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5)
레필리아 레소드-95화(95/398)
레필리아 레소드 95화
어벤져(2)
‘고작 짐꾼 따위에.’
마리엔느는 남성을 보고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준수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신분의 차이는 있었다.
대공의 손녀와 출신을 알 수 없는 짐꾼은 대화도 섞지 못할 사이였다.
무엇보다 저택에 도착하면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꿈꿔왔던 그와 만날 수 있다.
순백의 기사단. 아제리엘의 부기사단장인 맥크웰 리버레스.
그는 마리엔느와 약혼이 준비되고 있는 인물이었다.
고위층 귀족에 뛰어난 실력.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는 금발의 기사는 연회장에서도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파티에서 금발의 미남 기사를 만나고 싶은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과 만날 자신이 겨우 기사도 아닌, 기사의 종자도 할 수 없는 짐꾼을 보고 만족할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리엔느는 고개를 흘낏 돌아보았다.
보면 볼수록 짐이나 나르는 하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마른 체형으로 보이지만 무거운 짐을 드는 일을 해서 그런지 팔 근육과 어깨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 사이 패인 쇄골은 매력적인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야!”
마리엔느는 무언가 딱딱한 것에 이마를 부딪치고는 뒤로 넘어가 버렸다.
옆에 있던 피스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부축하였다. 다른 생각을 하다 마리엔느는 나뭇가지를 보지 못했다. 그런 것이 창피해서 마리엔느는 홍시처럼 얼굴을 붉혀 보였다.
겨우 짐꾼을 구경하다가 넘어지는 영애라는 것은 황당하고 웃긴 일이었다. 마리엔느는 피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 순간 안대를 낀 짐꾼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오싹함. 그것이 느껴졌다.
마리엔느는 항상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에게 관심받고, 누군가에게 축복받아 왔다. 그런 자신을 저렇게 냉랭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피스 이외의 기사들도 마리엔느 쪽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더 몰려들자 마리엔느는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치며 답변했다.
“괜찮아요, 전 괜찮으니까 어서 맥크웰 경을 보러 가죠!”
“아가씨……. 부단장님이 아닌, 대공님의 파티에 초청받으셨던 겁니다.”
“아…….”
마리엔느는 자신도 모르게 실언을 해버리는 바람에 속을 내비치고 말았다.
그녀는 삽시간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고, 주변은 화기애애한 웃음이 퍼졌다.
누구보다 고귀한 핏줄이지만 안하무인 하지 않는 사랑스러운 소녀. 그녀의 행동을 보며 짐꾼들도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웃지 않는 것은 검은 안대를 낀 남성이었다. 그는 일행들이 아닌 주변 공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르르, 스으으.
철부지 아가씨에게도, 웃고 있는 기사들의 귓가에도 들리지 않는 미세한 소리였다.
검은 안대의 남성은 긴장감으로 등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뒤쫓고 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 몰랐다. 그것은 아주 숙련된 사냥꾼이며, 강력한 생명체였으니까.
검은 안대를 낀 남성은 이내 귓가에 들려오던 소음이 다시 자취를 감추는 것을 느꼈다.
벌써 세 번째였다.
근육만 단련한 듯한 기사들은 밤의 휴식이 찾아올 때마다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검은 안대의 남성은 비아냥거림 그 이상, 그 이하도 보이질 않았다.
그들이 불을 피우고 건조된 육포를 뜯으며 투덜거리는 그 순간에도 포식자는 사냥감을 노리고 있었다.
더 웃긴 사실은 그 덩치 큰 무언가는 검은 안대의 남성을 의식하고 있는 거로 보였다.
과대망상이 아니라는 듯, 벌써 여러 차례 검은 안대 남성이 신경을 곤두세우면 순식간에 기척을 감춰 보였다.
“괜찮으니 얼른 가요.”
붉어진 얼굴로 일어선 마리엔느는 기사들의 보호 아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일행은 다시 길을 서둘렀다.
일찍 도착한다면 오늘 저녁 안에는 대저택이 자랑하는 금빛 정원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도 밤이슬을 맞으며 노숙을 하게 된다면 마리엔느의 투덜거림은 지금보다 더 심하게 기사들을 괴롭힐 터였다.
순백의 기사 중에 유일한 20대 남성은 피스였다. 안 그래도 생김이 만만해 보이니 마리엔느에게 시달림을 가장 많이 받는 인물이었다.
순백의 기사 중 한 명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피스가 금발의 악마에게 설교를 받지 않으려면, 서둘러서 장미 꽃잎을 띄운 욕탕으로 모셔야 해.”
휴식과 식사를 마친 일행은 저택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스르르, 스르륵.
그 무언가도 움직임을 시작하였다. 마치 수풀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녀석은 일행을 뒤쫓고 있었다.
검은 안대의 청년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그것을 향해 청각을 곤두세웠다.
공녀를 호위하는 순백의 기사들은 아무런 위기도 느끼지 못한 듯 아까처럼 농을 서로에게 주고받았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하인들도 기운이 생기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잔잔한 바람에 수풀과 나뭇가지가 흔들렸고, 명랑한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무도 느끼지 못한다.’
검은 안대의 청년은 이제 확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소리가 나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마법적인 생명체라는 것.
“정말 마리엔느 아가씨 너무 예쁘지 않나? 집안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게다가 의외로 풍만하기까지!”
“귀가 밝은 기사님들이 있다면 댁 주둥이를 개먹이로 줄 거란 것도 아나?”
행렬에서 떨어져 있는 짐꾼들끼리 이야길 주고받았다.
