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gning and Healing in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6)
사표내고 이계에서 힐링합니다-235화 (외전 완결)(236/236)
외전 11화 (완결)
성수동 아파트.
로비 앞에는 고급 세단이 대기 중이었다.
이수는 렌트카 업체 사람에게 키를 넘겨받았다.
“감사합니다.”
“옙, 감사합니다.”
하이엔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녀는 업체 직원이 떠나자마자 이수의 옆으로 다가섰다.
“저 사람은 이 비싼 자동차의 주인이야? 너랑 신분이 비슷한 것이냐?”
“여긴 신분제도가 없어. 전에 얘기했잖아? 친하지 않은 사람한테는 존댓말이 기본이야. 알았지?”
“아하!”
“그러니까 식당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직원을 하녀처럼 대하면 안 돼. 꼭! 반드시! 존댓말을 써야 해.”
“응!”
하이엔은 엄밀히 따지면 이쪽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신분증이 없으니 사건사고에 휘말리면 곤란해진다.
이수는 하이엔을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럼 백화점으로 가 봅시다. 거기서 점심도 먹고.”
11월.
하이엔은 얇은 봄 정장을 그대로 입고 나온 터였다. 돌아다니려면 옷부터 사야 했다.
하이엔은 백화점으로 가는 내내 이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운전하는 거 보니까 멋있어?”
“…응?”
왜 운전 잘하는 남자 보면 멋있어 보이고 그러지 않나? 하는 생각에 질문했건만. 하이엔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여기선 마부를 멋있다고 해? 난 말 잘 모는 마부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걸?”
“푸핫.”
마부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하이엔이 말을 이었다.
“그냥 네 얼굴이 조금 낯설어서. 익숙해지려고 보고 있었어.”
“그랬고만?”
“검정 머리도 잘 어울려. 코가 살짝 낮아진 것 같은데 나름 귀여운 것 같고….”
눈에 콩깍지가 쓰인 게 틀림없다.
솔직히 이수는 이쪽 세상에서 특별할 것 없는 외모였으니까.
“하이엔. 혹시 이쪽에 넘어와서 마법 써봤어?”
“응. 근데 잃어버렸어. 마법을 쓸 수 없었어.”
“그래?”
이것도 조이스가 걸어둔 제약이었다.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인과율에 어긋난다.
실은 차원문의 존재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차원문을 여는 능력은, 반드시 그 능력을 감당할만한 엘프에게만 주어졌다.
차원문 마법사는 차원문을 열고, 차원문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과 물건을 제한할 수 있으며, 이능을 준다거나 제약할 수도 있었다.
백화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크로플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크로플은 크루아상 생지를 와플처럼 납작하게 구워낸 빵이었다.
“너무너무 맛있다. 진짜진짜 맛있다. 집에 갈 때 많이 사가자. 응?”
“그럽시다!”
하이엔은 백화점의 구조부터 찬찬히 살폈다.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매장과 진열된 상품들.
‘제제한테 알려줘야지.’
주변을 둘러보니 알 것 같았다.
왜 이수가 그렇게 ‘청결’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매장을 전전하던 이수가 물었다.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음… 에르만이랑은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이상하다.”
“그냥 여기서 잠깐 입을 거니까. 내가 골라줄게.”
“그게 좋겠어.”
이수는 롱원피스와 운동화, 무난한 코트를 골랐다. 하이엔은 바지를 싫어했다. 항상 치마만 입다 보니 다리에 옷감이 닿는 게 낯선 모양이었다.
11월. 맨다리로 원피스를 입기에는 추운 날씨지만 하이엔은 익숙했다. 이수가 고른 아이템 중, 하이엔은 운동화를 제일 마음에 들어 했다.
“못생겼는데 참 편한 신발이다.”
“그치?”
“색깔별로 사 갈래!”
그나저나 하이엔에겐 아공간 주머니가 없는데. 그렇다면 무게 제한 없이 마음껏 물건을 옮길 수 있는 건가?
한 번 시험해 봐야지.
“근데 이 신발. 에르만에서도 신을 수 있겠어?”
“그냥 진열해 두려고. 기념품.”
“…알았다.”
만약 하이엔의 차원문을 통해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없다면? 그래도 아공간 주머니가 있으니 문제는 없었다.
‘하루에 3kg씩 딱딱 맞춰서 창고로 옮겨놔야겠네.’
함께 걷던 하이엔이 발걸음을 멈췄다.
모피 매장 앞이었다.
“이수. 나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것들을 전부 다 사야 할 것 같아.”
하이엔은 반짝이는 눈으로 이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사고 싶은 거 다 사.”
“이힛. 고마워! 역시 넌 오빠다!”
이힛?
하이엔.
너 이런 웃음소리도 낼 줄 알았던 거냐?
쇼핑을 아주 좋아한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구나 싶다.
모피는 에르만 귀족들이 즐겨 찾는 옷감 아니던가. 하이엔은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갔다.
