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8)
레필리아 레소드-98화(98/398)
레필리아 레소드 98화
어벤져(5)
마리엔느는 롬이라 불린 청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뒤에 서 있던 피스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나, 공녀가 있는 이상 공격할 수도 없었다.
피스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청년의 움직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집어넣었던 검의 힐트는 언제든지 빼 들 수 있도록 손을 가져다 댔다.
‘아가씨에게 손만 댔다간 같이 죽는 거다, 적혈의 악마.’
리에르 아르빈트는 세월의 흐름 때문에 어릴 적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150티 남짓하던 작달막한 키가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180티 이상은 되었다.
항상 싸움만 하던 꼬질꼬질한 꼬마가 이제는 가늘어진 눈매에 선이 갸름한 얼굴의 청년이 되었다.
피스는 남들보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러한 피스도 리에르와의 악연이 아니었다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하였다.
피스의 전투법은 검을 맞부딪히는 것보단 냉정한 상황 판단과 심리전에 능숙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최대한 분노를 삭이고 기회를 기다렸다.
공녀는 답지도 않게 손가락을 오물거리다가 조용히 시선을 위로 올려보았다.
롬이 입고 있는 옷은 남루했다. 하지만 흑요석을 깎아놓은 듯한 눈과 짙은 눈썹.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 속에 담긴 위험한 냉소는 매력으로 느껴졌다.
타이즈 바지를 입고서 교양을 뽐내던 귀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음……. 음, 몇 살이야?”
마리엔느는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고 싶었지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덕분에 마리엔느는 볼이 뜨겁게 달아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슬며시 롬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인형처럼 표정 없던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올렸다.
마리엔느의 주변에는 이런 남성이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미소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올해로 스물하나가 됩니다, 아가씨.”
마리엔느는 의외로 롬이 나이가 많지 않은 것을 놀라워했다. 롬이 노안이기보다는 보이는 분위기에 비해서 너무 젊었다.
“왜 짐꾼이야? 그 실력으로.”
마리엔느는 다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부끄러운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몰랐다. 사실 궁금한 것도 있었다.
방금 커다란 괴물을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맨손으로 잡아냈다. 그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실력일 것이다.
피스가 놀라는 것만 봐도 마리엔느는 유추할 수 있었다.
뭔가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는 수상한 남성. 하지만 섹시함과 어우러진 잘생긴 얼굴은 마리엔느 취향의 남성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면서 마리엔느는 망상까지 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성에게 대저택의 집사 옷을 입힌다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 그리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것 같은 설렘을 느낀다.
“미천한 제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죠. 제 부족한 실력을 띄워 주시면 곁에 계신 백기사분들이 웃을 겁니다. 치하하지 마소서.”
한 나라의 공녀와 일개 짐꾼이라는 큰 신분은 하늘과 땅이었다.
롬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롬은 길고 가느다란 손을 들어 가슴에 대어 보였다. 그러곤 겸손한 미소를 능숙하게 지어 보였다.
막일을 하는 사람치고는 굉장히 절도 있고 품격이 있었다.
정리를 다 끝낸 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색이 파리해졌던 짐꾼들도 각자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인부가 셋이나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들어야 할 짐은 더 늘어났다. 투덜거리고 싶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려야 할 판국이었다.
롬은 동료들이 일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어?”
롬이 가벼운 묵례와 함께 돌아서자 마리엔느는 당혹감을 느꼈다. 누구도 자신이 가라고 하기 전까진 꼼짝하질 않았다. 아무리 그가 은인이라지만 교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마리엔느와 롬이 멀어지자 피스의 눈동자가 뱀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힐트에 가져다 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은 이완의 끈을 놓지 않고 말아 쥐었다.
‘조금 더 아가씨의 안전거리가 확보된다면 녀석을 벤다.’
피스는 롬과 자신의 간격을 재고 있었다. 상대가 알아채든, 못 알아채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피스는 피 끓는 원한을 토해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롬의 가벼운 걸음걸이.
