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4)
레필리아 레소드-94화(94/398)
레필리아 레소드 94화
어벤져(1)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꿈틀거렸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과 동시에 하늘에선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내 우수수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를 두들기는 굵은 빗줄기가 뿌려졌다.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엉겨 붙었다.
귀찮은 나머지 긴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다시 한번 낙뢰가 번뜩였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칠흑의 날개를 펄럭이는 그였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웃어 보이던 그였다.
그런 사람이 작금의 사태를 벌인 것은 사실이 아니리라 믿고 싶었다.
철컹, 철컹.
규칙적인 강철 갑옷의 마모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때리며 물이 튀기는 소리가 사방에서 요동쳤다.
마을을 토벌하기 위해 몰려오는 더러운 인간들의 욕망, 자애롭고도 정의로운 신이라는 미명 아래 살육을 허가받은 성기사들이 마을을 침범하고 있었다.
콰르릉!
다시 한번 사방을 번뜩이던 번개가 울려 퍼졌다.
적혈의 악마라는 호칭을 얻게 된 붉은 눈동자. 그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더 좋은 조건을 불러보았나.”
붉은색 로브를 걸친 남성의 입에서 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중년을 넘겼을 거란 것만 알 수 있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그리고 중후함은 그가 가진 직위를 짐작하게 하였다.
“교단에 적대하는 자입니다. 조건에 구애되지 않는 자이며, 로빈타에 빛나는 수호자가 쉽게 응하겠습니까?”
젊은 목소리의 남성도 얼굴을 가리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중년인이 아니었다.
근육질의 마초적인 남성이 크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냥 확 쓸어버려! 힘을 두었다 무어에 쓰자는 겐가!”
로브가 꽉 조여 올 정도로 덩치가 큰 남자는 난폭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연신 긴 탁자를 내려치는 바람에 탁자의 수명이 얼마 가지 않으리라 예상될 정도였다.
“라스, 자네의 그런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쳤다간 우리 장로회 사람들은 손 둘 곳이 없어진다네.”
탁자의 가장 상석에 있는 남성이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래 끓는 듯한 노인의 말에 라스라고 불린 남성도 억지로 화를 참아냈다. 아무리 그가 성격이 급해도 장로회의 리더 격인 대장로에게 대들 만큼 막되진 않았다.
“그 문제라면 이미 선지자께서 손을 써두셨네.”
칠흑으로 도배된 방안에 로브를 걸친 12명의 사람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둠이 삼킨 듯한 침묵은 정적을 태우는 양초의 불빛 소리만이 들려왔다. 정적을 만든 장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도 그분의 수하가 나갈 것이다. 페를네아브의 건은 그걸로 마무리하기로 하지.”
회의실을 정적으로 만든 것은 선지자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선지자라고 불리는 여성. 그녀의 오른팔로 있는 칠흑의 남성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어느 날 계시와 함께 협회에 돌아온 선지자는 이름 모를 청년을 데리고 왔다. 대장로가 예지 받은 선지자의 방문은 교단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껏 암묵적으로 세상의 그늘 속에서 지배력을 쌓아오던 그들이었다. 이제 수면 밖으로 부흥을 이끌 그녀의 방문을 모두가 환영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온 청년은 교단 쪽에서 불쾌감을 일으켰다. 교리를 따르지 않는 데다, 외지인이었다. 그런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장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지의 선지자는 청년을 곁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꼭 인형처럼 표정도, 감정도 없는 청년이었다. 선지자는 그런 청년을 너무도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다. 그런 선지자를 보면서 교단 내에서는 불순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선지자에 대한 계시마저 의심받을 때, 청년은 암살 훈련을 받았다.
청년의 앳된 얼굴이 사라지고 남자로서의 성숙함이 깃들었다. 조각처럼 깎인 얼굴은 준수했으며, 고된 훈련으로 다듬어진 몸은 슬림한 근육질이 되었다.
선천적으로 포스라는 재능을 가진 청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 최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그가 나선 임무는 단 한 차례도 실패한 일이 없었다.
감정 없는 선지자의 개는 적대하는 자를 용서치 않았다. 오로지 선지자의 명령만 들었다. 교단 최고위층인 12장로회의 명령과 권위도 선지자의 개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또 그 잘나신 개인가.”
라스는 불평을 토해냈다. 교단 최고위층인 자신에게 인사 한번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렇다고 선지자의 장난감에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아직은 선지자의 장난감은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즉, 쓸모가 있다.
“말씀을 조심하시게, 라스여.”
“알았수다.”
대장로가 라스를 제지하자 다른 장로가 입을 열었다.
“라스 님의 불만도 수긍이 갑니다. 그는 너무 위험합니다.”
얼굴을 가린 후드 사이로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이 드러난 남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듣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느껴질 만큼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지녔다.
“그렇소, 놈은 임무에 항상 완벽하지. 하지만 언제까지 감정 없는 인형에게 큰 공을 쌓아만 두겠는가?”
“나 역시 벤젤리 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오.”
“선지자껜 미안하지만, 놈을 내칠 때가 되었소.”
12 원로회의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한 장로가 선지자에게 추근거린 적이 있었다. 워낙에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지만 신심이 깊은 인물이라 인지도가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선지자의 개는 자신의 주인에게 추근거린 장로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 사건은 장로를 비롯한 모든 교단의 인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같은 교리에 속한 인물을, 그것도 최고의 권위자인 장로회를 독단적으로 살해했다.