힘든 여정에서 이런 농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몇 시간 뒤면 맛없고 텁텁한 건조 식량과도 당분간 이별할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인부들은 즐거워져서 말이 많아졌다.
그들의 대화에 유일하게 끼어들지 않는 검은 안대의 청년은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의 파공음을 놓치지 않았다.
휘릭.
인부 중 하나가 컥, 하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어색한 춤을 추듯이 비척거렸다.
인부의 목은 화살에 관통당해 있었다. 눈이 뒤집힌 채 즉사한 그를 보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어헉!”
쓰러진 남자의 옆에 있던 인부가 놀라 나자빠졌다.
피보라를 일으키며 꿈틀대는 시체의 마지막 경련. 그것을 지켜보는 일행들은 순식간에 공포로 전염되었다.
휘릭!
다시 한번 바람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두 명의 인부가 비명을 토해내었다.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그들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순백의 기사들이 거의 동시에 검의 마찰음을 일으키며 공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마리엔느는 바로 전에만 해도 장난을 치고 웃고 떠들던 평화를 떠올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현실이었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피로 대지를 적시는 인부들의 시체가 보였다.
마리엔느는 공포로 인해 비명도 잊었다.
기사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중년인이 포메이션을 정비시키며 소리쳤다.
“공녀님을 모셔라, 피스!”
“네!”
피스는 겁먹은 채로 몸을 떨고 있는 마리엔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평소와 같았다면 자신의 몸에 손을 댔다고 경을 칠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놔버린 듯, 팔을 늘어뜨렸다.
피스는 화살에 저격당하지 않을 만한 곳으로 마리엔느를 앉혔다.
다시 한번 바람을 찢어내는 소리가 울리자 그녀의 어깨가 움찔하였다.
곱게 자라나온 공녀로서 죽은 사람을 눈앞에서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안타까울 정도로 파리해 보였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을 지키는 기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입니다.”
피스는 마리엔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다독였다. 평소에는 기센 여성이지만, 전장에선 약하디약한 소녀에 불과했다.
큰 눈망울을 굴리며 두려워하는 그녀를 피스는 등으로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전투 상황을 지켜보았다.
몇 차례 더 날아드는 석궁의 화살을 쳐낸 기사들의 눈앞으로 초록색 피부를 가진 이종족이 나타났다.
머리에는 색색의 깃털 관을 쓰고, 동물의 가죽으로 가린 하반신 사이로 초록빛 다리가 드러났다.
“고블린.”
피스는 초록 피부를 가진 이종족을 알아보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던지기의 명수인 녀석들은 지나가는 여행자를 먹이로 삼는 약탈 행위의 전문가였다.
밤의 눈이 밝으며, 수풀 사이를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지만 키는 약 120티에 불과하여 무장한 상대에겐 잘 덤벼들지 않았다.
주로 여행객과 상인을 상대로 공격하는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기사를 선공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인부들은 땅에 엎드리거나 짐을 버리고 수풀로 숨어버렸다. 짐을 옮기는 일에는 위험수당도 달려 있었지만, 직접 전투를 하지 않는 그들에게 큰 수익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짐을 이동시키는 그들이, 가장 소중한 재산은 목숨이었기에 전투 상황에서는 피해야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검은 안대의 청년 역시 고블린들의 모습을 보고 의아함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수풀에 가려져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되지는 않았다.
숙련된 석궁 사수의 발사 시간은 20초, 고블린의 신체 구조로는 약 30여 초라고 단정 짓는다면, 지금껏 발사된 화살로 보았을 때 40기에서 50여 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금속을 제련하는 기술이 없는 수풀의 종족인 그들이 갑옷을 걸치고 있을 리가 만무하며, 여행자들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하는 숏소드는 강철 갑옷을 파고드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유인책.’
검은 안대의 남성은 하나의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도 석궁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쉬리릭!
바람을 찢는 파공음. 검은 안대의 사내는 날아드는 석궁 화살을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바위와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짐꾼들은 끔찍한 장면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말수도 없고 표정도 없는 녀석이었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 죽음이 바로 자신에게 찾아올 것을 대신 맞아준 것일 수도 있었기에.
하지만 다시 눈을 뜬 짐꾼들의 눈 안에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는 청년이 보였다.
청년은 손을 들어 짐과 몸을 단단히 고정해 준 고리를 풀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짐이 땅바닥에 착지했을 때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청년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스슥, 스스슥.
이제는 일반인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노골적인 움직임에 청년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 무엇인가는 미끄러지듯이 빠르게 수풀 위를 달리고 있었고, 행선지는 이제 명확해졌다.
앞에서 지켜주는 기사들의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덮치기 위해 녀석은 빠르게 움직였다.
마리엔느의 기사들은 석궁 화살을 쳐내면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화살이 떨어졌는지 고블린들은 키엑, 하는 비음을 내면서 일반인 남성 팔꿈치만 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채엥, 챙!
고블린과 기사들이 맞붙기 시작하면서 철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들이 검은 기사들을 공략하기 어려움이 있었다.
숙련된 기사들을 상대로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작은 체구를 이용해서 숨어 있던 녀석들이 꽤 많았으며, 개중에는 슬링(Sling)을 이용해서 앞에 나선 동료들을 지원사격 해왔다.
체구상의 문제 때문에 검은 무섭지 않았으나, 던지기의 달인인 고블린의 슬링은 무서웠다.
간간이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드는 돌멩이가 위협적이었다.
처음에는 손쉽게 우위를 점하고 있던 기사들이 동료들 사이에서 교묘한 슬링 덕분에 다소 밀리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