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6)
레필리아 레소드-96화(96/398)
레필리아 레소드 96화
어벤져(3)
짧은 머리카락의 기사, 피스는 언덕 위의 슬링 고블린을 제거할 생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피스가 움직이자 마리엔느의 큰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녀는 불안한 듯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피스는 검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떴는지 감았는지도 구분 가지 않는 실눈은 마리엔느에게 있어 놀림의 대상이었다.
너무나 평범하게 생겼기에 갑주를 걸치지 않으면 기사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그가 싸우러 나가는 것을 보고 마리엔느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피스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가씨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계셔야 합니다.”
“나, 날 두고 어디가!”
설마 했던 일이 정말로 벌어졌다.
마리엔느가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바뀌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피스는 냉정하게 주변의 사태를 다시 파악하였다. 전방에 교전을 치르는 동료 기사 20명, 그리고 고블린들의 공격에 희생당한 몇 명의 인부. 남은 인부들은 짐을 버리고 몸을 피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적 고블린의 숫자는 약 40마리 정도였으나 그 숫자는 30으로 줄어 있었다. 언덕에서 슬링 사격을 하는 녀석들은 약 10마리.
슬링 고블린을 제거하는 데 드는 시간은 약 5분. 슬링 고블린을 몰살, 혹은 교란할 시 전투의 양상은 바뀔 것이고, 전투는 10분 내외로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냉정하게 계산을 하는 피스는 절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도, 적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마리엔느는 피스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성격 좋은 사람. 기사답지 않은 인물. 그것이 그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그는 아제리엘 중에서도 높은 서열을 가진 수석 기사였다. 또한, 마리엔느를 호위하는 기사 중, 가장 강한 남자이기도 했다.
“아가씨, 15분 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요.”
“저 사람들 다 강하잖아. 네가 가지 않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넌 가면 죽을지도 몰라.”
다른 기사들은 체격도 좋고, 근육도 잘 달라붙어 있어 마른 체형인 피스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기는 했다.
마리엔느의 다소 버릇없는 말에도 하하, 짧게 웃으며 피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순백의 서열을 인정받은 남자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잠시 이걸 맡아주세요.”
피스는 두려워하는 마리엔느를 향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때가 덕지덕지 묻은 손바닥만 한 토끼 인형.
오래 사용했는지 안에 든 솜을 메우기 위한 봉제가 지저분하게 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더럽다고 만지지도 않을 그녀지만 상황이 다르므로 건네준 것을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받고 말았다.
“저에겐 아주 소중한 것인데요. 수호신 같은 인형입니다.”
“너……. 지금 장난해?”
피스의 말에 마리엔느의 고운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두려워하던 얼굴 대신 당장에라도 화를 낼 듯한 그녀의 얼굴에 피스는 하하, 웃었다.
“평소처럼 돌아오셨군요. 맥 부단장님을 찾아뵙는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선 다녀와야 할 듯하네요.”
“야, 잠깐……!”
말만 마치고 앞으로 뛰쳐 나가는 피스를 보고 마리엔느는 경직된 눈동자를 굴렸다.
피스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마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마리엔느는 그의 날렵한 모습을 보고 내심 놀라워하고 있었다.
피스는 동료들의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서 바로 언덕 위쪽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토끼 인형은 정말로 효험이 있는 거랍니다. 아가씨.’
3년 전에 비극적으로 죽은 여동생이 있었다.
철없는 것이 꼭 마리엔느를 닮은 아이였다. 그런 여동생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보물과도 같은 인형이었다.
전쟁터에 나가게 된 오빠를 걱정해서 빌려준다며 건네준 그 토끼 인형은 피스를 무사히 살아 돌아오게 하였다. 하지만 인형을 빌려준 동생은 3년 전 페이서스에서 생긴 비극으로 인해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적혈의 악마, 리에르 아르빈트.
참혹한 학살을 저지른 악마는 피스를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였다.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무참히 짓밟은 적혈의 악마, 그리고 그를 낳은 저주받을 가문이 지휘하는 기사단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십일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피스는 기사단을 탈퇴한 후 다른 영지, 다른 국가로 이주하였다.
아레스트 영지에 대해서 적개심에 불타올라 실력을 키운 피스는 적혈의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모든 전투에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강하고, 강하지 않다면 적혈의 악마를 죽일 수 없으니깐.
‘절대로, 복수만을 위해 살리라.’
키익, 하는 비음을 토해내며 언덕 위에 있던 고블린이 슬링에 돌을 재어 넣었다.
슬링은 활이나 석궁처럼 장거리 공격은 불가능하지만, 근거리를 벗어난 중거리에 알맞은 무기였다.
위력도 활이나 석궁 못지않을뿐더러, 연사 속도가 빠르므로 유용했다.
슬링을 쏘아내기 위하여 고블린이 팔을 추켜올렸다. 적들이 던지도록 가만히 있을 피스가 아니었다.
“하아!”
피스는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지근거리에 있던 고블린 한 마리가 당혹스러운 눈동자를 크게 열어 보였다.
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의 손잡이를 당겼다. 채찍처럼 휘둘러졌던 검날이 드드득, 소음을 일으키며 회수되었다.
갑작스러운 변칙 공격에 고블린이 잠시 움찔하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피스는 다시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티디딕. 묘한 소리와 함께 피스의 검날이 길게 늘어나더니 삽시간에 고블린을 베어 넘겼다.
