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7)
레필리아 레소드-97화(97/398)
레필리아 레소드 97화
어벤져(4)
피스는 상대가 뱀의 머리를 맨손으로 쥐어뜯은 남자임을 망각했다.
남자는 뱀의 머리통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빨래 짜듯이 쥐어 틀어 버렸다.
우두둑, 두둑!
피스는 믿어지지 않는 장면을 목격하고서 몸이 얼어붙었다.
검은 남성은 목에 걸쳐진 검은 안대를 다시 얼굴에 묶기 시작했다.
마리엔느는 검은 안대를 보고 아까 봤던 짐꾼을 떠올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뒤돌아선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의 짐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마리엔느는 그의 딱딱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흠칫하였다. 싸구려 작업복을 걸치지 않았다면 그 어떤 옷을 입어도 귀족처럼 보일 남성이었다.
말투는 무미건조했고, 흑요석을 박아 넣은 듯한 검은 눈동자는 얼음처럼 냉랭했다.
검은 안대의 청년은 숙녀를 대하는 예로 가볍게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그녀와 시선을 하며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의 행동은 예의 있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표정은 없었다.
마치 인형같이 느껴지는 남성이지만 묘하게 여성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마리엔느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받아들였다.
마리엔느는 청년의 손이 온기가 가득한 것을 느꼈다. 눈빛과는 다른 따뜻함. 그 따뜻함이 손을 타고 얼굴을 화끈거리게만 만든다.
마리엔느는 비천한 신분에 불과한 남자에게 두근거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지켜주었고,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마리엔느와는 달리 피스의 눈동자는 격앙되고 있었다. 꼭 깨문 입술을 찢어지고 턱 근육이 뒤틀렸다.
피스가 아직 살아가는 이유.
몰라볼 정도로 키도 크고, 얼굴도 준수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피스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인물이었다. 페이서스의 소년. 자신의 운명을 비극으로 곡조를 바꿔준 저주받을 청년.
‘리에르 아르빈트!’
격앙된 피스의 두 눈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온몸의 세포들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피스는 고블린의 체액이 묻은 검을 들어서 검은 안대의 남성을 향해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피스의 검이 허공중에 씻기듯 흩어져 나갔다.
검은 안대의 청년은 기묘하게 날아드는 칼날을 고개를 젖힌 것만으로 피해 넘겼다.
피스가 가진 사복검은 숙련된 사용자라면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칼날을 조종하는 것이 가능했다.
채찍과 검이 합쳐진 듯한 무기, 다루기가 어렵지만 마스터한다면 전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위력을 드러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을 베지 못한 검 끝이 호를 그리며 휘어져서 다시 적을 노렸다.
검 끝은 상대의 머리를, 검날은 상대의 목을 노리는 기묘한 공격이었다.
마리엔느는 갑작스러운 피스의 공격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피스는 순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였다.
검은 안대의 청년은 마치 미끄러지듯이 움직였다. 검날을 피하고자 몸을 숙이면, 검 끝이 머리를 꿰뚫도록 공격을 했다.
하지만 상대는 잔영을 남기듯이 사라져 버렸다.
목표를 잃은 검 끝이 빈 허공을 찔렀다. 손을 뒤로 당겨 재빨리 검을 회수하자 티디딕, 거리는 기묘한 마찰음들이 검 손잡이 위로 울렸다.
“피스, 무슨 짓이야!”
마리엔느는 피스의 머리가 이상해진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마리엔느가 아는 피스라는 남자는 절대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장난이라고 보기엔 피스의 얼굴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서운 모습이었다.
피스는 예전에 아르빈트 단장의 차남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살아 있던 때.
꼬마 숙녀였던 여동생은 검만 단련하는 피스의 영향으로 검술을 좋아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피스에 비해 여동생은 검에는 아무런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검술을 보고, 읽는 것을 좋아하여 피스를 졸졸 따라다녔었다.
* * *
“저기 있는 오빠 멋있지?”
어느 날 여동생이 피스를 잡아 흔들면서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다. 장을 보러 함께 나왔던 피스는 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무슨 일이기에 이 녀석이 이리 좋아해? 벌써 남자에게 관심을 가질 만큼 조숙하던가.’
피스의 시야 안으로 은회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보였다.
학원가의 최강자, 은발의 귀공자, 얼음의 왕자 등등 별 호칭을 다 달고 다니는 유트 로사리오라면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피스는 천부적인 재능을 소유했지만, 노력의 대가가 더욱 큰 인물이었다. 유트나 파에트 같은 하늘이 내린 재능 따윈 없었다.
대신 그는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검을 휘둘렀다.
또한, 체력을 기르는 데에 집중하였다. 덕분에 그는 이십 대가 되어 재능을 꽃피우게 되었다.
하지만 유트라는 소년은 달랐다. 1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인 기사들과 대적할 실력이었다.
피스는 왠지 모르게 약이 오르는 기분도 들었다.
“유트란 녀석이 인기는 좋은 것 같더라.”
피스의 말에 동생은 멀거니 눈만 끔벅거리며 올려다보았다.
피스는 여동생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고 생각해서 다시 말하려 했다. 그때 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입술을 열었다.
“아니, 아니. 그 옆의 오빠.”
“뭐……?”
동생이 한 말에 피스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보니 유트 로사리오 옆에 또 다른 남자애가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장난기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피스는 그 소년을 금방 알아보았다.
유트처럼 유명한 녀석이었다. 단, 천재가 아닌 둔재로서였지만.
아르빈트 가문의 차남이자, 버려진 인물.
