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hilia Lesode RAW novel - Chapter (99)
레필리아 레소드-99화(99/398)
레필리아 레소드 99화
어벤져(6)
외지인에게 로빈타 왕국에 대해 생각나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철의 대공. 순백의 기사단 아제리엘. 이실렌과 마이어.
이 세 가지다.
철의 대제 이실렌 폰 페를네아브. 로빈타 왕국의 개국 공신이자 로빈타의 빛나는 수호자로 유명한 남자였다.
강철처럼 강인하고 굽히지 않는 신념에 대한 찬사로 철의 대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위명은 끝나지 않았다.
강철이란 이름처럼 단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방어전에서는 무패를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가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데에는 십일검 기사단만큼이나 훌륭한 기사단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순백의 기사단, 아제리엘.
강철의 대공은 국가의 상징이 될 만한 기사단을 창설했다.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로빈타의 정의를 수호하는 정예는 남성을 고무시켰고, 여성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직 십일검 기사단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가 인정하는 정예 기사들. 그중에 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젊고 잘생긴 기사 중의 기사가 맥크웰이었다.
마리엔느뿐만이 아니라 로빈타의 모든 아가씨가 눈도장을 찍은 인기남이었다.
마리엔느 일행들은 수도에서 떠나온 지 일주일 만에 노스펠리지에 도착하였다. 순백의 기사단이 처음 창설되고, 개국왕 마이어 론 로빈타와 이실렌이 만났던 장소였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는 이실렌의 별장도 이곳 유서 깊은 땅에 만들어져 있었다.
노스펠리지에 입성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웅장한 철의 장벽이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는 철의 대제를 상징하는 동상이 서 있었다.
동상의 뒤로 쭉 펼쳐진 도로는 잘 깎아진 돌로 구성되었으며, 도시 전체는 견고한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큰 도로에는 향기로운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고, 물품의 무게를 재고 있는 향신료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손님에게 입어볼 것을 권유하는 옷 가게와 철을 때리는 대장간이 모여 있었다.
좁디좁은 골목길을 장난치며 뛰어노는 아이들. 언덕 위에 흰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아도 평화로움이 깃든 도시였다.
“드디어 도착했어!”
마리엔느는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에 다시 돌아온 기쁨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녀는 양팔을 벌리며 맛있는 공기를 원 없이 마셨다.
마리엔느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때, 좋은 도시지?”
도로변에 들어서면 버드나무가 바람에 손을 흔들며 방문객을 반긴다. 마차에 짐을 싣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땀과 웃음이 깃들어져 있었다.
전국시대로 나누어져 전쟁이 빈번해진 혼란의 시기에는 찾아볼 수 없을 평화로운 도시였다.
“살기 좋은 곳이군요.”
롬은 반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마리엔느는 크게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 정착하게 해줄 수 있어. 난 누가 뭐래도 이 도시를 다스리는 할아버지의 손녀니깐.”
아니꼽게 듣자면 가문만 믿는 꼬마 숙녀가 생각 없이 지껄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떤 교만과 자만도 없었다.
마리엔느의 말을 듣고 롬은 고개를 숙여 감사의 예를 취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남자의 가려진 눈을 가리켰다.
“왼쪽 눈은 안 보이는 거야?”
보통이라면 장애가 있는 상대에게 장애를 묻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마리엔느는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물었다.
“잃은 것이 아니라 아픈 겁니다.”
“병?”
호기심이 많은 마리엔느가 눈을 끔벅거리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롬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검은 안대를 채운 왼쪽 눈을 쓰다듬었다.
“그랬다면 좋겠군요.”
롬은 말수가 거의 없었다. 정말 필요한 대답 그 이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마리엔느는 롬의 대화 방식이 이해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무례하다고 화를 냈을 터였다. 그녀로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피스는 아까 전투가 벌어진 뒤부터 롬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롬의 등을 공격할 태세였다. 지금 손만 움직이면 상대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터였다.
피스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지 알기에.
하지만 피스는 실패의 대가를 알고 있었다.
가족의 원한을 조금도 갚지 못한다. 아울러 아가씨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피스는 이를 갈았다. 여러 날 함께 길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롬. 아니, 리에르 아르빈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피스는 롬이 리에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가 예전의 어수룩하던 꼬마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이 함께 덤벼도 당해내기 힘든 괴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피스는 머릿속으로 모의 전투를 해보고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수집해 왔던 적혈의 악마, 리에르의 전투 능력과 현재 있는 기사들.
모의 전투는 10전 1승 9패였다.
상상 속으로 계산된 전투지만 겨우 올린 1승도 전멸 상태에서 공멸하는 것이 한계였다.
‘적혈의 악마를 상대로 열의 하나라면 굉장히 높다.’
심각한 피스의 얼굴을 보고 주변 동료 기사들은 놀려대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렸으니 얼마나 속상한가, 피스 경?”
“자네 눈이 작아서 어딜 보고 있을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말게.”
피스는 동료들의 히죽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대신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롬을 주시했다.
‘만약 대공 각하의 도움을 받는다면…….’
이실렌 대공은 뛰어난 전술과 정치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뛰어난 정령 술사이기도 했다.
대륙최강이라 불리는 신검의 로이스타도 감히 승리를 장담하지 않는 상대가 강철의 대공이었다.
적혈의 악마가 시가지로 들어온다면 피해는 커졌다. 하지만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열에 여덟…….’
최종적으로 나온 계산은 굉장히 높았다.