“이수! 200만 원이면 몇 골드야?”
“20골드.”
“우와… 이렇게 예쁜 핑크색 밍크코트가 20골드라니. 여긴 천국이야. 천국이 틀림없어! 그렇지?”
이 정도 퀄리티의 모피코트를 에르만에서 사려면 최소 200골드다. 이쪽에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모피 제품이 있겠다마는. 하이엔은 비교적 저렴한 제품을 선택했다.
잔뜩 들뜬 하이엔을 위해, 이수는 열과 성을 다해 리액션을 해주었다.
“고럼! 여기가 바로 천국이지!”
모피?
솔직히 이수는 에르만에서 처음 입어봤다.
현대 사회에서는 대체품이 많잖아? 게다가 모피 산업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있고. 굳이 모피를 입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하이엔에게 ‘이러이러하니 사지 마!’라고 하긴 어려웠다. 주어진 시간은 딱 한 달이다.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이엔은 결국 밍크코트 3벌, 토끼털 코트 2벌, 여우털 코트 3벌을 사들였다. 그중 두 벌은 제이스로제한테 선물한다고 했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서 다행이야! 이쪽도 귀족…이 아니라 돈 많은 자들은 모피를 입어?”
“응. 여기서도 모피는 비싼 편이야. 근데 요즘은 잘 안 입어.”
“왜?”
“음… 모피 코트를 만들려면 동물을 엄청 많이 죽여야 하니까.”
하이엔은 고개를 갸웃하며 얘기했다.
“여기도 계란이랑 닭고기 먹잖아. 동물의 알을 빼앗고 죽여서 먹으면서. 왜 옷감을 얻는 동물은 죽이면 안 된다는 거야?”
“동물을 죽이지 않고도 따뜻한 옷을 만들 수 있거든.”
“아…! 예전에 네가 선물해준 패딩인가 뭔가. 그런 거?”
“맞아.”
하이엔은 이수가 빼앗기라도 할세라 쇼핑백을 꼭 움켜쥐었다.
“그럼 이 아름다운 모피들은 얼른 자동차에 실어 둘래.”
“안 뺏어 갈 테니 걱정 마세요.”
“응!”
저녁은 근처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일단 익숙한 음식부터 차례로 섭렵해나갈 예정이었다.
하이엔은 메뉴판을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어차피 메뉴라고는 디너 코스. 딱 하나뿐인데 읽을 게 있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
하이엔이 밝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코스에 맞춰 와인을 준대! 6잔 페어링. 이게 좋겠다.”
으유.
누가 와인 귀신 아니랄까 봐.
“그럼 나도 그걸로 하지 뭐.”
6잔이면 좀 많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함께 먹고 마시며 얘기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샴페인과 함께 웰컴 스낵이 서빙된다.
“우와… 진짜 예쁘다.”
쌀과자 위에 알록달록한 채소와 새싹, 꽃잎을 올린 스낵. 이후로도 음식이 나올 때마다 하이엔은 감탄했다.
“정말 격이 달라. 왜 세스한테 이런 건 알려주지 않았어?”
플레이팅?
플레이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에르만 사람들은 큼직큼직한 걸 좋아하잖아. 그리고 세스의 영역이라서 깊이 터치하고 싶지 않았거든.”
“아… 그럼 내가 닦달해볼게.”
“크핫. 그러든가.”
주방장의 혼이 느껴지는 예술품 앞에서. 하이엔은 감동받았다.
트러플이며 바질, 소고기, 아스파라거스, 오리. 하나같이 익숙한 재료인데. 플레이팅도 훌륭하고 맛 또한 예술이었다.
“부럽다. 이쪽 사람들은 이런 걸 매일 먹는구나….”
“돈만 있으면 어렵지 않지. 근데 대다수의 사람은 특별한 날에만 찾아와. 우리 둘이 한 끼 식비만 7골드잖아. 평민쯤 되는 사람들은 매일 올 수 없는 거지.”
“여긴 돈이 곧 계급인 거구나?”
“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
작위만 없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분명 존재한다.
“하이엔. 그간 잡지 보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 있어?”
“비행기? 기차도 타고 싶고.”
“비행기는 좀 어렵겠는데?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이쪽에선 신분증 발급받는 게 까다롭거든.”
“….”
하이엔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비행기였는데 타지 못한다니.
그 표정을 본 이수가 얼른 말을 이었다.
“대신에 비슷한 거 타러 가자.”
수원 화성 열기구도 있고 패러글라이딩도 있고.
비행기만큼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이수는 하이엔을 수원도, 패러글라이딩 체험장도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모험과 신비의 나라!
롯X월드였다.
귀여운 인형 탈을 본 하이엔의 표정이 밝아진다.
화려한 조명.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놀이기구.
함성 소리.
즐기기에 앞서.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하나 사서 하이엔에게 씌워 주고. 제일 먼저 풍선을 타러 올라갔다. 여기에서 열기구 비슷한 놀이기구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30분 정도 기다려야 해.”