피스는 드디어 검을 뽑아낼 타이밍이 되었다. 기회는 여러 차례 오는 것이 아니었다.
피스는 그대로 롬의 머리와 몸을 분해할 생각으로 팔을 뻗어 내려 했다. 하지만 피스는 검을 뽑지 않았다. 아니, 검을 뽑지 못하고 있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검을 쥔 손에는 반응이 없었다.
머릿속으론 아가씨가 다치지 않을 거리상에, 충분히 녀석을 벨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론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개죽음뿐이란 것을.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십일검 기사단의 천재 기사 파에트, 그리고 신검 아르빈트의 앞에서도 이렇게 위축된 바 없었다.
누구 못지않은 강함을 갖기 위해 노력했고, 노력의 결실을 충분히 본 남자였다.
터덕, 터덕.
마침내 롬은 피스의 곁을 지나갔다. 피스는 원수가 태연스럽게 옆을 지나가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원망했다.
동생의 죽음을 기억하지만 움직이길 거부하는 신체를 욕설했다.
‘평생 같이 죽지 못한 것을 원망하지 않았나. 지금 그를 찔러 죽은 가족의 넋을 위로해야 해!’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슬픈 울림만을 남기며 정적을 만들었다.
피스의 입가에서 뿌드득,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턱 언저리는 근육이 뒤틀리고, 입가에선 피가 새어 나왔다.
“제 앞에서 다시 한번 검을 뽑는다면…….”
갑자기 귓가로 들려오는 속삭임.
“장소가 어디든 당신을 죽입니다.”
손가락에 경련이 일었다. 피스는 전신에 뱀이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차가운 공포, 그리고 무력함을 맛보았다.
자신에게 속삭인 뒤에 걸어가는 롬을 향해서 검을 찌르지도, 또한 그를 돌아볼 생각도 못 했다. 원한을 뼛속 깊이 새겨 넣고 3년간 검을 수련한 이래, 첫 번째 무력감을 맛본 패배였다.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를 눈앞에 둔 기분, 검은 바람은 자신감을 산산이 깨부수고, 어둠은 공포감을 조성시킨다.
‘죽음 따윈 이미 초월하지 않았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존재. 가족을 잃고 살아 돌아갈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자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3년 전의 각오를 상기하는 순간 피스는 힐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비집고 들어오던 땀방울을 미끄럽지 않게 해주는 그립(Grip)의 느낌이 전달된다.
피스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서늘한 철의 비릿한 신음과 함께, 피스는 모든 정신을 등 뒤편에 집중하였다.
롬도 서늘한 살기를 느꼈는지 자리에 섰다. 롬은 자신이 피스라는 기사에게 분명 의지를 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의외의 행동을 했다.
롬의 흑요석을 닮은 눈동자가 피스가 내뿜는 살기를 마주했다.
롬이 생성하는 중압감은 상대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전사라면 그 중압감에 무릎을 굽히며 공포감과 무력감만 느꼈다.
어쩌면 다신 검을 잡지 못하는 이도 있을 수 있었다. 전투를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이미 검을 잡을 자격 따위는 없기에.
‘죽여야겠군.’
롬은 지금껏 어금니를 드러낸 상대를 살려둔 적이 없었다. 싸구려 동정심의 대가는 항상 보복과 배신뿐 이었다.
치직, 치지직.
검은 기류가 롬의 손안에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일단 발동이 되면 적을 조각내지 않고는 멈추지 않는 빛의 칼날이었다.
롬이 그것을 꺼냈다는 것은 단 하나를 의미했다. 자신을 목격한 이도 전부 제거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을 적대하는 피스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이 안에 있는 20여 명의 기사의 목숨을 앗는다.
마지막 피날레로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를 창자까지 분해해서 바라보고 싶었다. 후식으론 죄 없는 인부들을 토막 내야 했다.