한꺼번에 네 마리의 고블린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자 남은 녀석들이 슬링의 돌을 재빨리 던져 넣었다.
쉬이익!
아이 손바닥만 한 돌이 피스를 향해 정확히 날아들었다. 재빨리 피스가 고개를 젖히자 날카롭게 갈아진 돌이 뺨을 훑고 지나간다.
뜨거운 핏방울이 찢긴 볼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피스는 신경 쓰지 않고 고블린에게 돌격하였다.
몇 개의 돌멩이가 다시 날아들었다.
피스는 검과 건틀렛으로 쳐낸 뒤, 자신의 공격 범위 안으로 고블린이 들어서자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다급하게 슬링을 던져놓고 단검을 꺼내 들던 고블린은 피스의 빠른 검격 아래 베어 나갔다.
순식간에 정리한 고블린의 사체 위에서 피스는 뺨에 흐르는 더운 핏방울을 닦아냈다.
슬링으로 기사들을 견제하던 고블린을 제거했으니 전투는 금방 종결될 터였다. 하지만 피스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풀숲에 나동그라진 고블린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은 생각대로 진행이 되었다. 하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
기묘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경계심. 피스는 쿵쾅거리는 불안감으로 마리엔느를 향했다.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대공의 손녀는 피스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스가 검을 연습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또한 그가 저렇게 강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마리엔느의 눈으로 본 피스는 기사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순박하고 멍청한 청년에 불과했었다.
마리엔느는 순간 움찔하였다. 어색하게 웃어 보일까, 아니면 잘했다고 고개라도 끄덕여 줄까 생각하던 그녀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의 둥그런 시야 안으로 보이는 피스가 다급하게 무언가를 외치며 손짓을 하는 것이 보인다.
스르륵, 스르르르.
들리지 않는 피스의 외침과 형세가 역전되어 고블린들을 제거해 나가는 순백의 기사들. 그리고 마리엔느는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가리는 것을 느꼈다.
흉측하게 생긴 무언가가 뒤편에 서 있었다.
“아…….”
마리엔느의 몸이 경직되었다.
거대한 뱀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놈의 커다란 아가리가 벌려졌다.
날카로운 독니는 황소라도 단박에 죽일 듯 보였다.
놈의 몸에 그려진 화려한 무늬는 사냥감의 시선을 빼앗는다.
세 개나 달린 머리는 서로가 먹이를 먹겠다고 아웅다웅하였다.
그 흉측한 모습은 마리엔느에게 있어서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가씨!”
다급하게 검을 검집에 넣고서 피스는 마리엔느를 향해 달렸다.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듯이 내달린 피스의 시야 안으로 마리엔느가 굳어진 석상처럼 있는 것이 보였다.
세 개의 머리가 달린 거대한 뱀이 마리엔느를 휘감기 위해 달려들었다.
마리엔느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오금이 저려서 도망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항상 잔소리를 퍼부어서 미안하게 느꼈던 피스. 오랜만에 너무나 보고 싶었던 할아버지. 그리고 순백의 기사 맥크웰을 만나고 싶었던 소망들.
믿으라면서 줬던 행운의 부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녀는 피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앙갚음도 행운이 함께해야만 가능한 부분이었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의 눈가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꽃다운 나이답게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거대한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자 순식간에 모든 것이 암흑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차가운 죽음 대신, 침묵과 정적만이 마리엔느를 감싸 안았다.
마리엔느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 안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피스의 모습이 보였다. 다급하게 뛰어오는 피스의 모습을 보니 마리엔느는 몇 가지가 떠올랐다.
예쁜 남자들이 모여 있다는 가게에 갔다가 이상한 녀석들에게 붙들렸던 일.
피스의 애검을 동네 가게에 팔아버렸던 일.
무기를 잃어버리는 기사라고 골탕 먹여도 아무 핑계도 대지 않았던 그.
마리엔느는 처음으로 피스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아 만족스러웠다.
투둑, 툭.
끈적이는 액체가 수풀 속을 헤집는 소리.
굵은 혈관이 터지고, 세차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피보라.
그 속에서 춤추는 듯한 기괴한 비명에 마리엔느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질적인 뒷모습, 낯선 남자가 마리엔느의 앞에 서 있었다.
거대한 뱀은 아가리를 벌린 채로 더 이상 다가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거대한 뱀의 머리 세 개 중에 두 쪽은 깨끗하게 도려진 채로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마리엔느는 입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허억, 허억!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으, 으응.”
피스는 괴물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이 마리엔느의 상처부터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놀란 것 이외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피스와 마리엔느는 이제야 괴물을 막아선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지금껏 보지 못한 괴물이었다.
사람을 몇 합친 것보다 거대한 괴물은 머리가 잘려 나갔어도 아직 활동하고 있었다.
마리엔느는 보지 못했지만, 피스는 분명히 보고 있었다. 괴물이 그녀를 덮칠 때 피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갑자기 검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마리엔느와 괴물의 사이에 서서 손을 들어 올렸다. 피스는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청년은 맨손으로 괴물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찢겨 나간 뱀의 목 언저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청년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뱀의 머리통을 바닥에 던져 놓았다.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수풀에는 아직도 뱀의 피가 흩뿌려져 역한 냄새를 피웠다. 놈의 머리통은 아직도 생명이 남았는지 바닥을 튀기듯이 꿈틀거렸다.
“키이이!”
마지막 남은 뱀 머리가 포효와 함께 덤벼들었다.
“이봐, 위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