항상 같이 다니는 친구라 해도 유트와는 천지 차이였다. 얼굴도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고, 성격도 다혈질에 실수투성이라고 들었었다.
피스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 눈을 굴리고 있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피나, 눈이 참 낮구나.”
“뭐야? 오빠야말로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거라고.”
피스가 무시하는 발언을 하자, 동생은 항의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피스는 하하, 웃어 보였다. 그러곤 동생의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였다.
“오빠야말로 눈을 떴는지, 안 떴는지도 알 수 없는 실눈 주제에!”
피스의 이성이 투득,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웅다웅했어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이었다.
피스에게 있어선 단 하나의 보석이었다. 그랬던 소녀는 3년 전, 모친과 함께 차가운 시체로 변했다.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다 적혈의 악마가 이끌고 온 몬스터의 공격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렸다.
의식을 잃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동생 피나를 지키기 위해 몸으로 보호하던 모친은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졌다.
차라리 어머니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동생 피나로 추정되는 사체는 전신이 뜯어 먹혀 알아볼 수 없었다.
* * *
피스는 회수한 검의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검은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루룩. 피스가 고쳐잡은 검이 소리를 내며 곡선을 그렸다.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위협적인 피스의 공격에도 유유히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피스의 폼멜(Pommel)은 주변에 큰 나무들에 걸려 상대를 공격하지도, 회수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눈앞에 복수할 남자가 서 있자 피스는 평소답지 않게 분노에 휩싸여져 자신의 약점을 깨닫지 못했었다.
넓은 전투에 있어서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자신의 무기는, 좁고 지형지물이 많은 곳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엔느는 더 이상 피스가 공격하지 못하자 휴우,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피스, 대체 왜 그래?”
피스는 마리엔느의 말에 대답 대신 검은 청년을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리에르 아르빈트, 내 눈앞에 나타나 줘서 고맙구나!”
피스는 피 끓는 외침을 하였다. 검은 머리칼의 청년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피스는 다시 청년과 사생 결판을 내기 위해서 검의 힐트(Hilt)를 양손으로 잡아 끌어내렸다.
검의 날이 촤르륵, 소리와 함께 접혀 들어갔다.
피스는 아직 미동하지 않는 청년을 향해 다시 살기 어린 검을 찔러 들어갔다.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있는 피스의 앞으로 마리엔느가 막아섰다. 힐책하는 듯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피스는 잠시 망설였다.
결국, 그는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피스는 적혈의 악마가 반격을 해오지 않자 오히려 의아함만 생겼다.
3년 전의 페이서스에서는 보이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말살하였던 괴물이었다. 그런 학살자가 지금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자신은 가족이 죽었던 그 순간부터 언제 죽는다 해도 상관없을 몸이었다. 하지만 대공의 손녀가, 자신이 호위해야 하는 마리엔느가 전투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피스는 마리엔느 덕분에 머리에 잔뜩 몰려 있던 피가 전신에 골고루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을 때에 지금 복수를 하기는커녕, 주변의 인물들까지 죽게 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피스는 적혈의 악마를 두고서 검을 다시 넣을 수밖에 없었다.
반수조차 남지 않은 고블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전의를 잃고 도망치는 적들을 무리해서 뒤쫓지 않았다.
적을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마리엔느의 안전을 기해야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친 기사들의 수는 있었으나 심하게 다친 사람도, 죽은 기사도 없었다. 다만 기습으로 인하여 죽은 짐꾼이 몇 있었을 뿐이었다.
짐꾼 중에 몇은 피스와 마리엔느 쪽으로 와서 머리를 연신 굽실거렸다.
“어이구, 저희 쪽 아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이자를 압니까?”
피스는 이제 조금 진정된 상태에서 되물었다. 중년의 인부들은 아직 살기가 가시지 않은 피스를 보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기사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룸이라는 아이로,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입쇼. 나으리, 미숙한 놈이 잘못했다면 제가 대신 사죄를 하겠습니다.”
기사는 국가의 안전, 그리고 국가의 상징성이 되는 상위층 계급이었다. 그리고 짐꾼이나 일용직들은 당연히 하층민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능력도,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연명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상위층에 있는 기사들이 마음먹고 불이익을 준다면 그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피스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중년 남성들은 몸을 굽힌 채 일어서질 못했다.
“아녜요, 이 사람은 절 구해줬어요.”
마리엔느는 중년인들이 허리를 펴지 못하자 안쓰러움을 느꼈다. 떨고 있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리엔느는 상황을 환기했다.
‘롬?’
인부들은 검은 안대의 청년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피스는 자신의 확신이 틀렸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였다.
아직 소년이었을 때 만났던 상대를 3년이 지난 시간 뒤에 알아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성장기에 놓인 소년이 어떤 청년이 되었을지는 부모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짐꾼 주제에 괴물을 악력만으로 죽인다?”
“이 아이가 원래 힘이 좋습니다. 보기엔 호리호리해도 힘이 장사입죠.”
검은 남자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짐꾼들의 책임자에게 들려왔다. 피스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롬이라는 남자를 바라봤다.
“내 검을 여유롭게도 피하더군.”
피스는 기사다. 그것도 순백의 기사 중에서 에이스였다. 그런 자신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하는 짐꾼 따위는 있을 리 없었다.
분명히 리에르 아르빈트, 그 저주받을 악마가 맞았다.
“검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아, 맞다. 이 친구 예전엔 잘나가는 용병이었다고 했었습니다. 눈을 다친 뒤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고 들었습죠.”
“네게 묻지 않았다.”
피스의 말에 책임자는 움찔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만해, 피스.”
피스가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자 마리엔느가 제지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