교단 회의에서 결정될 일을 단독으로 처리한 사건은 지금껏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비밀 결사단 같은 그들의 존재가 지금껏 지켜지고, 유지되었던 것은 엄격한 교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맑은 물을 흙탕물로 만들고 있었다.
장로회는 주시자로서 세계를 지켜보고 다스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최고의 권위자들에게 이번 일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삐쩍 마른 노 장로의 손이 다시 한번 올라가자 정적이 찾아왔다.
무겁게 입을 연 노 장로는 고개를 주억이면서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니 좀 더 지켜봅시다.”
“그 시기라는 것이 올 때까지 새파란 녀석에게 무시를 당하란 말로 들리는데.”
12장로 중에 가장 다혈질 성격을 가진 라스는 이죽거렸다. 임무나 작전에 사용되는 성전사는 필요성에 따라 움직였다. 불필요해지면 버리고, 필요하면 최대한 소모하며 이용한다.
겨우 그런 소모품 따위에게 장로원이 움직인단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선지자의 수족이란 사실은 큰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선지자 역시 장로원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 가는 마나의 소유주였다.
“그에게 좀 더 걸맞은 족쇄를 채우길 요청하지.”
말이 요청이지 그냥 흐지부지 넘어가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단의 입장에선 개는 정말 쓸모있는 존재였다. 대륙에서 이름이 알려진 강자들도 가볍게 처리하는 암살 능력.
말 그대로 최강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포스 사용자. 그런 인물은 함부로 다루기도, 함부로 박해하기도 어려웠다. 죽은 원로의 목숨값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는 인재이기에.
“언제부터 최고 권위의 장로회가 새파란 애송이 눈치를 보고 살았단 말인가!”
결국, 라스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통을 터트렸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꼭 큰 사고를 칠 것 같았다.
라스는 더 이상 회의장에서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뛰쳐 나가 버렸다.
그의 그런 모습에 후드를 깊게 눌러쓴 장로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웅성거림 속에서 노장로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답답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라스여, 어찌 사자를 고양이로 보고 있는가.’
이후에 그가 벌일 사달이 눈앞에 보이는 듯 노 장로의 초췌한 모습에 그늘이 서렸다.
* * *
“아, 더우니까 짜증 난다.”
장밋빛으로 물든 조그만 입술. 갈색 아치형의 눈썹, 그리고 훤히 드러난 이마 양옆으로 산양처럼 묶어 고정한 금발.
이 모든 것을 소유한 아름다운 소녀가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였다.
볼록한 가슴 봉우리까지 파인 브이넥, 소매 없는 튜닉에 호화로운 색으로 문양이 그려진 외투, 금으로 장식된 버클을 얇은 허리에 감은 소녀는 누가 보아도 고귀한 혈통이라 느껴졌다.
다만 오냐 오냐 키워졌는지 아치형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올라서 있었다. 그녀는 손부채를 부치다가 투덜거렸다.
“피스, 어떻게 좀 해봐.”
“아가씨, 저희는 더 덥습니다.”
뜨거운 공기만 느껴지는 날씨였다. 상대는 소녀의 샐쭉한 눈빛을 보고 식은땀을 뻘뻘 흘려 보였다.
기껏해야 튜닉을 입은 소녀의 말은 그저 그런 칭얼거림밖에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눈앞의 상대는 이 더운 날씨에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짧은 커트 머리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순백의 아제리엘 문양이 그려진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이 손을 뻗어 가끔 그늘을 만들어 주지만, 그것만으로 더위가 식히진 않는다.
그나마 그는 건틀렛과 투구는 자신의 종자에게 넘겨놓았고, 갑옷 위로는 로브를 걸쳐서 햇볕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그러고 다니래?”
“장비를 착용하지 않으면 기사가 아닙니다.”
“그럼 저쪽은?”
금발의 소녀는 코를 찡긋하면서 뒤쪽을 가리켰다.
피스라는 사내 이외에도 약 스무 명가량의 인원이 더 있었다. 다섯 명은 짐꾼이었고, 피스를 포함한 6명은 이실렌 대공 휘하에 기사들이었다.
다만 그들의 복장은 피스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비를 전부 짐 마차에 실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장비하고 있는 것은 칼 한 자루가 다였다.
“마리엔느 아가씨가 옳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을 보호해 주는 갑주도 좋지만, 그 갑주에 먼저 바비큐 신세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아제리엘의 기사단원들과 마리엔느라고 불린 금발의 소녀는 하하,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용맹하고도 강인한 아제리엘의 기사가 더위에 쓰러진다는 말은 있을 수도 없었다. 짐꾼들마저 고개를 숙이고서 키득거리자 피스는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 어떤 위험이 있을 줄 알고…….”
어색한 모습으로 변명을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을 더 웃게 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일반적인 기사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남자였다.
피스는 근육질의 몸을 하지도, 강인한 성향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겉보기엔 서글서글한 시골 청년 같은 인상에 숫기도 없었다.
처음 마리엔느는 피스가 자신의 호위를 맡게 되었을 때도 그가 벙어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고 있던 마리엔느의 눈에 이채로운 사람이 보였다.
하나같이 웃고 있는데 일행 중 유일하게 표정이 없는 남자였다.
눈을 가리는 짙고 검은 머리카락. 왼쪽 눈에 착용한 검은 안대. 멀리서 보아도 얼음같이 차갑고, 신비롭게 보였다.
“아가씨?”
잠시 넋을 잃고 있던 마리엔느를 보고 피스가 불렀다. 움찔한 마리엔느는 손사래를 치면서 당황하고 있었다.
피스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