아침 일찍 와서 매직 패스 예약을 했다면 줄을 설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이런 것도 다 추억이고 경험 아닐까? 에르만에서는 공작님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일이 없을 테니까.
다행히 하이엔은 군말 없이 잘 기다려 주었다. 그저 초조한 표정으로 거대 풍선을 지켜볼 뿐이었다.
드디어 차례가 오고.
조명이 켜진 풍선에 오른다.
하이엔은 긴장한 듯 이수의 손을 꼭 붙잡았다.
“타본 적 있어?”
“아니. 나도 처음이야.”
놀이동산 와서 열기구 탈 시간이 어딨냐. 롤러코스터라든지 후룸라이드라든지.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풍선은 불길한 쇳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퍽 낭만적이었다.
“우와. 우리 영주관도 저렇게 화려하게 꾸며두면 좋겠다.”
하이엔의 말에 함께 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이 끌리는 외모인데. 한국말도 유창한 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까지 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이수가 하이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쫌만 조용히 얘기해 줘. 여기는 영주관이 없으니까.”
“아참.”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야경을 구경했다.
“좋다. 그치?”
“응. 꿈같아.”
놀이동산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하이엔이 바이킹을 타고 오바이트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무서웠어?”
째릿.
“몽! 페리뇨! 데! 알로!”
얼음 가시 주문 참 오랜만에 듣네.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이수는 웃으며 하이엔을 꼭 안아 주었다.
“돌아가면 다시는 못 타잖아. 아마 한 1년 있으면 생각날걸?”
“아니. 생각나지 않아. 절대로.”
바이킹은 생각 안 나도, 바이킹을 타며 함께 소리 질렀던 순간은 생각나겠지.
한 달 중 20일을 서울에서 머물렀다.
중간에 경주 한 번. 강릉에 한 번 다녀왔다.
솔직히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하이엔에겐 서울도 볼거리가 넘치는 곳이었으니까. 특히 뮤지컬을 좋아해서 다섯 작품이나 관람했다.
떠날 즈음.
이수의 집 거실은 물건으로 가득 찼다. 모두 하이엔이 가지고 넘어가겠노라 선언한 제품들이었다.
“밀키X. 이건 박스로 쌓아두고 마실래. 내 최애 음료수다! 크런치 초코바도 떨어질 때마다 사다 줄 수 있지? 네가 만든 초콜릿이 제일 맛있긴 한데. 바삭바삭 씹히는 식감이 좋아서 그래. 복숭아 맛 맥주도 항상 냉장고에 넣어두면 좋겠다. 내가 마시고 싶을 때마다 꺼내다 줄 수 있지?”
하이엔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한 번쯤은 와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네 고향이 어떤 곳인지. 이젠 확실히 알게 됐으니까.”
“재밌었어?”
“응!”
“잊지 말자.”
“못 잊을 거야. 평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어.”
“뭔데?”
하이엔의 표정은 진지했다.
왠지 긴장되는데?
“너 거짓말 한 거 있지?”
“…응?”
뭐지?
‘어딘가에서 구여친이랑 마주치기라도 한 건가? 방안 어딘가에 구여친의 흔적이 남아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네.
하이엔은 이수에게 성큼 다가섰다.
“오빠.”
“…으응?”
“오빠의 뜻이 뭐라고 했더라?”
걸렸군.
어떻게 알아낸 거냐?
「 오빠란 나처럼 자상하고 잘생긴 남자를 일컫는 말이지. 」
언젠가 이수가 하이엔에게 해준 얘기였다. 하이엔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하이엔은 당황한 이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거짓말은 어찌 됐든 나쁜 거잖아. 날 놀린 거지. 그렇지?”
“미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까 ‘누나’라고 불러봐.”
“자! 그럼 우리 돌아가자. 결혼 준비하러 갑시다!”
이수는 옷가지를 챙겨 현관으로 재빨리 튀었다.
하이엔도 빠른 걸음으로 이수를 뒤쫓았다.
“이 새파랗게 어린 동생아. 누나라고 부르지 못하겠느냐!”
“싫어!”
“왜!”
“싫어. 그냥 싫다고오!”
결혼 이후.
이수는 하이엔을 가끔씩 누나라고 불러주었다.
누군가 누나의 뜻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누나란 하이엔처럼 예쁘고 우아한 여자를 일컫는 호칭이라고.
부부는 70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이수는 하이엔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수가 사망한 지 한 달 후.
하이엔도 이수와 비슷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에는 자수정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품에는 이수 대신 콩콩이를 안고 있었다.
부부의 장례식에는 약 15만 명의 조문객이 찾았고, 영지민과 가신들은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블룸 부부를 추모했다.
이수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그대의 눈물은 내가 함께 지고 떠나리다.
당신의 앞날이 화창하기를.
– 이수 조한 블룸 」