희생당할 사람들에겐 안타깝지만, 피스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까지 불태울 수 있을 사람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의 노을. 그 아래를 걷는 마리엔느와 롬을 보니 피스는 기분이 묘해졌다.
마리엔느가 여느 때와 달리 얌전한 거로 보였다. 아니, 분명 그녀는 지금 고분고분했다.
마리엔느는 피스의 여동생과 닮은꼴이었다. 그렇다면 남자를 보는 눈도 비슷할 수 있었다.
호기심 많은 처녀가 위기에서 구해준 청년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더군다나 그 상대가 훤칠한 미남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리에르 아르빈트라면 피스의 입장에선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다.
적혈의 악마가 나타나는 곳은 여지없이 피바다를 이루고, 생존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녀석은 도시든, 군대든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괴물이었다. 소문은 과장을 포함한다. 하지만 적혈의 악마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피스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적혈의 악마가 로빈타 왕국에 있다.
그리고 철의 대공 이실렌이 거주하는 도시를 찾아왔다. 그리고 적혈의 악마가 이실렌이 아끼는 단 하나뿐인 손녀딸과 있다.
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항이었다.
적혈의 악마가 주로 노리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수뇌부, 혹은 영웅이었다.
사람들의 빛이 될 수 있는 존재를 말살했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이 우연을 우연이라 믿지 않는 사람은 많았다.
적혈의 악마 뒤로는 무언가 숨겨진 조직이 뒤에 있다고 예견하는 자도 있었다.
‘대공 각하를 노리는 인물은 많다.’
철의 대제를 죽이고 싶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바로 이웃 국가 크샨타만 해도 그랬다. 이실렌의 활약 덕분에 어둠에 묻히게 된 비운의 국가였다.
결국, 삼 년 전쟁 끝에 크샨타는 로빈타에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아울러 대공은 실력과 재능, 인성만 있다면 직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등용했다.
민간인들에겐 환영받을 일일지 모르나, 귀족들에게 있어서 대공의 강철 정치는 눈엣가시였다.
그의 정치 때문에 실각한 대신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피스는 절대 아둔한 남자가 아니었다. 기사로서의 검 실력도, 또한 전략가로서도 재능이 있었다. 이대로 적혈의 악마를 진입시킨다면 감당 못 할 사태를 야기할 수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굽이 땅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피스의 시야 안으로 대저택의 입구가 보였다.
마리엔느는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만날 거라고 기뻐했다. 또한, 동경하던 맥크웰과의 만남에 설레했다.
그런 아가씨의 호감을 받고, 신뢰를 받아 말고삐를 쥐고 있는 청년은 무감각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피스는 그 청년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심각한 사태가 다가올 것을 모르는 백기사들은 이제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마음을 푹 내려놓고 있었다.
“한동안은 갑옷을 입지 않아도 되겠군.”
“경호해야 할걸?”
“경호는 무슨. 그동안 고생한 것을 생각한다면 휴가를 받아야지.”
천하 태평한 동료들을 보며 피스는 왠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속 모르는 이들에게 지금의 위험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었다. 이미 대저택으로 가는 문은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녁노을 아래 펼쳐진 대저택의 정원은 숲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풍성했다. 윤기 나는 과실이 향수처럼 향기를 은은하게 뿌렸다.
대저택의 앞에는 각 귀족이 타고 온 마차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마차는 하나같이 화려했다. 장식처럼 단 정교한 문장은 이들의 출신과 혈통을 줄줄이 나열하는 것 같았다.
마차를 지키고 있는 마부마저도 깃털이 달린 챙모자와 깔끔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장식용 레이피어를 허리에 매고 있는 이도 있었다.
큰 귀족들에겐 축적된 부와 위엄을 나타내는 축도는 누가 뭐라 하여도 저택의 규모였다.
옷과 장신구는 그저 개인의 부와 허영심을 나타내는 지표일 뿐이었다. 귀족들이 어딜 가든 대동하는 잘생긴 하인, 혹은 아름다운 하녀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장식품이었다.
마리엔느는 수없이 늘어져 있는 마차들을 보면서 자신도 저런 걸 타고 왔으면 좋았을 거라고 뒤늦은 후회를 하였다.
백마를 탄 기사들을 대동하는 여행을 한 번쯤은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마리엔느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것은 낭만적이진 않았다.
기사 중 잘생긴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죄다 아저씨들뿐이었다. 그나마 피스가 20대 중반이었으나 평범하고 수수한 실눈의 남성은 그녀의 취향에 어긋났다.
그래도 그녀가 하나 건진 것이 있다면 롬이라는 사내였다.
깎아진 듯이 섬세한 얼굴은 세련된 조각상 같았고, 맨손으로도 즉각적인 전투를 하는 강력함은 그 어떤 귀족 자제보다 훌륭한 하인이 될 수 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채운 것이 아쉽지만, 그것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수려한 외모와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다른 귀족 수행원에게 밀리지 않았다.
‘내 시종으로 삼아야지.’
마리엔느는 롬을 자신의 고용인으로 쓸 생각에 기뻐했다.
하지만 롬의 생각은 달랐다.
‘더 편해졌군.’
롬은 예상보다 쉽게 대공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좋아했다.
그로서는 애초에 마리엔느를 이용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또한, 그녀가 위험에 처하게 된 순간까지 롬을 위해 준비된 상황 같았다.
일이 잘 풀려서 좋긴 하지만 롬은 상황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고블린은 숲에 사는 이종족이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자신들이 강자일 때만 드러내고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그들은 기사들에게 정면 대결을 했고, 전멸할 때까지 도주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