롬은 오랜만에 느끼는 감동적인 살의를 피우며 입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피스라는 존재부터 그 이외의 사람들까지 전부 살해할 생각이었다.
단 3분.
롬은 방금 교전이 끝나고 완전히 방심해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방심하지 않았다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치지지직.
검은 기류가 미약하게 번뜩이며 롬의 손목을 휘감았다.
“이봐!”
피스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검을 뽑다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롬의 손에서 번뜩이던 검은 번개도 멎어 들었다.
롬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금발의 소녀가 무언가를 까딱거리며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반 서민들은 구경도 할 수 없을 희디흰 장갑 한 짝. 장갑의 상면부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향기를 피웠다. 촘촘히 박아 넣은 에메랄드 보석은 고가품을 나타냈다.
“당신은 짐을 들어주는 일을 하잖아……. 이거 무거워서 그러는데 들어줄 수 있어?”
마리엔느가 흔들고 있는 것은 보기에도 가벼워 보였다.
“아가씨, 그 고귀한 짐은 미천한 제가 짊어지기엔 미력하리라 생각됩니다.”
“내가 들라면 드는 거야!”
마리엔느는 고집을 부리며 더 높이 장갑을 흔들어 보였다. 무겁다는 주제에 오히려 더 높이 드는 것을 보니 롬의 안색이 순간 뒤틀렸다.
“어, 지금 화냈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임무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구해줄 필요도 없을 계집이었다.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고 하지만 롬의 눈에는 철없는 여자아이에 불과해 보였다.
롬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자, 마리엔느는 저벅저벅, 겁도 없이 롬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다시 두 사람이 근접하게 되자 피스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마리엔느는 롬의 손목을 확 낚아채었다. 롬이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못한 것은, 너무 빨라서가 아니었다. 단지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엔느는 자신의 장갑을 억지로 롬에게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거만하게 입술을 열었다.
“일단 날 도와줬으니 저택에 도착할 때까진 편히 가게 해줘야지.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려서 포상도 주라고 할 테니깐. 조용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마리엔느로서는 나름으로 고마움의 표시였다. 아울러 롬의 외모는 짐꾼보단 좀 더 화려하고 품격 있는 쪽이 어울린다 생각되었다.
“네가 원한다면 우리 저택에서 집사로 일하게 해줄 수도 있어. 그 실력과 외모면 지금 하는 일보단 돈도 많이 받고 안락할 테니깐.”
마리엔느는 말해놓고 보니 너무 속을 내보였나 싶어 속으로 아차, 싶었다.
만약 롬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 응당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욕심도 있었다. 나라 주요 귀족들의 모임이 있다면 그 자제들의 모임도 있었다.
그 모임에 참석할 때는 여느 때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야만 했다. 아울러 데리고 다니는 집사나 시종은 액세서리나 다름없었다.
마리엔느와는 라이벌 구도를 그리고 있는 귀족 소녀가 한 명 있었다. 그녀가 새로 들인 어린 집사는 굉장한 미소년이라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적이 있었다.
마리엔느도 부럽기는 했으나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롬 정도면 충분한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라면……. 철의 대공 이실렌 각하를 말씀하시는군요…….”
“응, 알아?”
철의 대공 이실렌. 순백의 기사단을 거느리고 무에서 유를 창출해 낸 영웅. 그를 모르는 사람은 이 제국 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뛰어난 업적도 업적이거니와, 인자한 성품과 결백한 성품은 그를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마리엔느는 질문하면서도 할아버지에 대한 자긍심으로 한껏 콧대를 세워 보였다.
“이 나라의 땅을 밟으며 어찌 그분의 위명을 듣지 못하겠습니까. 꼭 먼발치에서라도 뵙고 싶던 분입니다.”
마리엔느는 새삼 할아버지의 위명에 놀랐다.
롬의 얼음 같던 얼굴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마리엔느는 뜻하지 않은 횡재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리엔느는 그 설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붉어진 마리엔느의 얼굴을 보면서 롬의 눈동자는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