”
기사는 생각지도 못한 에레사의 일격에 헛숨을 들이켰다. 기껏해야 예쁘장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에레사는 카이샤에서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그중에서 실력이 좋았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맞은 기사가 주춤거릴 때, 에레사는 자신의 발목을 베었던 단검을 들어 그대로 투척했다.
돌멩이만큼이나 투척하기 좋은 단검이 그대로 기사의 눈에 박혀 들어갔다.
“끄아아악!”
기사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기사는 자신의 눈을 관통한 단검을 감히 뽑지도 못하고 그 근처만 짓눌렀다. 그가 마치 마약을 먹은 것처럼 휘청거릴 때, 에레사는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이년이! 감히, 나를!”
기사는 단검이 박혀 들어간 눈을 감싸면서 에레사를 노려보았다.
한쪽만 남은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에레사는 이를 악물고서 막대기로 기사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시원하게 부러져 나가는 막대기와 함께 기사가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에레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사를 지나갔다. 다행히도 기사는 그대로 기절했는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리 천을 감아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굳은살이 없어서 손이 찢겨 나갔다.
에레사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엄마를 잃은 아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에레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시체를 덮은 채로 핏물에 적셔져 있었다.
어느새 다른 기사가 와서 어린아이를 죽였다.
에레사는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때 에레사를 발견한 기사들이 광기 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에레사는 다친 다리로 힘겹게 도주를 시작했다. 뛰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고 싶었지만,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정표가 되고 있었다.
아까처럼 기사 하나라면 어떻게든 방심하게 해서 위기를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둘이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쏴아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레사는 골목 안쪽으로 숨어서 숨을 헐떡였다. 그 심호흡마저도 폭우가 감춰주었다.
그녀의 핏물은 순식간에 빗물에 씻겨져 내려갔다.
흔적을 잃어버린 기사들은 아쉬움을 이기지 못했는지 계속 둘이서 수색을 했다.
에레사의 미모를 보고 놓치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쏴아아, 쏴아!
비가 땅바닥을 하염없이 두들겼다. 에레사는 눈을 질끈 감고서 오열했다.
아무런 힘도 없었다. 작은 용기를 냈지만, 의미는 없었다.
“흑, 흐윽. 리엘…….”
이제 힘들었다.
단 하나뿐인 소꿉친구의 행방은 보이지 않았다. 이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보라 속에서도 코스모스의 성기사들은 힘없는 마을을 유린했다.
죄 없는 사람들이 검은 성기사의 창날에 꿰어지고, 허공에 목숨을 담은 피를 흩뿌렸다.
빗물은 핏물이 되어 마을을 무너뜨린다.
에레사는 그저 사람들을 도주할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나 참혹한 상황에 그녀는 눈물을 토해냈다.
“제발…….”
에레사의 고운 뺨 위로 눈물이 비와 함께 뒤엉켰다.
엄습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마을 사람들도, 자신도 안전하지 못했다.
검은 메뚜기떼처럼 밀고 들어오는 성기사단의 모습은 절대적인 죽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갑자기 빛이 번뜩였다. 떼를 지어 몰려오던 검은 성기사단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언가에 의해서 차례차례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저건…….”
에레사는 뭔가가 이변이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기사들의 머리통이 팽이처럼 바닥을 굴러다녔다.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지금 들려오는 것은 온통 기사들의 비명뿐이었다.
“저건 뭐야!”
“죽여!”
“커헉!”
“나, 날개!”
혼란스러운 기사들의 목소리가 대지를 두들겼다.
그들은 단 하나의 남자에 의해서 역으로 학살당하고 있었다.
‘설마…….’
에레사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운명 같은 예감이 그녀를 움직였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기괴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칠흑으로 만들어진 검이 기사들을 마음껏 도륙했다.
일방적인 학살자였던 성기사들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칠흑으로 빛나는 한 쌍의 날개가 길게 펼쳐졌다.
기사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 적혈의 악마!”
말을 끝낸 기사는 순식간에 머리가 찢겨 나갔다.
핏빛의 눈동자를 가진 악마가 피식자를 바라보았다.
“저, 적혈의 악마는 우리 교단의…….”
기사 하나가 당황스럽게 말했다. 그때 옆에 있던 기사들의 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기사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롬 님 맞습니까?”
기사 대장이 물었다.
에레사는 칠흑의 사내가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적혈의 악마는 리에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꼬마 리에르가 아니었다.
적어도 180 이상은 되어 보이는 장신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리엘…….”
에레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그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롬 님. 이러면 곤란합니다. 선지자 아르미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그래.”
포식자를 의미하는 붉은 이채가 서려진 눈동자는 사냥감을 노려보았다.
“내 이름은 롬이 아니다.”
빗물에 적셔진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포식자는 차갑게 조소했다.
“그 선지자를 죽이기 위해서 가고 있다. 어디 있는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광기로 번들거리는 남자의 말에 기사들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살육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